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에서 보내온 음악편지 - 루시드 폴
천천히 그렇지만 탄탄하게 자기 길을 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
스위스에서 그는 공학 공부를 하고 있다. 공학 분야의 일을 하면서 이렇게 섬세한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재능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다.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반된 기질-어쩌면 편견일지 모르겠지만.
※ 운영자가 알립니다
루시드 폴, 조윤석 씨가 스위스에 있는 관계로 본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천천히 그렇지만 탄탄하게 자기 길을 가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루시드 폴이 스위스에서 세 번째 노래 편지 『국경의 밤』을 보내왔다. 낯선 언어, 낯선 환경에서 느끼는 필연적인 고독에서 길러낸 맑은 노래들이다. 2005년에 2집 『오, 사랑!』이 나온 지 3년 만이다.
스위스에서 그는 공학 공부를 하고 있다. 공학 분야의 일을 하면서 이렇게 섬세한 노래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재능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고도 재미있다. 과학과 예술이라는 상반된 기질-어쩌면 편견일지 모르겠지만-이 한 사람 안에 공존한다는 것이 말이다. 로잔대학교 대학원의 재생의학 및 약리생물학 연구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루시드 폴은 SCI(과학기술논문 인용색인)급 논문만 10편 정도 발표했고, 최우수 학위 발표상을 수상할 만큼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
앨범에 실린 곡들이 대부분 가을과 겨울에 걸쳐 만들어진 곡이라 그럴까 낯선 풍경 속을 서성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하늘은 낮고, 공기는 차갑고, 불어대는 바람은 어딘가 온기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잔소리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손을 하늘로 뻗쳐 식어가는 태양의 작은 온기를 움켜쥐려고 한다. 예를 들면, 네 번째 곡 ‘가을 인사’의 가사가 그러하다.
「겹겹이 짙은 외투를 두른 사람들
가지런히 서성이는 거리
바람이 데려다 준 어느 위로
사랑한다고 내게 말하네
걱정 말라고 인사를 하네
혼자서 외롭지 않냐고」
외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경험이 만든 노래도 있다. 타이틀곡 ‘사람이었네’는 카펫 가게 앞에서 만난 이란 친구와의 대화에서 만들어진 곡이다. 친구는 그에게 물었다. ‘저 카펫은 이란의 어린 소녀가 짠 것이다. 저것을 짠 소녀가 얼마를 받았는지 아는가?’ 그는 그 질문과 답을 노래로 옮겼다. 14살짜리 중동의 소녀가 방 안에 갇혀 하루에 1달러를 버는 현실. 우리가 마시는 커피, 깔고 있는 카펫, 몸에 두르는 털코트는 누군가의 고달픈, 그리고 불공평한 노동 조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노래 속에서 반복되는 ‘난 사람이었네’가 먹먹한 슬픔을 끌어올린다.
오랜만입니다. 스위스로 유학 가신 후로 국내에서 뵙기 힘들었는데요.
그동안 공연은 계속 했었지만 정규 앨범은 2년 반 만입니다. 기다려 주신 분들, 그리고 이번 앨범을 좋아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금은 로잔에 있지만 12월에 3집 발매 기념 콘서트(12월 22일~25일, 중앙대학교 아트센터 대극장)가 있어 한국에 들어갈 예정이에요. 그때 많은 분들을 뵙고 싶습니다.
공학을 공부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분야를 연구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고분자물질을 개발해서, 조직 재생이나 치료에 쓰이도록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일산화질소(nitric oxide)라는 기체물질이 있는데, 우리 몸에서 아주 미량이 특히 혈관내벽에서 분비되지요. 혈관, 특히 심장의 관상동맥(coronary artery)에 질병이 생길 경우, 정상적인 일산화질소의 분비에 장애를 겪는 것이 원인 중 하나일 경우가 많습니다. 일산화질소를 분비할 수 있는 고분자를 만들어서, 대략 70~80나노미터 정도의 크기를 가지는 입자를 만들어 그 약리 효과를 연구하는 것이 제 연구주제입니다. 물론, 이 물질을 다른 용도, 상처재생(wound healing)이나 수술 후 복강부착방지(post-surgical adhesion prevention) 등의 목적으로도 쓸 수 있겠네요.
올해 앨범이 두 장이나 발매되었습니다. 라이브 앨범인 『The Light Of Songs - Best & Live』와 정규 3집 앨범인 『국경의 밤』 이렇게 두 장이요.
공연의 순간을 움켜쥐고 싶었다고나 할까요. 멀리 있으면서 제 주변 친구들, 선후배들과 시간을 많이 같이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경조사까지 같이하지 못하는 저 자신을 보면서 ‘시간은 가고 있는데,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구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저번 공연 때 첫 공연 날의 기분을 잊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저녁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회사 대표 형께 부탁을 드렸지요. 라이브 앨범을 내고 싶다고.
정규 앨범인 3집은 원래 예정보다 조금 빨리 나온 감은 있지만, 녹음은 작년 겨울에 거의 다 끝내놓은 상태였고, 발매를 이번 가을에 하게 되었네요.
『국경의 밤』은 이전에 썼던 곡(‘당신 얼굴, 당신 얼굴’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 ‘국경의 밤’)을 빼고 아홉 곡을 모두 2006년 가을 이후에 썼어요.
우선 2006년 가을, 겨울에 일곱 곡을 썼고, ‘날개’와 ‘라오스에서 온 편지’는 올해 가을에 썼습니다. 대부분 곡들을 집에서 녹음을 해서 한국으로 가져갔어요. 나일론 기타와 일부 보컬은 집에서 했고, 나머지 밴드 녹음은 스튜디오에서 했습니다.
