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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없이도 기분 좋아지고 싶은 날

기분 좋아지고 싶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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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기분 상하는 날이 있다면 이유 없이 기분 좋아지는 날도 있는 법.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 있다면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법. 그런 날은 책상을 탁 소리가 나게 집고 일어난다.

-언젠가 늦은 귀갓길에 달을 보다가 달이 움직이는 평면은 지구가 움직이는 평면에 기울어져 있는데 이건 태양과 달, 지구 사이의 인력과 관련 있단 걸 생각해내고 기분이 좋아졌다. 이성으로도 진리를 알지만 감성으로도 진리를 알 수 있단 말은 또 얼마나 기분이 좋은가?

-더운 밤에 스메타나의 몰다우를 들으면 참 좋다. 중세의 유서 깊은 도시에 퍼지는 물결 찰랑 소리가 그들의 비운을 달래주는 듯 내 귀에도 애잔하게 들린다.

-오늘 아침에 ‘will you still love me tomorrow?’를 캐럴 킹 버전으로 들었을 때 기분이 좋았다.

-먼 곳에 친구가 있어서 꼭 전해줄 책이 있다고 핑계를 대면서 찾아오면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다. 나에겐 ‘지금 뭐해?’라고 문자를 보내는 후배가 있다. 그러면 나는 내 자리에서 바로 일어난다. ‘지금 뭐해?’ 난 대답한다. ‘딱 너를 기다리는 시간이지.’

-더운 날 막 뛰어가서 “사장님! 여기 맥주 한 병이요. 큰 걸로!” 이것도 정말 좋다. 추운 날 막 뛰어가서 “여기 정종 한 잔이요. 큰 걸로!” 이것도 정말 좋다.

-이유 없이 기분 상하는 날이 있다면 이유 없이 기분 좋아지는 날도 있는 법. 내게 주어지는 상황이 있다면 찾아나서야 하는 상황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법. 그런 날은 책상을 탁 소리가 나게 집고 일어난다.

-‘처음처럼’이란 말을 하며 결의에 가득 찬 건배를 남들이 외칠 때 (개인적으로는 ‘처음처럼’이란 말이 참 답답하다. 수많은 실패의 순간을 수많은 가치 있는 순간으로 돌려놓지 않고선 ‘처음처럼’이란 말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이지? ‘처음처럼’이란 말은, 한때는 우리 모두 순수한 사람이었단 희망 넘치는 단서 정도로만 남겨두고 싶다.) 속으로 다른 구호를 외칠 때. 이를테면 ‘나방처럼!’ ‘쇠똥구리처럼!’ 이런 작은 배반의 순간에 기분이 좋다.

-호수의 동심원 무늬 물결을 보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멀리 퍼져 나간다’란 생각을 할 때 네루다의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에 나오는 시구의 힘을 빌리면 더 기분이 좋아진다. “나긋나긋한 황갈색 여자, 나를 네게로 끄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게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 (이건 내가 거의 졸도할 만큼 좋아하는 구절이다. 나를 더 멀리 실어간다는 말!)

덩달아 네루다의 다른 시구가 생각나면서 인생의 다른 순간들이 떠오를 때 기분이 좋다.

“내 심장을 위해서는 네 가슴으로 충분하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내 말들을 관찰한다. 그것들은 나의 것이라기보다는 너의 것이다.”
“내 말들은 네 사랑으로 얼룩졌다. 너는 모든 걸 점령했다. 너는 모든 걸 점령했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제일 큰 별들이 너의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대체로 책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일이 많다. 공원에서 한가로이 다리를 흔들며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커피를 마실 때. 『전망 좋은 방』(열린책들)의 제비꽃 가득한 키스신이라든가,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소녀』(현대문학)에서 문화혁명 시기의 청년이 재봉사의 아름다운 딸에게 이야기해 주려고 가죽점퍼 안쪽에 발자크의 소설을 베껴 써 넣고 고소공포증에 떨면서 산을 기어 내려가는 장면이라든가, 『제인 에어』(민음사)에서 제인 에어가 점쟁이로 변신한 로체스터에게 꼬박꼬박 자신 있게 말하는 장면이라든가, 『콜레라 시대의 사랑』(민음사)에서 식당에서 다른 사람의 아내 된 이를 비췄던 거울을 어떻게든 사버리는 장면이라든가… 그런 장면들은 인간이 서로 닮은 귀여운 존재란 걸 알게 해줘서 기분이 좋다.

