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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 최초의 꽃, 최초의 도시 - 조경란

광화문은 나의 첫 번째 도시이자 내가 경험한 첫 번째 근대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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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 도시가 버린 것, 분실된 것, 깨진 것, 사라진 것, 다시 주워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손탁호텔이 있던 자리

서울에서 태어나 지금껏 서울에 살고 있지만 ‘서울깍쟁이’라는 말은 성년이 되어서야 처음 들어보았다. ‘하늘을 떠받드는 동네’라는 뜻의 봉천동(奉天洞), 그것도 산1번지가 내 본적이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병풍처럼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사시사철 다른 빛깔의 꽃이 피고 졌다. 다람쥐처럼 쪼르르 아까시나무를 오르고 내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온종일 나무에 턱 하니 올라앉아 저쪽 나무에 앉은 친구와 손나발을 불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국어책을 읽었다. 동생들이 생긴 후부터는 동생들을 끌고 산을 오르고 나무를 타고 꽃을 꺾으러 다녔다. 그 시절의 봉천동은 ‘서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너 저쪽 산동네에 사는구나. 학교에 입학하자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던 것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당연히 산과 나무가 있고 새가 있고 꽃이 있고 대문이 없는 줄 알았으니까.

그런 봉천동이 내 세계의 전부였다. 적어도 열일곱 살이 되기 전까지는.


초등학교와 마찬가지로 중학교도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다녔다. 사춘기가 시작되었고 집이 아닌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익숙한 것, 자주 본 것 말고 이 세상에는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학군도 아닌 정동에 있는 여학교에 전교생 중 딱 두 명이 배정되었고 그중 한 명이 나였다. …… 정동이라니. 그런 데도 있어요?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S여고를 중퇴한 것이 평생의 한으로 남아 있는 엄마와 버스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내 기억력이라는 건 대체로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그때 내가 처음으로 한강을 건넜다고 믿고 있다. 그만큼 한강을 건넌 일이 흥분되고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엄마와 나는 교정을 거닐었다. 지금부터 내가 다니게 될 학교의 교정은 그 후에도 내가 누려보지 못할 사치스럽고 화려한 공간으로 남아 있다. 늘 보고 자란 나무들, 배꽃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단체관람 영화에서만 보던 테니스장이라든가 생전 처음 본 노천극장 같은 것들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막 시골에서 올라온 여학생처럼 나는 엄마 손을 한시도 놓지 않았다. 엄마는 그 학교에 대해서, 그 학교가 있는 도시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처럼 나에게 이것저것 말해주었다. 하나도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 말을 할 때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한꺼번에 배어나오던 붉은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서대문 쪽으로 들어간 교정을, 나올 때는 다른 문으로 나오게 되었다. 학교에 교문이 세 개나 된다는 사실도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버스정류장을 향해 얼마쯤 타박타박 걸어갔을 때, 엄마가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광화문이란다.

광화문(光化門). 역시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열일곱 살. 어쩌면 그때 나는 첫사랑이란 것을 경험했는지도 모른다. 릴케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게 우리를 더 넓은 곳으로 불러내는 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봄이 시작되었고, 아침마다 나는 잘 손질한 옷을 차려입고 한강을 건너 광화문으로 갔다. 아침 햇살에 한강이 반짝거리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흔들리는 버스 손잡이를 단단히 잡은 채 수줍은 목소리로 혼자 내 이름을 소리내어보았다. 京蘭. 부모가 나에게 준 최초의 선물이었다. 서울의 꽃이 되어라, 라고 나는 내 인생에게 은밀한 주문을 걸기 시작했다.


1902년 10월, 고종은 덕수궁 옆에 호텔을 세워 자신에게 커피를 처음 소개하여 환심을 산 독일계 프랑스인인 앙투아네트 손탁이라는 여성에게 운영을 맡긴다. ‘손탁호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며, 그 호텔이 있던 자리에 내 모교가 있었다. 중구 정동 30번지. 내 청소년기의 주소다.


