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Man Standing, 록큰롤의 타락 천사
들이 무대 위에서나 실생활에서나 대부분이 난봉꾼이 된 것은 거의 당연할 만큼의 수순이었다. 그런 록큰롤의 난봉꾼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제리 리 루이스.
글ㆍ사진 차승우
2009.12.29
작게
크게
록은 원래 사탄의 음악이었다. 록 음악은 그 단순한 구조의 사운드 속에 수많은 반기독교적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50년대 중반 세간에 록큰롤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시 기독교적 윤리관을 갖고 있던 미국의 (백인) 기성세대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하여 뒤로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록큰롤 가수들의 공연은 그들이 말하는 ‘반기독교적 이미지’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들은 젊은 세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당시 비주류였던 흑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구세대의 가치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이전의 점잔 빼던 대중 예술인들과는 달리 그들은 요란하고, 음란하며, 난폭했다. 대체적으로 반짝거리는 삶, 스포츠카, 음주 가무, 섹스 등을 소재로 한 노래들은 말 그대로 쾌락 그 자체였고, 이는 젊은 세대들이 갈망하는 판타지에 다름 아니었다. 소란스러운 밴드의 연주와 반복적인 드럼 비트에 이끌린 관객은 사회적 규범과 성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끼게 되고 집단 최면과도 같은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무대 위 ‘프런트 맨’에 의해 주도되며, 프런트 맨이란 뭐랄까. 샤머니즘에 있어 제사장의 역할과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할까. 프런트 맨의 광적이고 자아도취적인 퍼포먼스, 시쳇말로 무대에서 ‘자뻑’을 하는 모습을 보고 관객들은 간접 경험과 대리 만족을 느끼며 열광적으로 반응한다. 한바탕 난리 굿은 곧 스테이지와 관객 간의 상호?유기적인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 일반적인 종교 집회의 그것과도 닮았으되, 성스러움이 아닌 대체로는 성적인 의미에서의 카타르시스라 해야 맞을 것이다. 할렐루야~ 이러한 모든 것들은 기독교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사악한 것이라 규정되곤 했다.

초기 록큰롤은 반항의 음악으로서 그 역할을 공고히 하고 있었다. ‘록큰롤러’들은 의도적인 불경스러움으로 기성세대의 가치를 조롱하며 살살 건드렸고, 젊은 세대들은 그런 그들에 열광했다. 그렇게 5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단 몇 년 간의 부흥기를 통해 수많은 록큰롤 스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들 대부분은 어린 나이에 벼락스타가 된 촌놈들이었다. 돈방석에 올라앉은 어린 한량들 주위엔 온갖 종류의 달콤한 유혹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흥청망청 쾌락에 탐닉했고 타락의 미학을 추구하였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곧 록큰롤의 세계에 있어 하나의 미덕이자 록큰롤을 이루는 일종의 코드가 되었다. 그들이 무대 위에서나 실생활에서나 대부분이 난봉꾼이 된 것은 거의 당연할 만큼의 수순이었다. 그런 록큰롤의 난봉꾼 중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제리 리 루이스.


금발의 긴 곱슬머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그는 백인 최초의 피아노 록큰롤 스타였다. 특유의 찍어 누르는 듯한 박력 넘치는 피아노 플레이와 신들린 듯한 스테이지 매너(때때로 그는 발뒤꿈치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아예 피아노를 밟고 서서 노래 부르기도 했다. 아마도 그는 공연 중 자신의 악기에 불을 지른 최초의 아티스트일 것이다), 거들먹거리는 언행, 성적인 흥분감으로 가득 찬 그의 훌륭한 노래들은 단박에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스스로 붙인 ‘the Killer’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똘기’ 충만한 ‘막가파’였던 그는 동시대의 리틀 리처드, 70년대의 엘튼 존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피아노 록커라는 영예에도 불구하고, 술, 마약, 총기 폭력, 여자 문제 등, 몸소 ‘타락 록뿄’의 표본을 확립하며 역시 척 베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언론의 집중포화에 의해 무참히 몰락하며 오랜 기간 동안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그 외에도 무려 6회에 이르는 결혼, 두 자녀의 죽음, 파산에 이르기까지 파란으로 얼룩진 그의 삶은 그야말로 록커가 갈 수 있는 막장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일람표였다.