-물론 살아오는 내내 내가 성실한 독자였단 뜻은 절대 아니다.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는 영재여서 ‘너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니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란 말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 집엔 상대적으로 많은 책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린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책들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내가 책을 좋아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책을 읽는 순간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던 적이 있고 그러다 보니 책 이야기를 하는 사람 말에는 항상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가 잘 모르는 책 이야기를 하면 무관심한 척 있다가 득달같이 서점에 달려가 일단 사놓고 보는 충동적인 쇼핑광이고 그 결과 가방 속에는 온갖 잡동사니와 함께 언제나 책이 한 권씩 들어 있게 되었다. 내 자동차 바닥엔 읽고 던져 놓은 책이 하도 많아서 내 차를 타려는 사람은 모두 두 발을 들고 타야 해서 결국은 사람들이 내 차에 동승하는 걸 거절하게 되었다. 운전하다가 빨간 신호등에 걸려 있을 때 ‘그새를 못 참고’ 책을 읽다가 뒤차의 우렁찬 클랙슨 소리에 깜짝 놀란 적이 있고 (나에게만) 아주 재미있는 책을 읽다가 주위 사람들에게 맥락 없이 말해서 분위기가 썰렁해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늘 ‘그새를 못 참고’ 망신당하는 사람들의 편이고 ‘분위기 파악 못 해’ 쩔쩔매는 사람들의 편이다.

책 때문에 ‘인기폭발’한 경험도 있다. 입사해서 가장 어리어리한 피디로 사람들이 ‘과연 저 신입사원이 제대로 된 피디가 될 수 있을까’ 이구동성으로 의심할 때 신경숙의 『외딴 방』(문학동네)을 거의 통째로 재연하다시피 이야기해줘서 새롭게 각광받았고, 그 결과 국장님이 어딘가에 기고할 「나의 청춘」이란 글의 대필을 부탁하는 영광스런 일까지 벌어져 안정효의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오늘)를 참고로 1950년대의 시대상을 묘사한 후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혜원출판사)을 좋아해 불문학을 전공하기로 결심했고 김승옥의 『무진기행』(문학동네)을 좋아하며 대학 생활을 마쳤으나 지금은 글과는 거리가 멀어진 중년이 되어서 전원생활을 꿈꾸는 남자의 자서전을 써보기도 했다. (물론 실리지 않았다.) 그때 ‘한 사람이 평생 읽은 책으로 그의 자서전을 꾸며 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요즘도 책을 통째로 이야기해주는 버릇은 남아 있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민음사)이나 『브로크백 마운틴』(미디어2.0)『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달의 궁전』(열린책들)의 앞부분은 얼마나 자주 이야기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다. 요새 새로 추가한 책은 구효서의 『시계가 걸렸던 자리』(창비)와 쑤퉁의 『이혼 지침서』(아고라)에 나오는 「처첩성군」이다. 그러다 보니 교통 체증 구간의 뻥튀기 장사를 보면서 ‘나라면 교통 체증 구간의 책 이야기해주기 아르바이트로 용돈이라도 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가 주위 사람들의 만류로 참았던 일도 있다.

휴일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이불을 턱까지 올리고 게으름을 피우는 날, 박영한의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을 생각하면 슬슬 웃음이 나온다. (난 이 장면을 ‘한국 문학 사상 가장 따뜻한 아침 신’이라고 부른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주인공은 아내의 타박을 받으며 일어나기 직전까지 잠자리에 누워서 춘자나 영자 같은, 이름도 아련한 역전 주변 여자들의 벌거벗은 몸을 생각하며 따뜻한 자기의 사타구니를 꼼지락거리는데 내가 가장 매료되는 순간은 그때 그 방 앞에선 가금류가 꾹꾹거리고 있는 그 장면이다. 돼지나 소가 아니라 가금류가 먹이를 쪼아대는 소리라니, 집은 그런 곳 아닐까? 나의 방과, 온기가 남아있는 이부자리와 또 하루가 시작됨을 알려주는 어떤 신호들. 난 그때부터 ‘가금류’란 말을 들으면 꼭 한 남자가 나름대로는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꼼지락거리는 작은 온돌방이 생각난다. 그런 순간이면 책 때문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부엌에서 카레라이스를 만들려고 양파 껍질을 벗기다가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분 좋아지는 것은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민음사)을 생각할 수 있어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티타는 부엌 식탁 위에 툭 떨어지듯 태어나 가문의 요리를 담당하게 되는 막내딸이다. 맨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가슴이 벌렁벌렁, 자꾸 생각났던 장면은 티타가 사랑하는 페드로에게 장미꽃 한 다발을 선물 받고는 기뻐서 꽃을 너무 세게 안는 바람에 손가락과 가슴에서 흘러나온 피로 물들어 버린 꽃잎으로 메추리 요리를 했을 때 벌어진 일을 묘사한 장면이다.

