사실 재미 삼아 끼적거리기 시작한 칼럼이지만 회를 거듭함에 따라 여러 가지 고민이 따르게 되어 버렸다. 평소 좋아하던 음악에 관해 진지하게 탐구해 볼 만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기도 하지만, ‘원고 마감’이라는 단어가 주는 공포 또한 알게 되었다. 어언 반세기를 넘긴 록 음악의 역사를 나의 극히 미미한 지식과 졸렬한 필치로 풀어나가려다 보니 여러모로 놓치고 가는 것이 많음을 인정한다. 물론 ‘뮤지션의 관점에서 본 록큰롤 스타’라는 화두가 본 칼럼의 골자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뮤지션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인적인 오류를 범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지금껏 록큰롤의 창세기를 대표하는 뮤지션들에 관해 다루어 오며 그들의 위대함이란 그들이 개척자였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런 고로 미국의 50년대는 개척의 시대였다.
록 음악에 시대정신이 주입된 것도, 흑과 백의 음악적 화합을 모색한 것도, 일렉트릭 기타의 굉음과 드럼 비트가 음악의 무드를 결정짓는 하나의 커다란 요소가 된 것 또한 모두 50년대가 일구어 낸 것이었다. 나의 글을 읽고 50년대의 록큰롤을 접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한 가지 당부할 말이 있다. “절대 현행의 록 음악과 비교하지 말 것.” 록큰롤은 철 지난 구닥다리 음악이 아니다. 록큰롤은 원형 그 자체이며 장르로서 구분될 성질의 음악이 아니다. 록큰롤은 일종의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50년대 이후에도 ‘록큰롤’은 수없이 진화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비틀즈도, 벨벳 언더그라운드도, 섹스 피스톨즈도, 너바나도, 오아시스도, 결국엔 그 수많은 사운드의 기원을 50년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참에 특정 뮤지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 록큰롤의 부흥기였던 1950년대의 연대기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의미가 깊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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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프리드 | |
‘록큰롤’이란 단어는 50년대 초 미국의 라디오 DJ 앨런 프리드에 의하여 탄생된 신조어였다. 록큰롤의 특징은 흑인 음악인 리듬 앤 블루스(R&B)의 균등한 에잇 비트, 블루스의 셔플, 재즈의 스윙 등 리듬에다가, 전형적인 블루스 코드 진행(A-A-D-A-E-D-A와 같은 코드 패턴을 반복)이나 음계(블루스 뮤직의 오음계. 즉 펜타토닉 스케일이나 재즈에서의 블루 노트 스케일 등)를 응용한 악곡 구성에 있다. 록큰롤의 정의는 그러한 특징에 백인 음악인 컨트리 앤 웨스턴의 요소를 약간 더한 것으로 한다.
컨트리 앤 웨스턴의 특징에는 ‘히컵hiccup 보컬’, 즉 딸꾹질과도 같은 보컬 스타일(
Johnny Burnette - 「Rockabilly Boogie」)과 밴조 연주에서 영향을 받은 기타의 갤로핑 주법(
Chet Atkins - 「Mr. Sandman」), 오른손으로 때려서 둔탁하고 퍼커시브한 효과를 만드는 슬랩 베이스(
Pete Turland - 「Rockabilly slap bass」) 등이 있다. 50년대의 음악을 말할 때 흔히 ‘록커빌리’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Rock'n'roll’과 백인의 전통음악인 ‘Hillbilly’의 합성어이다. 록커빌리는 록큰롤의 하위 개념으로서 동의어인 동시에 미묘한 부분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엄밀히 따지자면, 백인의 컨트리 앤 웨스턴적인 요소가 강한 것을 록커빌리, 흑인 음악인 R&B의 요소가 강한 것을 록큰롤이라 할 수 있다.
