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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지의 음률로 가득한 우울한 세상에서 우리가 나르는 그 환한 불

코맥 매카시의 『로드』와 라흐마니노프의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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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죽음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 아직 내 것이 아닌 경험들? 미래에 다가올 그 모든 기쁨과 슬픔과 눈물과 웃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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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죽음 사이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있을까? 앞으로 앞으로만 나아가는 시간? 아직 내 것이 아닌 경험들? 미래에 다가올 그 모든 기쁨과 슬픔과 눈물과 웃음들? 미국의 한 소설가는 소설에서 이렇게 썼다. “소년이 남자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이라는 말.” 그런 말. 이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고 모든 인류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가운데 하는 말. 세계를 구원하지도 못할,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말. 그런 말. 그 남자와 그 소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말이란 이런 의미다.

마비 상태나 무지근한 절망마저 넘어선 어떤 느낌. 세상이 날것 그대로의 핵심으로, 앙상한 문법적 뼈대로 쪼그라든 느낌. 망각으로 빠져든 사물들을 천천히 뒤따르는 그 사물의 이름. 색깔들. 새들의 이름. 먹을 것들. 마침내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이름마저.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만큼 덧없었다. 이미 사라진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시대상을, 따라서 그 실체를 빼앗긴 신성한 관용구. 모든 것이 열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어떤 것처럼 스러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깜빡 하고 영원히 꺼져버리는 어떤 것처럼.

이런 세상에서 소설가는 이렇게 쓴다. 다시. “소년이 남자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이라는 말.” 배경은 어떤 파국적 사태가 벌어진 뒤의 세상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사람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바다는 푸른빛을 잃었고, 강에는 송어가 없다. 인간의 감정은 공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즐거움과 기쁨은 물론 회한과 눈물도 없다. 그저 공포뿐. 이런 세상 속으로 한 남자와 소년이 걸어간다. 그들은 지금 불을 나르고 있다.

나와 죽음 사이에는 네가 있다는 말

코맥 매카시. 『로드』. 길. 이 소설에 대해서 말하는 건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08년에도 소설은 여전히 아름답다. 많은 사람들이 소설의 지루함을 말하고, 영화의 즐거움을 떠들어대고, 인터넷의 속도를 거론하지만 아무런 이야기도 없이 그저 죽음과, 그 죽음의 결과와, 그 죽음에 직면한 인간의 육신에 대해 담담하게 묘사하는데도 이 소설은 여전히 아름답다. 아름답다고 쓰고 나는 다행이라고 읽는다. 나는 자주 내가 문맹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예컨대 지하 1층 관리사무소에 가서 관리비를 내고, 홈에버에서 생수를 사 오고, 먼지가 쌓여가는 바닥을 걸레로 닦고 나서 의자에 앉아 문득 책을 펼쳤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을 때.

할 일의 목록은 없었다. 그 자체로 섭리가 되는 날. 시간. 나중은 없다. 지금이 나중이다.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든 것들, 너무 우아하고 아름다워 마음에 꼭 간직하고 있는 것들은 고통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슬픔과 재 속에서의 탄생. 남자는 잠든 소년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나는 소리 내어 마지막 문장을 따라 읽는다. 그래서, 나한테는 네가 있는 거야. 너는 내 앞에 서서 죽음이 보이지 못하도록 가려주는 사람이니까. 물론 나도 알아. 언젠가는 내가 죽음을 직시하게 되리라는 걸. 그게 바로 진실이라는 걸. 그렇게 네가 내 곁을 떠나리라는 걸. 하지만 ‘나중’이 없다면, ‘언젠가는’도 없는 거야. 지금이 바로 언젠가야. 결국 나는 너를 보고, 또 죽음을 보고 있는 거야. 너를 통해서 죽음을 직시하고 있는 거야. 그게 바로 진실이지. 길을 걸어가는 남자는 이 진실에 대해서 알고 있다. 언젠가, 아니 지금, 혹은 아니 우리가 평생 꾼 꿈속에서 우리도 누군가와 한 번쯤은 나눠봤을 듯한 그런 대화.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우린 죽나요?
언젠가는 죽지. 지금은 아니지만.
계속 남쪽으로 가나요?
응.
따뜻한 곳으로요?
응.
알았어요.
뭘 알았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알았다고요.
자라.
알았어요.
불 끌게.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한참 뒤 어둠 속에서. 뭣 좀 물어봐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제가 죽으면 어떡하실 거예요?
네가 죽으면 나도 죽고 싶어.
나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요?
응. 너하고 함께 있고 싶어서.
알았어요.


라흐마니노프. 미샤 마이스키와 세르지오 티엠포가 연주한 엘레지. 첼로와 피아노로 들려주는 비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사라지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노래. 그러므로 엘레지는 진실의 노래.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것들을 위한. 미샤 마이스키의 첼로 음은 이따금 그렇지 않다고 말하듯이 약간 위쪽의 음표로 솟구치기도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아래로 내려온다. 엘레지는 회색의 세계.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우울의 세계다. 그 우울은 지금까지도 이 세상에서 슬픔이 사라지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걸 예감하는 감정이다. 그게 진실이라는 것. 우리가 사랑했던 것들이 결국에는 모두 사라질 것이라는 걸 알게 되는 일. 매카시는 그걸 다음과 같이 썼다.

이번에는 깨어나기가 너무 싫은 풍요로운 꿈들. 지금의 세상은 모르는 것들. 추위 때문에 남자는 어쩔 수 없이 불을 손보러 갔다. 그녀가 젖가슴에 달라붙는 얇은 장밋빛 가운을 입고 이른 아침에 잔디를 가로질러 집으로 오던 기억. 남자는 떠오르는 모든 기억이 그 기원에 어떤 폭력을 행사한다고 생각했다. 파티의 게임에서처럼. 말을 다음 사람에게 전달하는 게임에서처럼. 따라서 아껴야 한다. 기억하면서 바꾸어버리는 것에는 알든 모르든 아직 어떤 진실이 담겨 있으니까.

