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일곱 번째 맛]뉴욕에서의 구정, 떡국 대신 소바

소바야Sobaya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매일을 새해에 마음 먹는 것처럼 마음을 다지며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새해가 지난 오늘, 첫날의 결심이 흐려졌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새해의 정의는 누가 내린 것일까? 1년을 365일로 나누어서 언젠가가 일 년의 시작이, 또한 끝이 되는 것은 명백한 일이지만, 왜 1월 1일이 1월 1일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백한 답이 없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따르는 보통의 신정도, 달의 주기에 따르는 구정도 어느 것도 새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8월의 영어 이름인 august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던 것처럼, 새해 첫날도 그 당시 처음 달력을 만들었던 사람 마음일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처음 달력을 만들었던 사람이 그러했듯이, 본인이 스스로 원하는 날을 새해로 여길 수도 있지 않을까?

구정은 음력 설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만 쇠는 명절로 물론 뉴욕에서도 구정은 아예 달력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뉴욕의 구정에도 어김없이 수업으로 가득했다. 뉴욕에서 따지는 휴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괜히 쉬지 못하는 것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한국에서는 휴일이 아닌 미국 국경일에는 신이 나서 놀아놓고서도 말이다.

New Year’s Eve Ball
뉴욕은 음력이 아닌 양력으로 설을 지내고, 설 당일 보다 새해 전날에 더 큰 의미를 두어 new year's eve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날 파티를 하거나 축하를 한다. 한국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듯이 Times Square에 모여 “Ball Dropping”을 하는데 2007년에 100주년이 되었을 정도로 역사를 자랑하는 행사이다. Ball dropping이라는 말 그대로 5,386kg에 3.7m크기가 되는 크리스탈공이 낙하하면서 카운트다운을 하는 것을 일컫는데, 이때 사방으로 꽃종이가 날리고 사람들은 “happy New Year”를 외치며 축제 분위기로 접어 든다.


한국에서는 설날, 즉 새해에는 떡국을 만들어 먹고, 종교 문제나 가족 문제가 아니라면, 친지들이 모여 차례를 지낸다. 구정이라는 휴일에 다시 한번 새해의 시작을, 빛나는 새벽 공기와 함께 다짐할 수 있으니, 구정과 새해를 모두 지내는 것도 좋은 관습이라고 생각한다.

맨 위부터 중국의 쟈오즈, 일본의 떡국 조니, 오세치 요리, 자루소바
설날이면 떡국이지만, 한국을 벗어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한 해에 새로운 설날 음식을 맛보고 싶었다. 그러나 설날에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문화는 서양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동양 문화에서는 더 많은 설 음식 문화를 만날 수 있다. 중국에서는 만두를 만들어 먹고, 일본에서는 새해 전날에 소바를, 그리고 설날에 조니(일본식 떡국)나 오세치 요리(5색, 5미, 5가지 방법의 요리로 만든 도시락요리)를 만들어 새해를 기념한다.

중국의 만두도 친숙하지만 한국과도 비슷한 기분이 들었고, 일본의 ‘조니’나 ‘오세치’요리도 궁금했지만 실제로 레스토랑에서 만날 수 있는 메뉴는 아니었다. 결국에 소바를 택한 건 실은 소바를 좋아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도 있지만 일본식의 소바로, 새해를 맞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다.

