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연수의 文音親交 프로젝트
아우슈비츠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첫 얼굴을 알아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와 더 큐어의 「The Kiss」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금방 이해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란 주위에 아름답다고 말할 만한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내 말을 금방 이해할지도 모른다. 외로움이란 주위에 아름답다고 말할 만한 대상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아름답다고 말하니, 결국 그 무엇도 사랑하지 못할 때 우리는 외로움을 느끼리라. 하지만 이런 일은 종종 일어난다. 길든 짧든 인생의 어떤 시기에 우리는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간다. 뜻밖에도 목숨은 질기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건 전적인 외로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인 외로움은 그 반대 경우다. 누구도 내게 아름답다고 말해주지 않는 순간, 다시 말해서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의 그 혼자라는 감정. 그 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버리고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성자가 아니라면 지독한 근시일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얼굴은 젖빛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다. 근시안은 원래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한데 자기 눈에만 그렇게 희미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고 생각할 테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젖빛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본다. 원칙적으로 아름다운 얼굴은 하나도 없다. 나는 그다지 인간성을 신뢰하지 않는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세상이란 진즉에 포기하는 게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그래서 말이 안 되지만, 우리는 갑자기 그 흐릿한 젖빛 영상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본다. 우리는 그 얼굴을 사랑한다. 그러니까 처음 본 얼굴, 그런데도 아름다운 얼굴.
그 첫 얼굴을 우린 알아본다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쓴 『더 리더』는 내게 얼굴에 대한 소설로 기억된다. 이 소설에는 시각에 비해 다른 감각의 우위를 나타내는 구절이 많다. 먼저 책을 읽어준다는 의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 목소리. 나중에 종신형을 받은 한나에게 미하엘이 『오디세이』를 녹음해서 감옥으로 보냈을 때, 그는 어떤 사적인 내용도 담지 않았다. 그저 제목과 작가의 이름과 내용만을 읽어서 녹음했다. 그 테이프를 들은 한나는 “꼬마야, 지난번 이야기는 정말 멋졌어. 고마워. 한나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온다. 책에서는 이 과정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말이 많으면서도 말이 없는 접촉이 시작된 지 4년째 되던 해에”라는 한 줄의 문장으로 처리하고 간단히 넘어가지만, 감옥에서 미하엘의 목소리를 알아차린 한나가 어떤 심정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으리라.(스티븐 달드리가 감독한 영화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감동적으로 그려진다.) 한나에게 목소리가 있다면, 미하엘에게는 냄새다.
나는 예전에 그녀의 냄새를 특히 좋아했었다. 그녀는 늘 신선한 냄새를 풍겼다. 몸을 갓 씻고 났을 때의 냄새 또는 갓 세탁한 빨래 냄새 또는 신선한 땀 냄새 또는 막 사랑 행위를 하고 난 냄새 등등. 그녀는 가끔 향수를 사용했다. 나는 그 향수가 어떤 것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향수 냄새 역시 다른 어떤 향수보다 신선한 냄새를 풍겼다. 이러한 냄새들 사이에 무겁고, 어둡고, 떫은 또 다른 냄새가 끼어 있었다. 나는 종종 호기심에 찬 짐승처럼 킁킁대며 그녀의 냄새를 맡곤 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우리가 갑자기 누군가의 첫 얼굴을 알아보는 것처럼, 누군가의 첫 목소리를 알아듣거나 첫 냄새를 알아맡는 일. 그러기에는 목소리와 냄새의 세계는 너무나 명징하다. 명징한 세계에서 우리는 아무런 혼란을 느끼지 않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게 들리고, 향기로운 냄새는 언제 맡더라도 향기롭다. 하지만 우리가 첫 눈에 알아본 얼굴은 그렇지 않다. 우린 모두 우리가 알아본 그 첫 얼굴과 사랑한다. 그 첫 얼굴과 만나는 일은 단 한 번뿐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구절은 우리가 사랑한 그녀의 얼굴의 생김새를 정말 잘 설명한다.
