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연수의 文音親交 프로젝트
우편환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인 건 아니야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과 베가 4의 「Life Is Beautiful」
누구에게나 생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역으로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게 쓸모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단지 우리뿐이라면, 이건 공간의 대단한 낭비”라고 말한 사람은 과학자 칼 세이건이다. 하지만 가끔은 이 광활한 우주 공간에 생명체라고는 단지 우리뿐이라고 하더라도 낭비라고 부를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예컨대 지구 대기권 바깥에 떠 있는 허블 우주 망원경이 보내온 사진들을 들여다볼 때(//hubblesite.org/gallery/). 그 사진에 등장하는 별들과 은하들과 성운들은, 거기 누군가 살지 않거나 혹은 그것들의 존재가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하더라도 아름답게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한에는 그걸 공간의 대단한 낭비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에밀 아자르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멋진 도입부에서 하밀 할아버지의 말에 모모가 울음을 터뜨리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매일 웃고 있어요?”
“나에게 좋은 기억력을 주신 하느님께 매일 감사하느라고 그러지, 모모야.”
내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사람들은 나를 어린애 취급해서 항상 모모라고 불렀다.
“육십 년 전쯤, 내가 젊었던 시절에 말이야, 한 처녀를 만났단다. 우리는 서로 사랑했지.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이사를 가버리는 바람에 여덟 달 만에 끝장이 났어. 그런데 육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나거든. 그때 나는 그 처녀에게 평생 잊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어.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단다. 사실, 가끔씩 걱정이 됐지. 살아가야 할 날이 너무 많았고, 더구나 기억을 지워버리는 지우개는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니, 보잘 것 없는 인간인 내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었겠니? 그런데 이제 안심이구나. 나는 죽을 때까지 자밀라를 잊지 않을 수 있을 거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나는 로자 아줌마 생각이 나서, 잠시 망설이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그때 모모의 나이, 여섯 살인가 일곱 살. 아직 학교에도 가기 전이어서 자기가 아랍인이라는 사실도 모를 때였다. (그러니까 학교라는 곳은 국어나 수학뿐만 아니라 내가 다른 애들과 어떻게 다른지, 또 왜 그 사실이 놀림거리가 되는지까지도 가르치는 공간이다.) 원래 이름이 모하메드인 모모는 폴란드 태생의 유태인인 로자 아줌마와 벨빌에 살고 있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가 사랑 때문에 자신을 돌보는 줄 알았다가 매월 그 대가로 우편환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하밀 할아버지에게 달려갔던 참이다.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모모의 물음에 하밀 할아버지는 대답한다. 그렇다고. 그건 모모가 겪은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 아마도 캄캄한 우주 공간 속에서도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인 이유가 사실은 우편환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하가 느낄 만한 그런 슬픔이었다.
이렇게 엄청난 슬픔으로 시작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좋다. 이유를 그럴듯하게 말할 자신은 없지만, 처음 읽을 때도 좋았고, 지금도 좋다. 어쨌든 왜 이 소설이 좋은지 최선을 다해 설명해보겠다. 이 소설에는 하밀 할아버지와 로자 아줌마가 나오는데, 그냥 이 사람들이 하밀 할아버지이고 로자 아줌마였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그 사람들을 원서대로 므슈 하밀과 마담 로자로 부르는 게 더 옳다고 본다. 이유는 단 하나, 멋지게 보여서다. 므슈라는 말도, 마담이라는 말도 멋지다. 이 호칭들은 처음에는 그 사람들도 할아버지나 아줌마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니까. 『자기 앞의 생』에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므슈 하밀과 마담 로자였던 두 사람, 그리고 열 살이었다가 하루 사이에 열네 살이 된 모모가 나오기 때문에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한다.
므슈 하밀과 마담 로자와 하루 사이에 열네 살이 된 모모
잔망스럽기 짝이 없는 아랍인 꼬마 모모에 따르면,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누군가 매달 우편환을 보내올 수 있는 아이에게만 생은 주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마담 로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녀는 모모와 같은 부류의, 모모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똥 같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마담 로자에게는 누가 있어 매달 우편환을 보내는 것일까? 계속 질문해보자. 그렇다면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 속의 별들과 은하들과 성운들에게는 누가 있어 매달 우편환을 보내는 것일까?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마담 로자는 그렇게 오랫동안 죽지도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고서야 무슨 수로 별들과 은하들과 성운들은 또 그렇게 아름답게 반짝일 수 있었겠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모모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그와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고, 그것은 프랑스의 것이 아니었다. 하밀 할아버지가 종종 말하기를, 시간은 낙타 대상들과 함께 사막에서부터 느리게 오는 것이며, 영원을 운반하고 있기 때문에 바쁠 일이 없다고 했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이런 이야기 속에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훨씬 아름다웠다.
나는 “훨씬 아름다웠다”라는 부분을 눈여겨본다. 므슈 하밀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통해서 시간에 대해서 말하는 일이 마담 로자의 늙어빠진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는 부분. 그게 훨씬 아름다운 까닭은 모모가 므슈 하밀과 함께 한동안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낙타 대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대처 방식은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각자 혼자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서로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내게 되면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좀더 살 만한 공간으로 바뀐다. 우리뿐이라면 공간의 대단한 낭비라고 말했던 칼 세이건의 말을 조금 흉내내자면, 나 혼자라면 인생의 대단한 낭비다.