‘날개’의 경우, 집에서 녹음을 해서, 건반연주를 맡아준 ‘박새별’ 양과 계속 인터넷으로 파일을 주고받으면서 작업을 했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이 했지요.
3년 만의 정규 앨범인데… 그동안 루시드 폴의 음악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합니다.
굳이 ‘음악적’인 단서를 단다면, 아무래도 그 사이에 ‘브라질 음악’을 훨씬 더 많이, 그리고 깊이 듣고 사유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형식의 답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브라질 음악 속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는 그 음악의 온기랄까, 슬픔을 승화시키는 그들만의 긍정이랄까… 이런 요소들을 깊게 생각하려 노력했습니다.
노래의 소재를 얘기한다면, ‘연애’에 대한 노래가 이번 앨범에는 거의 없군요. 아마 한편으로는 좀 더 다양한 것들을 노래하고 싶다는 욕구로, 다른 한 편으로는 그다지 가슴에 와 닿는 감정이 없어서 그렇게 되었나 봅니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일에 대한 생각도 처음 데뷔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졌을 것 같은데. 어떠신가요?
많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도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무엇을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조금은 더 성장했겠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기도 하고요.
앨범의 노래들을 들어보니 외로움과 우수가 짙게 느껴집니다. 타국이라는 상황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듯한데요.
위에서 말한 시간(나이)과 더불어, 외국에 살고 있다는 저의 특별한 상황이 여러 가지로 노래에 반영되었겠지요.
곡을 만들 때 어느 과정이 가장 괴롭고 어느 과정이 가장 행복한지요?
노래를 만들고 녹음하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지만 ‘괴로운’ 순간은 없습니다. 조금 자기 소모적일 때는 있지만 말이죠. 처음 ‘이거다.’ 싶어서 곡을 짓기 시작해서, 작사까지를 마치고, 혼자 방에서 곡을 쳐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정확하게 만들어졌구나.’ 하고 생각되는 순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죠.
요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뮤지션은 누구인가요?
특별히 없습니다. 여전히 브라질 뮤지션들을 좋아하고. 가끔 fado도 듣고요. 아, 아주 예전에 좋아했던 Elliott smith의 음악을 며칠 전부터 다시 듣고 있는데, 좋네요. 다시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배울 게 있을 것 같아요.
유학생으로 사는 건 어떤가요? 하루 일과가 어떤지 궁금합니다.
제가 지금 살고 있는 로잔은 조용하고, 건조하고, 그런 곳이지요. 로잔은 스위스에서도 그리 큰 떵시가 아닙니다. 한 네 번째쯤 될까요. 아침에 학교에 가서 저녁까지 일하고, 돌아와서 음악 일을 하던가, 쉬거나, 친구를 만나거나. 그런 일과입니다.
공학을 전공하시는데, 공학의 어떤 점이 좋아서(혹은 끌려서) 지금까지 계속 공부해오고 계시는지요?
처음엔 그냥 막연히 공부를 더 하고 싶었어요. 원래 생각하고 뭘 ‘만드는’ 걸 좋아합니다. 아직도 공부를 한다기보다,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일을 하고 있지요.
같이 연구하는 동료 분들이 조윤석 님이 한국에서 ‘루시드 폴’이라는 이름으로 음악 하는 분인 줄 알고 계시나요?
제가 얘기를 한 적은 없는데, 여기 온 지 꽤 된 지라 이미 소문이 퍼져버렸어요. 여기에서도 음악 하면서 연구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이한 경우죠. 아마추어 수준에서는 있지만요. 한국이나 여기나 사람들은 거의 99% 비슷한 것 같습니다. 아주 작은 디테일들을 빼면요.
유럽에 계시면 여행도 많이 다니실 것 같은데요. 실제로는 어떠신가요?
원래 여행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요. 지금 살고 있는 것 자체가 여행인 듯해서, 어딜 또 간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스로 납득하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한국에 계신 분들에겐 이곳저곳을 다니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새로운 활력소도 되겠지만, 저에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기회가 되면, 동남아나 일본, 중국 같은 곳들을 여행하고 싶어요.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데, 그곳 사람들은 어떤지 궁금합니다.
모국어가 그립진 않으신가요? 스위스는 다언어 국가인데, 어떤 언어로 주변 사람과 소통하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한국 친구도 있고, 무엇보다 늘 가사를 염두에 두고 있고, 인터넷이 요즘엔 워낙 잘되어 있어서 우리말을 잊는다든가, 생각이 안 나는 표현이 있다든가,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그냥 똑같지요. 실험실 사람들이 매우 다국적이라, 대부분 영어로 대화를 합니다. 하지만 밖에서 물건을 사거나, 혹은 영어를 못하는 현지인들과는 불어를 씁니다. 가끔 재미로, 친구들과 중국어나 포르투갈어를 연습하듯 쓰기도 합니다.
요즘 가장 행복했을 때는 언제였나요?
글쎄요. 얼마 전 앨범이 나오기 전날이었을 겁니다. 학교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데, 종착역에 도착해 역사를 빠져나올 때, 하늘에서 느릿느릿 눈이 내리더군요. 축복받는 기분이었습니다. 첫눈이었어요. 다음 날, 앨범이 나온 날, 아침에 아파트 현관을 나서는데, 역시 하늘에서 그렇게 눈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공부와 음악을 병행하고 계신데, 음악을 전업으로 하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지금 이미 전업으로 음악을 하고 있습니다.
음악 하는 사람이 되어 제일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이 있으신가요?
제 음악을 듣고, 반갑고, 좋아해주시는 분들을 볼 때. 더 바랄 게 없겠지요.
음악 하는 사람으로 도달하고 싶은 경지가 있다면 어디일까요?
글쎄요. 계속 노래를 만들어가고 싶을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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