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를 읽다
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김영사, 2005)를 읽다.
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를 읽는 중에, 유럽에서 태어난 사탄의 아들 데미안이 미국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되는 설정으로 발전되었던 걸작 오컬트 무비 <오멘(The Oman)> 시리즈가 저절로 떠올랐다.
8. 14. 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 부활하는 네오콘의 대부』(김영사, 2005)를 읽다.
네오콘(neoconservative: 신보수주의자)이 설명될 때마다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 네오콘에게 끼친 그의 사상적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면, 아예 ‘레오콘’이라고까지 부를까? 박성래의 『레오 스트라우스』를 읽는 중에, 유럽에서 태어난 사탄의 아들 데미안이 미국 대통령의 양자로 입양되는 설정으로 발전되었던 걸작 오컬트 무비 <오멘(The Oman)> 시리즈가 저절로 떠올랐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사람은 니체다. 이런 문제가 ‘도전! 골든벨’ 같은 텔레비전 퀴즈 프로그램에 나오면 누구나 재깍 대답한다. 삶과 문화 전체가 1천 년 넘도록 유일 인격신에 의해 지배되어 본 경험이 없는 우리로서는 니체의 선언이 얼마만큼 충격적이었을는지 가늠하기 힘들지만, 당대의 서구인들에게 그 선언은 또 한 번의 지동설이나 같았을 것이다.
1899년, 독일에서 태어난 스트라우스는 20세 때 처음 니체를 접하고 혼란에 빠졌다. “근대인은 성경의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성경의 도덕을 보존하려고 노력했으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만일 성경의 신앙이 없어지면 성경의 도덕도 사라져야 하며 근본적으로 다른 도덕이 수용되어야 한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산다는 게 가능한지, 또 신이 사라진 세계의 새로운 도덕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런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그뿐이 아니었다. 나치가 득세하기 직전,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가졌다는 바이마르공화국의 혼돈은 일부 지식인들에게 ‘신 없는 세계의 당연한 결과’로 비쳤다. 때문에 하이데거는 모든 근대 문명과 제도를 공동체와 인간 존재를 파괴하려는 위협으로 간주하고, 나치즘이 제시하는 절대 국가를 반기게 된다. 일찍이 스트라우스는 그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민주주의?자유주의?상대주의 등의 지적 조류와 정치 운동 일체를 근대 이성이 불러온 허무주의와 퇴폐주의로 치부하면서, 나치 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스트라우스는 스승과 달리 나치에 참여하지 못했다.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박해를 받을 게 뻔한 그에게 외국행을 권유한 또 다른 선생이 훗날 나치의 법 이론가가 된 칼 슈미트다. 이 사람은 ‘적과 친구를 구분하는 행위가 곧 정치’라는 주장으로 유명하다. 또 국가의 최고 통치자는 매번의 고비마다 결단을 할 뿐이지 국가적 의제를 의론에 부쳐서는 안 된다는 ‘결단주의’를 주창했다. 당연하게도 히틀러의 제3제국은 의회를 두지 않았다.
적은 누룩인가, 한 알의 밀알인가? 1930년대 말부터 시카고 대학에 자리 잡은 그는 독일에서 품고 온 불씨를 전파한다. ‘고대 그리스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대중은 어리석기 때문에 훈련된 철학자들이 정치를 관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중은 ‘진리가 없다는 게 진리’라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하며,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이 혼란해지므로 정치는 항상 도덕과 종교를 앞세워야 한다. 스트라우스는 이것을 ‘고귀한 거짓말’이라고 가르쳤고, 네오콘들은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심어 주기 위해서’라고 자국민을 속였다.
흥미롭게도 그런 거짓말 책략은 마키아벨리의 가르침과 동일하지만, 스트라우스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철학을 하수로 본다. 정치와 도덕을 분리시킨 공으로 마키아벨리는 근대정치학의 비조로 추앙되지만, 정치가 도덕을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네오콘이 부시의 재선 전략 가운데 하나로 낙태와 동성애를 부각시킨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바이마르 시대의 독일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히피이즘hippieism으로 대표되는 자유분방한 미국의 1960년대가 스트라우시언을 낳았다.
애초부터 현실 정치에 개입할 목적이 있긴 했지만, 그의 철학이 한동안 지성사에 모습을 보이지 않던 국가 철학으로 승격된 것은, 윤리나 도덕 따위로 더 이상 체제 경쟁을 할 필요가 없어진 미국의 패권주의와 상관된다. 저자는 “스트라우스를 이해하는 것은 한반도에 사는 우리에게는 사활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일”이라고 썼다. 놀랍지 않은가? 데리다도 푸코도 라캉도 이런 중차대성은 부여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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