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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맛]봄의 길목에서 맛보는 프랑스의 맛

발사자르Balthaz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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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곰이 뒹구는 클로버 언덕을 기다리며, 아직은 쌀쌀한 끝 자락의 겨울 공기를 따끈한 프렌치 어니언 수프로 녹여보는 거다. 어쩌면, 봄날의 곰은 따끈한 어니언 수프를 좋아하고 프랑스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봄을 기다리는 길목에서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꽃샘추위는 겨울 한가운데 찬 바람보다 더욱 몸속으로 파고든다. 그런 꽃샘추위는 비단 한국뿐 아니라 뉴욕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맘때면 완연한 봄인 것처럼 반팔이 어울리는 따스한 날씨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음날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어야 할 정도로 춥기도 한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뜨끈한 뚝배기에 든 된장찌개라도 먹으며 몸을 녹이고 싶지만, 뉴욕이니, 여기서 맛볼 수 있는 것으로 따스함을 느끼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항상 찾는 것은 다름 아닌 프렌치 어니언 수프다.

La bonne soupe의 프렌치 어니언 수프
치즈가 그릇에 흘러 내릴 정도로 듬뿍 얹어져 있다.

제대로 된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맛본 사람이라면, 아마 금방 맞장구를 쳤을 것이다. 따끈한 라메킨ramekins(도자기와 같은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그릇)에 담겨 수프 위에 얇고 잘 구워진 빵 슬라이스와, 그뤼에르 치즈를 얹어 오븐에서 구워진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접시를 만질 수도 없이 뜨겁다. 치즈를 가르고 한 스푼 뜬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무척 뜨거워서, 마치 뚝배기 국물을 떠먹는 것만 같다. 진한 치즈의 향과, 고소한 빵 그리고 진득한 양파가 녹아 내려 있는 국물을 한 모금 먹을 때면 온몸이 녹아내려 꽃샘추위 따위는 다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이런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사실 뉴욕이 아닌 프랑스에서 날아온 것으로 18세기 사순절 부활제에 가톨릭의 교리에 따라 40일간 고기를 먹는 것을 금지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미식가인 규시후작은, 고기를 못 먹는 괴로움에 주방장에게 고기보다 맛있는 것을 만들라고 명령하였다. 주방장은 고심 끝에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완성하였는데, 오래도록 양파가 타지 않고 갈색이 나도록 볶아 감칠맛을 낸 것에서 주방장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양파를 오랫동안 볶게 되면 양파의 성분이 농축되어 감칠맛 - 제5의 맛이라는 우마미가 극대화되는데 즉, 양파에 함유되어 있는 우마미 물질인 아미노산의 일종인 글루타민산이 수분이 증발함에 따라 맛이 농축되는 것이다. 또한, 우마미는 우마미를 가지고 있는 음식끼리 섞이면 그 맛이 더해지는데, 볶은 양파의 맛이 육수와 어우러져 고기를 먹는 것만큼의 진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양파를 되도록 일정한 굵기로 얇게 썰어 갈색이 되도록 약한 불에서 볶는다.
갈색이 되되 태우면 쓴맛이 나므로 조심해야 한다.

또한, 프렌치 어니언 수프 위에 바늘과 실처럼 띄워지는 토스트 된 바게트와 그뤼에르 치즈는 우마미뿐 아니라 씹는 맛에도 일조를 한다. 빵을 토스트하면 마이야르 반응으로 감칠맛을 가지게 되며, 그뤼에르 치즈는 양파의 풍미를 가리지 않으면서도 치즈의 진한 맛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것이 뜨거운 양파 수프 위에 띄워져 고온의 오븐에서 녹진하게 녹아들며 고기처럼 쫀득하게 씹는 맛을 주는 것이다.