내 기억 속에는 그녀의 당시 얼굴에 나중 얼굴들이 겹쳐져 있다. 그녀를 당시의 모습대로 눈앞에 불러내면 그녀는 얼굴이 없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나는 그녀의 모습을 재구성해야 한다. 훤한 이마, 튀어나온 광대뼈, 연푸른 눈동자,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고 통통한 입술, 각진 턱. 넓적하고 매몰찬 인상이면서도 여성스런 얼굴 모양새. 나는 당시 내가 그 얼굴을 아름답게 생각했음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얼굴의 아름다움을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본 첫 얼굴의 그 아름다움은, 이제는 더 이상 떠올릴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다.
사랑이 없는 법은 진부하다
서로 첫 얼굴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모두 복되도다. 사랑에 빠지면,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은 더없이 또렷하게 보인다. 세상의 끝까지 가봤기 때문에 이제 이해하지 못할 바가 하나도 없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런 게 바로 사랑이다. 젖빛 유리로 바라보는 것처럼 흐릿하던 세계 속에서 아름다운 얼굴 하나가 툭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 그리고 그 아름다운 얼굴을 통해 이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경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을 생각하면 늘 영국 밴드 더 큐어(The Cure)의 노래 「Just Like Heaven」의 도입부가 생각난다. 드럼 소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다. 들리는가? 그 다음은 그녀의 말.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어김없이 듣게 되는 그런 말.
어떻게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꺄악, 비명이 절로 나잖아.
왜 이렇게 웃음이 터지는 거지?
날 어떻게 한 거야?
말해줘. 그럼 약속할게.
널 따라갈게. 널 따라갈 거야.
아인슈타인이 가르쳐준 물리학의 법칙.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른다. 결과는 원인에 선행할 수 없다. 이 사실 때문에 시간여행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래의 자손이 선조가 되는 어떤 여자를 찾아가 지금 사랑하는 그 남자는 평생 그녀를 괴롭힐 것이니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하면서 결혼 자체를 무산시키는 일은, 그러니까 일어날 수 없다. 그건 원인이니까. 마찬가지로 그 첫 얼굴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지지만, 사랑에 빠진 뒤에는 그 첫 얼굴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목소리와 냄새와 달리 얼굴은 처음과 달라진다. 반드시. 그렇기 때문에 연인의 얼굴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모든 속삭임에는 슬픔이 배어있다.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든 그 얼굴은 곧 달라질 테니까.
그러므로 사랑은 지금 이 자리에서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뒤에는 감춰진 게 없다. 사랑은 둘 중 하나를 강요한다. 지금 사랑하든가, 사랑하지 않든가. 놔뒀다가 1년 뒤에 사랑할 수는 없다. 과거로 돌아가서 사랑할 수도 없다. 바로 지금 사랑할 수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사랑하는 모든 연인들은 슬프다. 그들은 늘 지금을 갈구하지만, 지금을 잡으려고 하면 그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사진을 찍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과거라는 사실이 저절로 밝혀지는 것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은 지속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의 일일 뿐이다. 순간순간,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고양된 감정, 혹은 또렷해진 이미지일 뿐이다.
어떤 점에서 이 소설의 주제는 무자비하다. 우리는 대부분의 인생을 반쯤 멍청하고 게으른 자로 살아간다. 우리가 예수나 부처 같은 사람이라면 매순간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으리라.(“어떻게 하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다. 매순간 놀라서 비명을 지르고 좋아서 웃음을 터뜨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랑은 지속되지도 않는다. 사랑은 끝나는 순간 잊힌다. 우리가 무기력해지는 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법이라는 게 존재한다. 법은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부정한다. 법은 형이상학적이다. 법은 이데아다. 법은 모든 얼굴이 똑같다고 말한다. 그게 첫 얼굴이든 마지막 얼굴이든. 법은 대부분의 경우 사랑을 모른다. 그래서 법은 진부해진다. 한나의 재판 과정에서 미하엘은 법의 진부함을 이렇게 말한다.