제리 리 루이스는 1935년 9월 29일 루이지애나 주 동부의 페리데이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그의 부모는 빈곤한 ?지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농장을 저당 잡히고 피아노를 사주었다. 두 사촌과 함께 레슨을 받기 시작한 그는 집 근처 흑인 전용 클럽과 심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을 교본 삼아 피아노 연습에 열중했다. 제리는 문 멀리컨Moon Mullican, 메릴 무어Merrill Moore 와 같은 컨트리 부기 피아니스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리듬 앤 블루스, 부기우기, 컨트리뮤직의 요소를 조합해 자신만의 독창적인 연주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1949년 11월 19일 그는 페리데이의 포드자동차 공식 대리점 오픈 행사에서 프로 뮤지션으로서의 첫 공연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그의 부모는 독실한 크리스천이었고 자식이 신앙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이듬해 그는 모친의 권유로 텍사스 주 왁사하치의 사우스웨스턴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당시 백인 기독교도 사이에서 금기시되었던 흑인 음악에 빠져 지내며 학교에서 찬송가 「My God Is Real」을 부기우기 풍으로 연주, 이를 신성모독이라 여긴 교사들에게 미움을 사기 시작한다. 잦은 폭력으로 급우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고, 밤에는 기숙사에서 몰래 빠져나와 음주와 매춘 등 방탕한 생활을 반복, 입학 3개월 만에 급기야 퇴학을 당하고 만다.(그는 교사의 딸에게 마수를 뻗치기도 했는데, 그녀의 이름은 도로시 바튼이었다. 17살이 되던 해 그녀와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결혼 기간은 20개월. 하~)

제리 리 루이스는 페리데이와 미시시피 주의 나체즈 등지의 클럽을 돌며 활발하게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1954년 루이지애나 주의 방송국에서 행크 스노우의 「I Don't Hurt Anymore」와 에디 핏셔의 「If I Ever Needed You I Need You Now」를 커버해 데모 테이프로 제작한다. 1956년 그는 엘비스를 비롯하여 자니 캐시, 칼 퍼킨스 등의 슈퍼스타들이 소속되어 있던 멤피스의 썬 레코드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사장이었던 샘 필립스는 부재중이었지만 스튜디오의 엔지니어인 잭 클레멘토가 그의 연주를 듣고 매우 흡족해한다. “자네 제법 하는걸. 조금만 다듬으면 끝내 주겠구먼! 오늘은 사장님이 안 계시니 한 달 후에 또 봄세!” 그로부터 1개월이 지난 56년 11월 플로리다로부터 돌아온 썬 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는 무심코 제리의 데모 테이프를 듣고 그 자리에서 대박을 예감했다. “이 작자……! 월척이렷다!”

Jerry Lee Lewis - 「Great balls of fire & Breathless」(live 1958)