다행히도 프렌치 어니언 수프는 18세기 이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아서 프랑스뿐 아니라 뉴욕 등 세계 각지에서 맛볼 수 있는 메뉴로 자리 잡았다. 우리나라에서도 간혹 프랑스 레스토랑의 메뉴에서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볼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안타깝게도 제대로 된 맛을 내는 곳은 드물다. 가장 명확한 맛의 차이는 재료에서 오는 것으로, 단가가 비싼 그뤼에르 치즈를 사용하는 곳은 거의 없고 대부분 모짜렐라 치즈로 대신하기 때문에 그 맛이 맹맹하고 향이 덜하다. 게다가 어떤 곳은 그냥 어니언 수프를 넓적한 그릇에 떠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레시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양식조리사자격증에 나오는 프렌치 어니언 수프의 레시피에는 빵에 파마산 치즈가루를 약간 뿌릴 뿐, 오븐에 굽지도, 따로 치즈를 얹지도 않으며, 양파 양도 턱없이 적어 국물이 무척 묽다. 아마도 서양 재료가 적었던 옛날에 만들어진 레시피인 듯한데 저 맛을 진짜 어니언 수프로 알까 봐 안타깝다.

토스트한 바게트와 치즈를 얹어 고온의 오븐에서 구워주기 바로 전이다.
치즈는 갈거나 위의 사진처럼 오븐에서 잘 녹을 정도로
아주 얇게 썰어 얹어도 된다.

뉴욕에서는 다행히 그뤼에르 치즈를 사용하고 진득하게 양파를 듬뿍 우려낸 프랑스 맛을 낸다. 까칠한 뉴요커의 입맛도 입맛이지만, 세계의 여러 사람이 모인 하나의 큰 문화의 도가니melting pot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덕에 기원은 프랑스이지만, 뉴욕에서 프랑스의 맛과 문화를 맛볼 수 있었다.

프랑스 뒷골목인 듯한 레스토랑에서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맛보며 따끈하게 몸을 녹여보자.

소호의 뒷골목에 자리 잡은 빨간색 차양의 Balthazar. 언제나 사람들로 붐빈다

빨간 차양에 짙은 고동색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프랑스 뒷골목으로 순간 이동한 것처럼 프랑스 분위기에 취할 수 있는 발사자르Balthazar는 프랑스어로 12리터가 들어가는 단위를 가리키는 말로 즉, 우리가 보통 마시는 와인 병은 750ml이므로, 16병이 들어간다. 보통 우리가 크게 생각하는 단위인 매그넘magnum은 750ml의 두 배인 크기고, 발사자르Balthazar는 그것의 8배인 셈이다.

내부는 허름한 듯한 유리창과 거울, 벽면 가득히 메운 와인,
그리고 옆자리 대화가 다 들릴 정도로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로 차있다.

프랑스 와인 병 단위에서 이름을 따왔을 정도로 프랑스적인 발사자르는 옆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불어를 할 것만 같이 프랑스적인 분위기를 띄고 있는데 다니엘Daniel(미슐랭 3스타의 고급 프렌치 레스토랑)처럼 고상하게 어려운 분위기가 아닌, 누구나 들릴 수 있는 비스트로 개념인 곳이다. 음식도 전통적인 음식과 함께 푸짐하고 따끈하게 나오는데 그 빵도 무척 맛있어서 가게 옆에는 빵을 따로 판매하는 곳이 있을 정도이다. 빵은 전통 프랑스식으로, 크루아상이나 브리오쉬, 그리고 키쉬가 무척 맛있으니 레스토랑에 들릴 여유가 없을 때면 빵만 사 와서 가게 앞 벤치에 앉아 요기를 하기에도 좋다.

수프 그릇보다 큰 카푸치노 사발
나오자마자 커피 향기에 취해 사진도 찍기 전에 마셔버렸다.

언제나 자리를 잡으면 제일 먼저 주문하는 것이 카푸치노 라지 사이즈인데, 프랑스에서 마시는 것처럼 큰 사발에 나온다. 요리학교의 선배인 로베르 아르보의 책, 『오늘의 행복 레시피』에서도 사발 커피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양손으로 감싸고 마시는 사발의 매력은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스함이라고 할 수 있다.