누구에게나 생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역으로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게 쓸모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세상 모두에게 버림받는다고 하더라도 단 한 사람, 엄마만은 우리와 함께 시간을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한동안 시간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시간을 훨씬 아름답게 보게 된다. 이런 시선이야말로 매달 누군가 보내오는 우편환과 같은 것이다. 그걸 가리켜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 사랑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갈 수 있다. 한동안 함께 보낸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말이다. 그게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연인들은 여러 번 살고, 영원히 산다
영국 그룹 ‘베가(Vega) 4’의 「인생은 아름다워(Life is beautiful)」는 들을 때마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노래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도둑질당하고 있는 노파의 얼굴에서 시간을 발견하는 한 아랍인 아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건네는 듯한 가사 때문이다.
인생은 아름다워.
죽을 때까지 우리는 사랑해야만 하지.
네가 내 품안으로 달려올 때 우린 완벽한 순간을 훔치는 거야.
순간들. 한 인간이 지구에 태어나 다른 인간과 한동안 함께 보내면서 만나는 그 많은 순간들. 우주 저 멀리에 거대한 망원경이 있어서 지구를 바라보게 된다면 발견하게 될 수많은 기적의 순간들. 시간은 무자비하게 인간을 늙고 병들어 죽게 만들지만, 우리를 그 시간을 길들일 수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내 품안으로 달려올 때’. 그때 무자비한 시간은 사막에서 영원을 싣고 오는 낙타 대상처럼 천천히 흘러간다. 추억이라는 건 그런 순간들을 수없이 반복해서 경험하는 일을 뜻한다. 사랑의 경험은 우리를 여러 번 살게 만든다. 연인들은 영원히 산다. 죽은 자들과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있다. 그러니까 네가 내 품안으로 달려온다면. 그 모든 순간 덕분에 우리는 삶은 아름답다고, 거기에는 기적이 가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마담 로자가 죽어가는 시간 속에서 모모에게 찾아온 기적은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일이다. 이 소설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 길에서 만난 금발 여인 나딘을 따라 그녀가 일하던 녹음실로 찾아간 모모는 누군가가 단추를 누르자, 영화의 장면들이 거꾸로 돌아가는 걸 보게 된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서 살아 있을 때의 제자리로 돌아가고, 자동차들이 거꾸로 달리고 개들도 뒤로 달리고, 무너졌던 집이 눈 깜짝할 사이에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거꾸로 가는 세상, 그건 모모의 빌어먹을 인생 중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이었다. 그런 기적을 보면서 모모는 병들지 않고 튼튼한 다리로 서 있는, 아름다운 처녀 마담 로자를 상상했다. 그러자 눈물이 났다. 하지만 기적은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그때 내게 정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엄마를 보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땅바닥에 앉아 있는 내 모습과 그런 내 앞으로 가죽으로 된 미니스커트를 입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를 신은 다리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다. 나는 얼굴을 보려고 눈을 치켜뜨려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다. 나는 그것이 나의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추억만으로 눈을 치켜뜨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좀더 먼 과거로까지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나를 어르고 재우고 있는 누군가의 따뜻한 두 팔이 느껴졌다. 배가 아팠다.
모모는 과연 엄마를 본 것일까? 아니면 그건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아마도 그건 환상일 것이다. 아랍계 이민자들이 가득한 파리의 벨빌에 사는, 아버지의 정체를 결코 알 수 없는 매춘녀의 아들로 이제는 늙어빠져 죽어가는 전직 매춘녀를 걱정하는 아랍인 소년의 삶이란 고통으로 가득 차야만 할 테니까. 그 소년의 이름이 모모든 모하메드든, 그 소년에게 기다리는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고 잔인하고 끔찍할 테니까. 한동안 함께 지냈던 할머니와의 추억을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시간을 되돌리고, 마침내 자신의 인생에도 아름다운 순간들은 존재한다는 인식은 잘사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다들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가 사는 세계가 그런 곳이었다면, 잘사는 집의 아이들만이 꿈을 가지고 살 수 있고 불쌍한 아이들에게는 잔인한 현실밖에 줄 수 없는 곳이었다면, 허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별들도 그 빛을 꺼버려야만 할 것이다. 므슈 하밀이 늘 들고 다니는 빅토르 위고의 책은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레미제라블』)이고 모모가 커서 쓰고 싶은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불쌍한 사람들의 꿈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이야기란 누가 매일 우편환을 보내준다고 하더라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으므로.
기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누구에게나 생은 주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또한 역으로 그 누구의 인생에 대해서도 그게 쓸모없는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그 사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답게 회상되니까. 이런 인생 그냥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시간에도 그런 순간들은 멀리 있는 별들처럼 반짝이니까. 그런 순간들이야말로 매달 누군가 보내오는 우편환과 같은 것, 그러니까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존재이유다. 그게 사랑의 순간이든 아니든 그렇게 아름답게 회상되는 순간들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여기까지 썼으니 왜 ‘로자 아줌마’가 아니라 ‘마담 로자’라고 부르는 게 더 옳다고 강변하는지 이해할 수 있겠지. 모모가 죽은 할머니 로자를 생각하면서 그녀를 마담 로자라고 부를 때, 거기에는 한국식으로 ‘로자 아줌마’라고 말할 때의 어감보다 더 화려하고 젊고 예쁜 로자의 모습이 담겨 있는 것이니까. 그 호칭 자체에 마담 로자의 삶이 그렇게 비참한 게 아니라면, 모모의 삶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 이렇게 모모의 추억 속에서 마담 로자의 삶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면, 통례에 따라 그녀는 죽지 않는다. 여러 번 살고, 영원히 산다.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한다면 나는 기적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다.
<에밀 아자르> 저/<용경식> 역14,4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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