소바는 우리나라에서는 메밀국수 또는 모밀국수라고 불리는 면 요리의 한 종류이다. 처음 어디서 만들어졌는지는 불확실하지만, 일본과 우리나라의 메밀국수에는 차이가 있다. 먼저 면을 낼 때 우리나라에서는 면을 가지런히 모아 둥글게 말아서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에서는 면이 한 올 한 올 떨어져서 퍼져 있어야 맛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면 자체도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메밀국수는 부드럽고 혹은 쫄깃하기까지 한데에 비해 일본은 정통으로 만드는 곳의 소바는 평양냉면처럼 뚝뚝 끊어진다. 면을 찍어 먹는 국물도 한국이 훨씬 달달하고 묽다. 일본 음식이 더 달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일본 음식은 생각보다 간이 센 경우가 많다. 한국식 메밀국수를 생각하면 너무 짜고 퍽퍽하게 느낄 수도 있지만, 일본식 소바를 좋아한다면 한국식 메밀국수는 맹맹하고 너무 부드럽다. 뭐 모두 개인 취향이고 같은 음식도 간과 익힘 정도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소바야. 이름에서도 바로 알 수 있는 이 식당은 East village에 자리 잡고 있는 자그마한 소바 전문점이다. 입구에서부터 일본을 느끼는 독특한 분위기를 띠지만 왠지 모르게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쉬이 지나칠 수도 있는 곳이다. 길에 튀어 있는 기분이 아니라 잘 묻혀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처음 이곳을 만난 것은 뉴욕에 살기 전, 요리학교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들렸을 때였다. 여름이었지만 싸늘한 공기에 하루 종일 학교와 집을 알아보느라 지칠 대로 지친 하루, 집 밥이 너무나 그리운 저녁이었다. 무척이나 피곤해서인지 무얼 먹을지도 생각이 나지 않던, 무작정 East Village로 향해 거리를 걸어가 보랏빛과 붉은 노을이 어우러져 어디든 쉬고 싶었던 저녁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만난 소바야는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따뜻한 불빛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북적이는 사람들과 함께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역시 주요 메뉴는 소바로 직접 소바를 만들어 파는, 작지만 그 열정이 돋보이는 가게였다. 마치 집에서 만들어 주는 듯한 그런 맛으로 그날의 피로를 씻은 듯이 가셔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뉴욕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집 같은 편안한 따스함을 주었던 가게였다.

새해에는 하루 쉬는 날이라 떡국을 해 먹었지만, 구정은 뉴욕에서는 쉬지 않기에 떡국이나 새해를 챙기기에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그냥 보내기에는 서운한 게 한국 사람인지라, 꿩 대신 닭으로 떡국 대신 소바를 맛보러 East village로 총총걸음을 옮겼다.

바쪽 자리에는 어머니가 만드신 듯한 반찬이 놓여져 있다

언제나 흔쾌히 외치는 ‘이랏샤이마세’는 한국어로 ‘어서 오세요’이다. 일본 가게는 종종 손님이 오면 이랏샤이마세를 크게 외치는 곳이 많은데 괜히 반겨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른 저녁 시간에 가지 않는다면 언제나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은데 그건 주메뉴인 소바뿐 아니라 반찬이나 간단한 요리도 모두 맛있기 때문일 것이다.

소바 맥주와 기린 맥주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대로 먼저 음료를 주문하고 천천히 메뉴를 구경했다. 소바 종류는 친절하게 사진으로도 보고 고를 수 있는데, 차가운 소바와 뜨거운 소바가 각각 20가지에 가까운 종류가 있어 고르는 데도 큰 즐거움이 있다. 음료메뉴를 구경하다 문득 소바맥주라는 신기한 음료를 발견해 하나 주문해보았다. 소바로 만들었다는 맥주 아니 소바주는 보통의 맥주보다 조금 다른 향이 진하게 퍼진다. 그 맛이 독특해 이날 이후로 맛보지는 않았지만 한 번쯤 맛보기에는 아깝지 않은 맥주였다.

일본식 오징어 순대 조림

음식은 소바 이외에도 요리나 반찬이 많이 있는데 만약 맥주를 좋아한다면 이 오징어조림을 꼭 맛보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 오징어순대처럼 ?징어 몸통 안에 밥을 꽉 채워 달콤 짭짜름한 간장에 절인 요리인데 반짝 반짝거리는 모습이 오징어순대와는 또 다르다.

연근 매실 무침과 우엉 풋콩 조림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반찬류인데 일본 가정에서 반찬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장조림이나 감자볶음 같이 집에서는 먹지만 따로 사먹기는 힘든 그런 것이었다. 소바야에서는 그날그날 바 자리에 한 그릇 가득히 만들어 놓고 올려져 있어 자꾸만 생각이 나는 메뉴이다. 뭔가 나라는 다르지만 집에서 만들어주는 소박한 반찬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력이 있다.

김 대신 유자가 올라가 있는 유자 소바

소바는 차가운 소바나 따뜻한 소바 모두 좋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바는 가끔 특별메뉴로 맛볼 수 있던 유자소바였다. 직접 면을 반죽하여 뽑기 때문에 가끔 반죽에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면 안에 유자 제스트(껍질의 노란 부분만 아주 고운 강판에 갈은 것으로 요리에 향을 더하고 싶을 때 사용한다)를 넣고 반죽해 씹을 때마다 유자향이 번지는 소바였다. 먹는 방법은 보통의 자루소바와 마찬가지로 국물에 넣었다가 건져서 맛본다.