우리는 모두 불을 운반하고 있다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로드』는 불을 가진 남자와 소년이 절망으로 가득 찬 회색의 세계를 여행하는 이야기다. 길을 걸어가는 동안, 남자는 필사적으로 소년을 바라보고 얘기하고 지켜준다. 소년은 안으면 그대로 부서질 정도로 연약하다. 혹은 죽어가는 다른 모든 것들에게 연민의 시선을 던질 만큼 나약하다. 칼로 자신을 위협한 사내의 뇌수가 터져 소년의 머리칼로 스며드는 그런 끔찍한 세상에서 말이다. 그런 세상의 끝을 향해 길은 이어진다. 그게 인생의 길을 은유하는 것이라고는 절대로 말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길이다. 남자와 소년이 이 길을 걸어가는 까닭은 신이 죽어버린 세상에서 불을 운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죽은 세상이라서 신도 죽었다. 하지만 불은 아직도 거기에 남아 있다. 죽어가는 남자는 소년의 안에 존재하는 불을 본다. 그 불이란, 진실을 똑바로 보는 눈, 결국 모든 것은 죽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 그리하여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염려하는, 우리 안의 그런 존재다. 다시 말하자면 그건 인간이 되는 길이며, 인간들의 총합인 신을 만들어내는 길이다. 죽음의 순간에 남자와 소년이 나누는 대화는 다음과 같다.

함께 있고 싶어요.
안 돼.
제발.
안 돼. 너는 불을 운반해야 돼.
어떻게 하는 건지 몰라요.
모르긴 왜 몰라.
그게 진짠가요. 불이?
그럼 진짜지.
어디 있죠? 어디 있는지도 몰라요.
왜 몰라. 네 안에 있어. 늘 거기 있었어. 내 눈에는 보이는데.
그냥 함께 데려가주세요. 제발.
못해.
제발, 아빠.
못한다니까. 난 죽은 아들을 품에 안을 수가 없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럴 수가 없어.
절대 저를 떠나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알아. 미안하다. 내 온 마음은 너한테 있어. 늘 그랬어. 너는 가장 좋은 사람이야. 늘 그랬지. 내가 여기 없어도 나한테 얘기할 수는 있어. 너는 나한테 얘기할 수 있고 나도 너하고 이야기를 할 거야. 두고 봐.
제가 들을 수 있나요?
그래. 들을 수 있지. 네가 상상하는 말처럼 만들어야 돼. 그럼 내 말을 듣게 될 거야. 연습을 해야 돼. 포기하지 마. 알았지?
알았어요.


알았어요. 연습을 해야 된다는 그 말. 내가 상상하는 말처럼 만들면 죽은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는 그 말. 이건 착한 사람들의 말이다. 남자의 말처럼, 착함(善)은 길을 잃은 꼬마를 찾아줄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착하다는 게 연약하거나 나약한 자질이라고 생각해 왔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강해져야만 한다고 믿었다. 부를 쌓고 권력을 쟁취하고 명예를 얻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착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이 말에 나는 위안을 받았다. 알았지? 착해져도 괜찮아. 상상하면 되는 거야. 네가 상상하는 대로 세상은 만들어질 거야. 우리가 연습할 것은 위악이 아니라 선이야. 착해져야만 해.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해. 그건 전혀 나약하지도 않고, 연약하지도 않아. 우리는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착한 사람이, 또 좋은 사람이 될 거잖아. 그것도 늘 그럴 거잖아. 그리고 착한 사람들과 좋은 사람들은 늘 꿈을 꾸게 마련이잖아. 바로 그 꿈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구원할 거야. 이게 우리가 평생 우리 안에 담아서 운반하는 불이 아니라면, 무엇을 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적어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큼은 우리 모두

나와 죽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늘 착하고 좋은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하여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 그렇게 뭔가를 꿈꾸는 사람들. 그 상상 속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지난 4월 말부터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둡고 어두운 밤에 벌어지는 폭력 앞에서 나약하고 연약하기만 한, 결국에는 착하고 좋을 뿐인, 그게 가진 것의 전부인 사람들. 그 사람들 앞에 놓인 진실이란 이 세계가 엘레지의 세계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으리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모든 것은 곧 사라지리라는 것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쓴다. 나 역시 적어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만큼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고 쓴다. 상상하는 말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애써야만 한다.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그 언어들. 어쩌면 지시대상을 잃어버린 그 언어들. 그 언어들을 듣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한다. 그 안간힘을 통해서 나는 그 누군가와 죽음 사이의 모든 것이 될 것이다. 그렇게 착해지고 좋은 사람이 된 내가 상상할 때, 이 세계는 아기처럼 다시 태어난다. 그러니까 아래와 같이. 『로드』라는, 이 고통과 슬픔과 비감이 가득한 엘레지의 세계가 더 없이 환하고 밝은 장면으로 끝나는 것과 같이.

한때 산의 냇물에 송어가 있었다. 송어가 호박빛 물속에 서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지느러미의 하얀 가장자리가 흐르는 물에 부드럽게 잔물결을 일으켰다. 손에 잡으면 이끼 냄새가 났다. 근육질에 윤기가 흘렀고 비트는 힘이 엄청났다. 등에는 벌레 먹은 자국 같은 문양이 있었다. 생성되어가는 세계의 지도였다. 지도와 미로. 되돌릴 수 없는 것, 다시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그린 지도. 송어가 사는 깊은 골짜기에는 모든 것이 인간보다 오래되었으며, 그들은 콧노래로 신비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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