록큰롤 밴드의 기본적인 악기 편성은 일렉트릭 기타, 일렉트릭 베이스, 드럼 등이 대표적이다. 때때로 색소폰과 피아노를 추가하기도 한다. 사용 악기의 다채로움은 록큰롤이 다양한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입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앨런 프리드의 숨겨진 아이디어에서 태어난 록큰롤. 여기서 록큰롤이라는 단어를 고안한 그에 대하여 짚고 넘어가도록 하자. 앨런 프리드는 50년대 초에 활약하며 라디오계의 제왕으로까지 불리던 라디오 DJ였다. 백인이면서 흑인 음악인 블루스나 R&B 등에 매료되어 줄곧 자신의 취향대로 노래를 틀기 시작했다. 당시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이 극심하던 시대였다. 생활환경은 인종이란 벽에 의해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당연히 백인에게 있어 흑인의 문화를 접하는 행위란 금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흑인의 R&B와 백인의 컨트리를 융합시킨 음악을 연주하는 아티스트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빌 헤일리와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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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헤일리 | |
앨런 프리드는 그들의 곡을 록큰롤이라 명명하여 방송하기 시작했다. 록큰롤이란 흑인의 슬랭으로서 섹스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백인들은 흑인 음악과도 같은 ‘백인 음악’을 연주하는 백인 뮤지션에게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당시 백인 기성세대에게 록큰롤이란 ‘악마의 음악’이라는 좋지 않은 이미지가 절대적이었지만, 반항기의 청소년들에게 있어 그런 것은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러한 흑인 음악을 백인들에게 위화감 없이 주입하기 위하여 록큰롤이라는 신조어를 고안해 낸 것이라 전해진다. 당시 록큰롤에는 성적인 암시를 담은 곡이 많았고, 그것은 안성맞춤의 작명 센스였던 것이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록큰롤의 음악적 형식은 이미 40년대 말 흑인 R&B 뮤지션들에 의해 완성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대가 록큰롤 연대기 최초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이유는 앞서 설명한 빌 헤일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성공으로 인해 록큰롤은 백인의 음악으로서 정착할 수 있었다.
50년대 중반에 접어들어 수많은 록큰롤 스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척 베리, 리틀 리처드, 버디 홀리 등등. 그들은 각각의 독창적인 재능으로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혀간 천재들이었다. 이 시기에서 50년대 말까지를 록큰롤의 황금기라 부른다. 50년대에 등장한 ‘오리지널 록큰롤’(록커빌리를 포함한)은 50년대 후반을 맞이하며 서서히 지취를 감추었다. 바로 이 시기에 수많은 비극이 차례차례 록큰롤 스타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이른바 ‘록큰롤의 저주’라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알아보자.
1958년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엘비스가 육군에 입대, 이때부터 록큰롤 신에는 마치 저주와도 같은 사건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1959년 2월 3일 버디 홀리, 리치 발렌스, 빅 바퍼가 탑승한 투어 비행기가 추락하여 전원 사망, 같은 해 12월에는 척 베리가 미성년자 매춘으로 체포, 제리 리 루이스는 어린 사촌과의 스캔들로 추락하여 음악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고, 록커빌리 스타로 절친한 사이였던 에디 코크런과 진 빈센트가 함께 타고 있던 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진 빈센트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에디 코크런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다. 그리고 록큰롤의 아버지 앨런 프리드는 페이올라 스캔들(레코드 관계자로부터 금품을 받아온 사실이 밝혀짐)로 자신의 커리어에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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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 |
후에 돈 맥클린이나 존 레넌의 인터뷰와 노래에서 1959년은 ‘음악이 죽은 해’로 묘사된다. 이렇듯 삽시간에 ‘오리지널 록큰롤’의 전성기는 이렇듯 삽시간에 끝장이 나버렸고, 이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생기 없고 상투적인 노래들만이 주를 이루었다. 이러한 ‘록의 암흑기’는 척 베리와 엘비스 프레슬리에게 고무되어 청소년기를 보낸 잉글랜드 리버풀 출신의 청년 네 명이 미국에 상륙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