연어알과 성게알, 참마가 얹어진 소바

또한 연어알과 성게알, 그리고 참마 갈은 것을 더한 소바로 이건 소바 위에 재료가 얹어져 있기에 면을 국물에 따로 담갔다 먹지 않고 국물을 면에 부어서 먹는다. 그래서 그릇은 우동그릇처럼 사발에 담아져 나오는데 연어알과 성게알의 비릿하고 참마의 비릿한 맛이 딱딱한 소바와 짭짤한 국물과 무척 잘 어울린다.

따끈한 냄비 우동

소바가 지겹거나 뭔가 더 따끈한 음식이 끌린다면 냄비우동도 추천한다. 내 지인 중 하나는 이곳에 소바가 아닌 우동을 먹으러 간다니, 따끈하고 푸짐한 냄비우동의 맛은 그 말로 보장이 되리라. 튀김과 어묵, 야채가 푸짐히 담아져서 한국 사람이 좋아하는 뚝배기에 담아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맛보면 기분 좋은 따끈함이 몸 안으로 스며든다.

오른쪽 위편의 사각 주전자에 든 면수를 국물에 타서 마신다

참. 자루소바 등의 국물이 따로 나오는 음식에는 식후에 까만 주전자가 나온다. ‘컵도 주지 않고 이건 뭐지?’라고 생각할 법한 이 주전자에는 바로 국수를 삶은 물이 담겨 있다. 일본에서는 직접 면을 뽑는 소바집에서는 면수를 식후에 내주는데, 이 면수를 남은 국물에 부어 연하게 만든 후 입가심을 한다. 처음에는 묽어진 맹맹한 국물 맛이 어색할 수도 있지만 몇 번 맛보다 보면 소바를 먹은 후 면수에 탄 국물이 그리워질 것이다.

항상 많이 먹어 배부른 배를 움켜쥐고 거리로 나오면 다시금 낯선 뉴욕이다. 뉴요커들에게는 새해는 이미 지난 듯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리만의 새해에, 나는 일본의 설 전날 음식을 먹으며 나의 새해는 내일부터라고 우스운 다짐을 해본다. 매일을 새해에 마음 먹는 것처럼 마음을 다지며 살아갈 수 있다면 정말 멋진 일일 것이다. 미리 말했듯이 언제든 마음먹는 대로 새해의 시작은 달력 위의 1월 1일이, 구정이, 혹은 오늘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새해가 지난 오늘, 첫날의 결심이 흐려졌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67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김지원

대학 시절 4년간 심리학을 공부하며 내 자신에 대해, 인생의 맛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 끝에 결정한 요리 유학은 가족과 친구들을 떠나, 홀로 자신과의 대화를 나누며 뉴욕과 함께 농밀한 데이트를 보냈던 1년이었다. 객관적인 시간으로는 1년이라는 것은 결코 길지 않지만 주관적인 시간으로는 10년과도 같이 지냈던 그 해를, 함께 가지 못했던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을 모자란 글에 담아본다.

오늘의 책

나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단 하나, 사랑

임경선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주인공의 일기를 홈쳐보듯 읽는 내내 휘몰아치는 사랑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운명적인 사랑에 빠져 자기 자신을 잃어가면서도 그 마음을 멈추지 못하는, 누구나 겪었을 뜨거운 시간을 작가 특유의 감각적인 문체로 표현해낸 소설.

매혹적인 서울 근현대 건축물

10년째 전국의 건축물을 답사해온 김예슬 저자가 서울의 집, 학교, 병원, 박물관을 걸으며 도시가 겪은 파란만장한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이 책은 도시의 풍경이 스마트폰 화면보다 훨씬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우며, 당신의 시선을 세상으로 향하게 해줄 것이다.

2024 비룡소 문학상 대상

비룡소 문학상이 4년 만의 대상 수상작과 함께 돌아왔다. 새 학교에 새 반, 새 친구들까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처음’을 맞이하고 있는 1학년 어린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섬세한 시선이 눈부신 작품. 다가오는 봄, 여전히 교실이 낯설고 어색한 친구들에게 따뜻한 격려와 응원을 전한다.

마음까지 씻고 가는 개욕탕으로 오시개!

『마음버스』 『사자마트』 로 함께 사는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김유X소복이 작가의 신작 그림책. 사람들이 곤히 잠든 밤, 힘들고 지친 개들의 휴식처 개욕탕이 문을 엽니다! 속상한 일, 화난 일, 슬픈 일이 있을 때, 마음까지 깨끗히 씻어 내는 개욕탕으로 오세요!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