그는 바로 제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군이 제리 리인가? 당장 스튜디오로 오라구!” 제리 리 루이스는 썬 스튜디오에서 그의 첫 싱글을 녹음하게 된다. 「End of the Road」 그리고 「Crazy Arms」. 그는 썬 스튜디오에서 자니 캐시나 칼 퍼킨스 같은 이미 정상급이었던 가수 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스튜디오 세션맨으로서) 자신의 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7년 3월, 두 번째 싱글 「Whole Lotta Shakin’ Going on」을 발표, 같은 해 7월엔 전미 차트 톱 40에 진입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7월 15일 <스티브 앨런 쇼>라는 인기 TV 쇼에 출연하게 되는데, 그것이 미국 전역에 그의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된다. 반응은 즉각적이며 폭발적이었고 그의 노래는 단숨에 전미 차트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10월엔 록의 고전 「Great Balls of Fire」를 발매하는데, 그는 이 싱글로써 썬 레코드를 위기에서 구해낸 구세주가 되었다. (위기는 55년 엘비스가 막대한 계약금을 받고 RCA 레코드로 이적한 이후 이렇다 할 간판스타가 없었기 때문에 악화되었다.) 이 곡은 다음해 1월 전미 차트 2위까지 오르며 대히트를 기록한다. 이렇게 꿈만 같은 히트 퍼레이드의 와중에 돌연 자신의 인생을 한순간에 망쳐 놓을 중대한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1957년 12월 12일 제리 리 루이스는 조용히 세 번째 혼인식을 치렀다. 그의 와이프는 다름 아닌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그의 사촌 형제인 J. W. 브라운의 딸이었다. 마이라 게일 브라운은 고작 열셋밖에 안 된 소녀였다. 아직 그들은 이 일이 자신들의 인?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알지 못했다. 슈퍼스타의 위치에 오른 그는 아방궁과도 같은 집을 짓고 왕 행세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왕 행세의 원조는 역시 엘비스!) 1958년 10월엔 새로운 싱글 「Breathless」를 발표, 이 또한 전미 차트 7위까지 오르며 그의 세 번째 톱 텐 히트곡이 된다. 1958년 5월 영국 투어를 시작하고 그의 어린 부인이 동행한다. 공항에 취재차 나왔던 기자들은 아무리 보아도 너무나 어려보이는 부인의 나이를 물었고 제리는 올해 열다섯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를 미심쩍게 여긴 영국의 기자들은 제리의 처가 실은 사촌 형제의 열세 살 난 딸이었다는 사실을 캐내었다. 게다가 전 부인과 채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이라와 혼인식을 올렸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대소동이 벌어진다.

Jerry Lee Lewis - 「Highschool Confidential」

순식간에 보수적인 영국의 언론은 천인공노할 짓이라며 그를 몰아세웠고 미국에서 또한 비난의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었다. 결국 영국 투어는 3회 공연을 끝으로 취소되었고, 그는 곧바로 귀국길에 오른다. 그는 같은 해 6월 영화 의 동명 주제곡이 톱 40에 진입함과 동시에 빌보드지에 전면 광고를 실었다. 일종의 대국민 사과문이었다. 이 일련의 스캔들은 록큰롤에 대한 백인 사회의 잠재적이지만 속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반감에 불을 지폈고 제리는 사실상 미국 연예계에서 퇴출되기에 이른다. 녹음 일정은 전면 취소되었고 1회 출연당 기본 1만 달러를 벌어들였던 대형 콘서트장에서 하룻밤에 100달러도 벌까 말까 한 조그만 클럽으로 자신의 활동 무대를 옮겨야했다. 이후 제리는 레이 찰스의 「What'd I Say」를 녹음해서 차트 30위까지 오르기도 했지만 그것으로 그의 전성기는 종말을 고하게 된다. 급전직하도 그런 급전직하가 없었다.

1963년 썬 레코드를 나와 머큐리 레코드 산하의 스매시 레코드로 거점을 옮긴 그는 이곳에서 다수의 앨범을 발표하지만, 이렇다 할 성취를 일구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60년대 중반엔 활동 거점을 유럽으로 옮기고,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성공을 거둔다. 1960년대 말에 들어서 제리는 컨트리계에 진출, 68년에서 72년에 걸쳐 총 15곡의 컨트리 차트 톱 10 히트곡을 발표했다. 활동의 장은 바뀌었지만 스테이지 위에서만큼은 변함없이 박력 넘치는 옛 모습 그대로였다. 1970년대에 들어 그는 오리지널 록큰롤로 회귀한 듯한 앨범 그리고 피터 프램튼(70년대의 수퍼 스타)과 알빈 리(밴드 텐 이어스 애프터의 기타리스트) 같은 후배 영국 뮤지션과 협연한 과 같은 앨범을 발매한다. 특히 후자가 전미 앨범 차트 37위에 오르며 건재를 과시하는 듯했다. 그러나 그 세월 동안 제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1962년 그의 둘째 아들인 스티브 앨런 루이스가 수영장에서 익사하고, 70년에 마이라와 이혼했으며, 73년 아들 제리 리 루이스 쥬니어가 열아홉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등 개인적인 비극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1976년 11월 22일에는 만취 상태에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대저택에 찾아가 면회를 요구하다 권총을 휘두른 끝에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되고 81년에는 엄청난 음주벽으로 인한 궤양성 출혈로 중태에 빠져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긴다.