집을 짓다

지역적인 ‘광화문’의 의미라면 보통 세종로사거리 주변을 지칭할 것이다. 나에게 ‘광화문’이라는 것은 세종로 한복판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중심으로 탈것을 이용하지 않은 채 동서남북 걸어다닐 수 있는 모든 곳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정동이나 서대문ㆍ세종로ㆍ태평로ㆍ인사동 간다, 라고 말하지 않고 ‘광화문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리버리했던 열일곱 살 때부터 그 주변 일대 그리고 러시아공사관과 옛 정동구락부, 서울시립미술관, 정동제일교회, 미국대사관저, 덕수궁 돌담길을 매일 매일 걸어다녔다. 처음에 그 위풍당당한 건물과 크기에 마음을 빼앗긴 것과는 달리 나는 모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산동네가 아닌 곳에서 온 아이들과 친구가 되는 것도 어렵게 느껴졌고 원했던 문예반도 성적순으로 자르는 통에 들어갈 수 없었다. 불어 시간에는 독일어 공부를 했고 독일어 시간에는 국어 공부를 했다. 보충시간이 되면 지금은 나의 문학적 선생이 된 작가들의 책을 들고 나와 노천극장에 앉아 밤이 올 때까지 읽었다. 어디선가 테니스공이 튀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고 웃음소리, 기합소리 같은 것들이 간간이 들렸다. 글씨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쯤이면 교실로 쑥 들어가 가방을 챙겨들고 동문으로 나왔다. 선생도 수위 아저씨도 나를 잡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뭐 그런 얼굴로 보충수업도 안 마친 학생을 순순히 보내줬다. 동문을 나가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덕수궁, 왼쪽 옛 MBC 건물, 그러니까 지금의 정동극장 쪽으로 계속 올라가다 다시 길을 돌면 거기서부터 광화문이었다. 숨어들 듯 곧장 ‘공씨책방’으로 갔다.

십 년 후, 나는 작가(作家)가 되었다.


아버지는 봉천동에 있는 우리 집 옥상에 ‘옥탑’을 올렸다. 사람들이 보통 ‘옥탑방’이라고 부르는 그런 방 하나를 말이다. 작가가 된 1996년도부터 나는 그 방에 살기 시작했으며 지금도 거기 살고 있다. 소설가란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생을 허물고 그 벽돌로 ‘소설’이라는 새로운 집을 짓는 사람이라는 밀란 쿤데라의 말을 떠올리며 그 방에서 소설을 썼고 어떤 것은 흔들리고 무너지기도 했지만 더러 어느 소설은 시간이 지나도 허물어지지 않는 튼튼한 집으로 자라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글을 쓰지 않는 시간에는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갔다. 그 거리에 공씨책방도, 육교도, 자주 가던 분식점도, 그 시절 자주 만나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없지만 지금은 교보문고도 가고 세종문화회관도 가고 내 첫 소설의 중요한 공간이 되었던 식당 ‘나무와 벽돌’에도 간다. 한 시절 가장 가까웠던 사람의 직장 또한 그곳이어서 옥탑방에 있지 않은 시간의 대부분을 광화문에서 보내는 것이 전혀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약속장소를 정할 일이 있으면 ‘광화문이요’라고, 마치 내가 사는 동네라도 되는 것처럼 무람없이 말하게 되었다. 낯선 나라에서 몇 달씩 시간을 보내다 집에 돌아오면 다음날 가장 먼저 가는 데도 광화문이다. 나를 절반으로 나눈다면 글을 쓸 때의 나, 글을 쓰지 않을 때의 나로 나눌 수 있듯 내가 사는 곳을 절반으로 나눈다면 역시 봉천동과 광화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약속이 없는 날에도, 글이 써지지 않는 날에도, 책을 사거나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거나 영화나 전시 같은 것이 보고 싶은 날에도 어디에 있든 나는 맨 먼저 광화문으로 갔다. 그러면서 아마 나는 본격적인 ‘서울깍쟁이’가 되어갔을 거였다.