르 가맹Le Gamin의 사발 커피

사발 커피는 저자가 운영하는 까페인 ‘Le Gamin’에서도 맛볼 수 있는데, 역시 그 크기는 무척이나 컸다. 이곳도 프랑스식 사발 커피나, 타르틴(바게트를 길게 잘라 버터와 잼을 발라 먹는 것)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프랑스를 느끼고 싶다면 들러볼 만한 곳이다.

발사자르의 유명한 빵 바스켓
둘이서는 다 못 먹는 푸짐한 양이라 남으면 포장해달라고 부탁해도 괜찮다.

다시 발사자르로 돌아와서, 이곳의 재미있는 점은 빵이 워낙 유명해서 메뉴에 빵 바스켓을 따로 판매하는데 16불이라는 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따로 주문해서 빵을 먹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생각하면, 흰밥을 기본으로 주는데 잡곡밥이 유명하다고 따로 사먹는다는 개념일까? 그렇다고 해도 16불은 좀 비싸지만 빵을 좋아한다면 먹어볼 만하다.) 기본으로 주는 빵 바스켓에는 시큼하고 담백한 사워 도우와 빵 드 깜빠냐pain de campagne(시골빵)를 주는데, 빵 바스켓에는 과일을 절여 넣은 빵, 호밀빵부터 브리오쉬 떼테brioche tete(뒤쪽에 보이는 모자 모양의 빵), 뺑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초콜릿이 들어간 크루아상) 등 이 바스켓이 넘치도록 들어 있다.

발사자르의 프렌치 어니언 수프
부글부글 끓는 수프가 나오면 사진기보다 스푼에 먼저 손이 간다.

프랑스에서는 애피타이저를 오르되브르Hors D'œuvres라고 하는데 발사자르에서는 프랑스 느낌을 살려 메뉴도 프랑스어로 써놓았기 때문에 생소할 수 있다. 먼저 오르되브르에 있는 어니언 수프 그라티네Onion Soup Gratinee를 주문하면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뜨거운 그릇에 담겨 나온다. 쭉 늘어나는 치즈 때문에 깨끗이 먹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호호 불어가며 먹다 보면 꽃샘추위에 얼었던 입맛은 다시 깨어나 메인 요리를 기다리게 된다. 참고로, 미국에서 메인요리를 지칭할 때 앙트레Entree라고 하는데 사실 프랑스에서는 이 말을 ‘두 번째 에피타이저’를 지칭하는데 쓰고, 메인요리는 쁠라Plat이라고 쓴다. 워낙 Entree라는 표현을 많이 써서 간혹 프렌치 레스토랑에서도 메인요리를 Entree로 써놓기도 한다.

에그 베네딕트Eggs Benedict
햄과 잉글리쉬 머핀, 홀랜다이즈 소스에 볶은 양파와 감자가 어우러져 있다.

발사자르의 인기 메뉴는 너무 많지만, 특히 점심때 포치드 에그(수란)를 이용한 메뉴가 다양하다. 먼저 기본인 에그 베네딕트는 딱 기본인 포치드 에그와 햄, 그리고 토스트한 잉글리쉬 머핀이 홀랜다이즈 소스를 듬뿍 끼얹고 나온다. 바닥에는 볶은 양파와 감자가 곁들여지는데, 사진으로만 봐도 푸짐하게 막 담은 모습에 도도한 프렌치는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따끈함과 넉넉함을 느낄 수 있다.