그런 시절 끝에 1986년 1월 록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뉴욕에서 그를 위한 성대한 축하 파티가 열렸다. 같은 해 멤피스의 썬 스튜디오로 돌아가 로이 오비슨, 자니 캐시, 칼 퍼킨스와 같은 동년배 록큰롤 스타들과 라는 앨범을 작업한다. 1989년에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영화 (국내에 ‘열정의 로큰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영화)가 공개된다. (제리는 주연을 맡은 데니스 퀘이드에게 직접 피아노 연주법을 사사했다고 한다.) 90년엔 영화 <딕 트레이시>의 음악 작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렇게 모질게도 그의 뒤를 쫒았던 불행도 음악을 향한 그의 집념만은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의로 활동을 멈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 그였지만 라스베이거스 등지의 무대에서 거의 매일 밤 연주를 하다시피 했다. 2005년에는 그래미 어워드에서 특별 공로상므 수상, 2006년도에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신작 을 발표했는데, 인디 차트 1위에 랭크되고 골든 디스크를 기록하며 지금껏 그가 발표한 풀 렝스full length 앨범 중 가장 많이 팔린 것이 되었다. (믹 재거, 브루스 스프링스틴, 지미 페이지, 닐 영 등 초호화 게스트 뮤지션들로도 화제를 모았다.)


제리 리 루이스는 부기우기 스타일을 확립한 최초의 피아니스트였다. 그는 향후 엘튼 존, 빌리 조엘,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최근의 벤 폴즈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아티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피아노 록의 개척자였으며 블루스, 컨트리, 랙타임 재즈 등 폭넓은 스타일을 아우르는 혁신적인 크로스오버 사운드와 다이내믹한 퍼포먼스로서 록 음악의 기초를 설계한 뮤지션이었다. 일어선 채로 내리찍듯이 피아노를 연주하며 열창하는 모습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그런 모든 업적을 통해 ‘록큰롤의 위대한 난폭자’이자 ‘록큰롤의 위대한 절충주의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누군가 말했다. “록큰롤은 엘비스가 낳고, 제리 리가 키운 것이다.” 그가 등장하기 이전의 록큰롤은 빠른 셔플 비트나 4비트가 대부분이었다. 흥겨움은 있으되 사람을 미치게 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제리 리 루이스는 록큰롤에 ‘박력’을 주입했다. ‘악마의 에잇 비트 록큰롤’의 탄생이었다.
3의 댓글
User Avatar

달의여신

2012.08.25

후와 *_*) 이번 칼럼은 정말 거대한 쿠키를 입에 한번에 넣은 느낌이에요. 발 뒤꿈치로 피아노를 치다니..보면 볼수록 록큰롤에 빠져드는 기분입니다-
답글
0
0
User Avatar

퐁당퐁당

2010.01.10

와- 차승우님 글 잘쓰시네요. 쏙쏙 들어옵니다! 내리 세 편 다 읽었어요. 버디 홀리, 척 베리.. 칼럼을 읽고나니 이름만 들어본 대가들이 가깝게 느껴집니다. 다음 연재도 기대할께요 차차-
답글
0
0
User Avatar

미쏭이

2009.12.29

차작가님의 기다렸던 칼럼 !!~~ 쉽고 재밌고 머리에 쏙쏙 ~~
어쩜 이렇게 방대한 상식을 갖고 계신지 놀라지 않을수가 !!
담 칼럼 또 기다려요~~
답글
0
0
Writer Avatar

차승우

밴드 문샤이너스에서 기타와 보컬을 맡고 있다. 초등학교 때 뱀이 그려진 전자 기타를 외할머니에게 선물로 받아 처음 기타를 잡았고, 고등학교 때 크라이베이비라는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역시 고등학교 때 노브레인을 결성하여 2집까지 활동한 후 일본의 도쿄 스쿨 오브 뮤직으로 기타를 공부하러 갔다. 하이라이츠라는 밴드를 거쳐 문샤이너스를 결성했다. 최근에 문샤이너스 정규 1집인 <모험광백서>를 펴내고 열렬하게 활동 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