세종로사거리를 횡단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자동차들이 쌩쌩 다니고 인파도 많은 그런 복잡하고 활기가 넘치는 시간에 말이다. 광화문에 오래 다니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군. 나는 속으로 씩 웃었다.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PD가 큐 사인을 보냈다. 한 손에 책을 든 채 나는 당당하게 광화문 거리를 활보했다. 공중파방송의 문화 프로그램이었는데 코너 이름이 ‘예술 예찬’이었다. 어디서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PD는 나에게 광화문이라는 거리를 한번 예찬해보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해왔다.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거긴 ‘광화문’이었으니까. 그날 이후 한 번 더, 차량까지 통제시킨 세종로사거리를 걷게 된 적이 있었다. 2002년 월드컵 때도 사회적으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있을 때도 세종로나 서울광장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2008년 5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가 불거지면서 광화문 일대는 온통 촛불로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2008, 광화문 연가

지난해 말, 서울시는 왕복 16차선인 세종로를 10차선으로 줄여 중앙에 광장과 분수대를 만들겠다는 ‘서울시 복원계획’을 발표했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현재 덕수궁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올해 말쯤 세종로로 옮겨오겠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아마 런던 트래펄가 광장의 넬슨 동상이나 워싱턴 한복판, 링컨 기념관에 있는 링컨 좌상처럼 현재의 이순신 장군 동상뿐만 아니라 세종대왕 동상까지, 이 두 개의 동상이 서울의 심장 세종로를 대표하는 명물이 될 것이다. 그 동상들을 어떻게 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배치하느냐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개인적으로 지금의 나에게 세종로ㆍ광화문을 대표하는 명물은 흥국생명빌딩 앞에 우뚝 서 있는 ‘망치 든 사람’이라는 조너선 보로프스키의 설치작품이다. 거대한 한 남자가 망치 든 손을 한시도 쉬지 않은 채 천천히 들었다 내렸다 하는 고독한 움직임을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보고 있노라면 새삼 노동의 신성함 같은 것이 떠오르고는 한다. 글이 안 써져 도망치듯 나온 날에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 책상 앞에 앉아야 할 것 같은 의무감도 불쑥불쑥 든다. 이 조각상 역시 광화문을 오가는 사람들이 더 잘 볼 수 있도록 서울시의 도시 건설계획에 따라 2m 정도 차도 쪽으로 옮기는 작업이 현재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다섯 개가 세워져 있다는 ‘망치 든 사람’ 조각상을 도서전이 열리던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았을 때, 나는 마치 광화문에 서 있는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공공조형물의 중요성을 그때 처음 느꼈던 것 같다.


도시는 문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즉 진보와 문화를 상징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도시’라고 말할 때 그것이 담고 있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높은 빌딩과 화려한 광고판들, 아스팔트, 그 길을 질주하는 자동차들, 소음, 가로수들, 공원, 그리고 그 도시를 상징하는 강. 이런 것들이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공간. 도시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거대한 공간은 또한 소설을 쓰는 나에게는 ‘시장’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 공간에는 주인공이 되는 인물, 즉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쓰는 일은 근본적으로는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며 모든 이야기는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텍스트로 느껴질 때가 있다. 독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까다로운 책. 멋진 일과 충격적인 일, 그리고 동시에 다양성과 지루함이 공존하는 마술적인 장소. 그렇게 다양한 층위를 갖고 있는 ‘도시’가 나로서는 ‘광화문’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십여 년 전, 빈손으로 이 거리에 처음 왔을 때 나는 앞으로 내가 어떤 인생을 살게 될까 상상한 적이 있었다. 다른 것은 몰랐지만 지금처럼 내가 여기 서 있게 되리라는 것, 태어나고 자란 봉천동이 그랬듯 이 도시가 나의 일부를 형성하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예감했다. 광화문의 넓고 좁은 길을 오가며 나는 수없이 많은 것을 가슴에 담고 새겼다. 어떤 것은 추억으로 어떤 것은 소설로 남았다. 이 세상엔 변하는 것도 많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예술가로서의 나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사이의 접점에 선 그런 예술을 하고 싶다. 변하는 것을 유행, 혹은 기술이라고 한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버릴 수 없는 것,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뜻할 것이다. 도시 속에는 옛것과 새것,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공존한다. 길과 길들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있다는 것. 도시는 나에게 이런 것을 가르쳐주었다.


광화문은 나의 첫 번째 도시이자 내가 경험한 첫 번째 근대의 장소다. 우리가 도시에서 잃어버린 것, 도시가 버린 것, 분실된 것, 깨진 것, 사라진 것, 다시 주워야 할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것들을 모아 ‘소설’이라는 인공물로 변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직업, 나의 소중한 삶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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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 일대가 거의 제재소였던 봉천동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도시’가 나의 ‘제2의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하다 말다 한 적은 있지만 소설을 쓰다 말다 한 적은 없듯,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도 없다. 나이가 들어서도 도시에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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