에그 노르위지안Eggs Norwegian
Poached eggs with smoked salmon and hollandaise

에그 노르위지안Eggs Norwegian은 에그 베네틱트와 같은데 햄 대신 훈제 연어를 곁들여서 나오는 걸 말한다. 이처럼 에그 베네딕트는 포치드 에그를 제외하고는 곁들여지는 음식에 따라 여러 가지 조합이 가능하다. 에그 노르위지안처럼 에그 플로란틴Eggs Florentine은 햄 대신 익힌 시금치를 곁들이고, 에그 베네딕트 아놀드Eggs Benedict Arnold는 잉글리쉬 머핀 대신 비스켓(보통 생각하는 과자가 아닌 빵에 가까운 것으로 KFC 비스켓과 비슷하다.)을 깔고, 홀랜다이즈 소스대신 그레이비Gravy 소스를 얹는다.

에그 뮈레트Eggs Meurette
Poached eggs in a red wine sauce with mushrooms and bacon lardons

에그 베네딕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의견이 있지만 Elizabeth David가 쓴 『French Provincial Cooking』에서 전통적인 프랑스 음식으로 오프 베네딕틴œufs benedictine을 언급한 것을 가장 유력하게 본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에그 베네딕트와 함께 에그 뮈레트Eggs Meurette를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 이는 포치드 에그를 물이 아닌 와인에 익히는 것으로 계란에 와인의 풍미가 자줏빛으로 물들어 있다.

적당히 잘 익은 포치드 에그의 녹진한 노른자
와인색에 물들은 흰자를 가르면 하얀 흰자와 함께 녹아내린다.

새싹 야채를 들추어 계란을 가르고 밑에 깔린 가니쉬인 에샬로트와 라르동(베이컨을 두께 있게 채 썬 것으로 프랑스 요리에 많이 쓰인다), 버섯의 조합인 프랑스의 전통적인 가정식 가니쉬와 함께 맛보면 독특한 풍미를 느낄 수 있다. 대표적인 프랑스 요리학교인 르 코르동 블루Le Cordon Bleu에서도 기초요리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배우는 가니쉬와 같은 맛이라 예전 수업을 들으며 에샬로트를 힘들게 깠던 추억을 되새기며 맛있게 접시를 비웠다.

Grilled Brook Trout
over a warm spinach, walnut and lentil salad

또한 발사자르는 해산물 요리로 유명한데 저녁 때 여러 명이 방문할 수 있다면 굴oysters이나 클램clam, 랍스터lobster 같은 전체요리를 맛보는 것도 좋다. 가볍게 먹고 싶거나 점심 때라면 Grilled Brook Trout도 아주 괜찮은데, 주위 테이블에서 하도 맛있게 먹기에 따라 시켜 보았던 게 이제는 가장 좋아하는 메뉴 중 하나가 되었다. Brook Trout은 민물송어로 그릴에 구운 후 따뜻한 시금치와 호두 그리고 렌틸lentil(렌즈콩)과 함께 나온다. 민물송어는 살이 부드럽고 껍질도 연해 껍질째 먹을 수 있으며 곁들여진 야채와 담백한 맛이 잘 어우러진다.

뉴욕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의 세컨드 브랜드
Marc by Marc Jacobs매장의 디스플레이.


봄을 기다리면서 추위를 프렌치 어니언 수프로 녹이고 배불리 먹은 배를 두드리며 웨스트 빌리지West Village를 산책하다 가게 쇼윈도에서 봄날의 언덕을 발견했다. 문득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나’가 미도리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날의 곰만큼.”

“봄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게 참 멋지지?”

-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봄날의 곰이 뒹구는 클로버 언덕을 기다리며, 아직은 쌀쌀한 끝 자락의 겨울 공기를 따끈한 프렌치 어니언 수프로 녹여보는 거다. 그렇게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뒹굴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차가운 바람을 가르고 하루를 지내다 보면 언젠가는 따스한 봄날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 봄날을, 뉴욕에서 프랑스에 있는 듯, 봄날의 곰과 언덕 위에 앉아 프렌치 어니언 수프를 맛보고 싶다. 어쩌면, 봄날의 곰은 따끈한 어니언 수프를 좋아하고 프랑스에서 왔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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