그 당시에는 상상력이 거의 작동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수용소 세계의 충격적인 사실은 상상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기 때문에 연합군이 찍은 사진들과 수감자들의 증언에서 취해 온 몇 가지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우리 마음속에 찍히고 또 찍히다가 마침내는 진부한 표현으로 굳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법의 관점에서, 한나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한나는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법이 규정하는 대로 일했다. 잠시 그녀는 열다섯 살의 소년과 사랑했다.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며, 보여주지 않을 맨 얼굴로. 다시 한나는 사랑이 없는 세?에서 법이 규정하는 대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법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일처럼 진부한 일은 없다. 규정한 대로 행하는 것.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는 것. 개별적인 행위를 하지 않는 것. 선량한 시민들이 할 만한 이런 행위의 귀결점은? 아시다시피 아우슈비츠다. 지금도 법정에서는 법리공방이 계속되는, 성실한 개인들이 저지르는 진부하기 짝이 없는, 하지만 분명한 악. 사랑 없이 법을 곧이곧대로 따르는 자들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악. 그러므로 이런 비약도 가능하리라. 지금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유죄라는. 그래서 한나는 유죄다. 물론 비약이다.
키스해 줘, 키스해 줘, 키스해 줘
아우슈비츠,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을 둘러싼 논쟁은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개별적인 존재가 되자. 연인에게만 키스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걸 상상하자. 진부해지지 말자. 비록 슬퍼질 게 분명하다고 하더라도 그 얼굴이 아름답다고 말하자. 외로워지지 말자. 세상을 또렷하게 바라보자. 그게 두 번째 아우슈비츠를 막는 일이며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을 저지르지 않는 방법이다. 안다. 이것도 물론 비약이다. 하지만 가끔은 비약하자. 그냥 과정을 생략하고 결론을 내리자. 어차피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까. 사랑이라는 게, 그런 것인 줄은.
그리하여 다음은 비약의 세 단계.
우선 『더 리더』에 나오는, 사랑의 마지막 순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자니 죽은 얼굴에서 살아 있는 얼굴이 떠올랐다. 늙은 얼굴에서 젊은 얼굴이 말이다. 늙은 부부들에게도 이와 같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에게는 늙은 남자의 모습 속에 젊은 남자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을 것이고, 남자에게는 늙은 여자의 모습 속에 젊은 여자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신선하게 보존되어 있을 것이다. 왜 나는 일주일 전에 이러한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인가?
다음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더 리더』에 나오는, 사랑의 첫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다고 할 수도,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몸을 돌렸다. 나는 그녀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우리는 너무 가까이 서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벌거벗은 몸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아니, 꼬마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그녀는 웃으면서 양팔로 나의 목을 끌어안았다. 나도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순간에 이를 때까지는 더 큐어의 가장 아름다운 음반 <Kiss Me Kiss Me Kiss Me>의 첫 곡 「The Kiss」로. 이 곡의 전주는 숨이 차오를 만큼 기나긴, 그리하여 입을 떼는 순간 의학용어로 호흡항진을 일으키는 키스의 순간을 묘사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키스해 줘, 키스해 줘, 키스해 줘
당신의 혀는 독약 같아
내 입안을 가득 메워
사랑해 줘, 사랑해 줘, 사랑해 줘
당신은 바닥에 내 몸을 밀어붙여
내 온몸이 다 뒤집어질 것 같아
꺼내 줘, 꺼내 줘, 꺼내 줘
내 머리 속에서 니 목소리를
제발 꺼내 줘
이런 것인 줄 정말 몰랐어
정말 이런 것일 줄이야
너를 죽이고 싶어
너를 죽이고 싶어
정말 이런 것일 줄이야.
<베른하르트 슐링크> 저/<김재혁> 역9,720원(10% + 5%)
출간 이후 32주 연속 ‘부흐레포트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등 독일 내에서도 큰 호응을 얻은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어권 소설로는 최초로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했으며 1999년 2월 의 ‘북클럽’ 코너에 소개되면서 미국 내에서만 1백만 부가 넘게 판매된 책이다. 당시 뉴욕타임스에서는 “감동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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