“(메추리 요리를 먹은) 헤르트루디스(티타의 언니)는 샤워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서 샤워 준비를 하러 달려갔다. 하지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몸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 버렸기 때문에 불행히도 헤르트루디스는 샤워를 즐길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어찌나 강했던지 임시 샤워실의 나무판자가 뒤틀리면서 불이 붙었다. 헤르트루디스는 불길에 휩싸여서 타죽을까 너무 두려웠던 나머지,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샤워장에서 뛰쳐나왔다. 그때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장미향은 멀리, 아주 멀리까지, 혁명군과 정부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던 마을 바깥까지 퍼져 나갔다. 그들 중 유독 한 군인이 출중한 용기 때문에 돋보였다. 헤르트루디스는 그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고 달리던 걸음을 멈췄다. 강렬하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허리춤까지 늘어뜨린 헤르트루디스는 천사와 악마를 반반씩 섞어놓은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오랫동안 산에서 싸우며 억눌려 왔던 후안의 욕정과 맞물리면서 크나큰 장관을 이루었다. 후안은 그녀를 말에 태우고 열정적으로 껴안고 키스하느라 말고삐를 놓쳤지만 말은 최종 목적지가 어디인지 아는 것처럼 계속 질주했다. 말의 움직임과 그 둘의 움직임이 하나가 되어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열기가 주위에 일으키는 화학작용을 생각하면 이 장면조차도 과장으로 읽히지 않는다. 난 요리사 티타가 딱 요리하는 방식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게 좋다. 이를테면 이런 문장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는 팔팔 끓는 기름에 도넛 반죽을 집어넣었을 때의 느낌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얼굴과 배, 심장, 젖가슴, 온몸이 도넛처럼 기포가 몽글몽글 맺힐 듯이 후끈 달아올랐다.”

“성대한 연회가 끝나고 나니 접시에 달랑 하나 남은 칠레 고추보다도 더 외로웠다.”

“이글거리는 시선, 춤추는 듯한 매력적인 동작, 거친 숨소리, 욕망, 그 모두가 두 사람 것이 아닌 한 사람의 것 같았다. 모든 물질이 왜 불에 닿으면 변하는지, 평범한 반죽이 왜 토르티야(멕시코 요리)가 되는지, 불 같은 사랑을 겪어보지 못한 가슴은 왜 아무런 쓸모도 없는 밀가루 반죽 덩어리에 불과한 것인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에서 많은 사람이 좋아해서 밑줄 쳐놓은 부분은 이곳이 아닌가 싶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재미있는 이론을 가지고 계셨어요, 우리 모두 몸 안에 성냥갑 하나씩을 갖고 태어나지만 혼자서는 그 성냥에 불을 댕길 수 없다고 하셨죠. 산소와 촛불의 도움이 필요하죠. 산소는 사랑하는 사람의 입김이 될 수 있습니다. 촛불은 펑 하고 성냥불을 일으켜줄 수 있는 음식이나 음악, 애무, 언어, 소리가 되겠지요. 사람들은 각자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불꽃을 일으켜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만 합니다. 그 불꽃이 일면서 생기는 연소 작용이 영혼을 살찌우지요.”

자신의 불씨를 지펴줄 뭔가를 제때 찾아내지 못하면 성냥갑이 축축해져서 한 개비의 불도 지필 수 없게 된다니 양파 껍질에 눈물 콧물 흘리면서도 산소와 촛불과 성냥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여간 요리사는 요리사의 방식으로, 피아니스트는 피아니스트의 방식으로, 유치원 선생은 유치원 아이들의 방식으로 자기를 읽는다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화려하게 들릴 것이다.

책을 아주 귀엽게 실용적으로 써먹어서 덕 본 일도 있다. 『파브르 평전』(청년사)의 이 문장을 들어보라. 이 문장을 써먹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나는 그날 저녁을 산누에나방의 저녁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나방은 흰 모피 목도릴 두르고 밤색 비로도 옷을 입은 것 같은 생김새다. 5월 6일 아침, 암컷 나방이 서재의 책상 위에서 번데기 밖으로 기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나방을 종 모양의 철망으로 덮는다. 저녁 9시경에 내 아들 폴의 방에서 쿵쾅거리는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 아들 폴이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빨리 오세요. 새처럼 큰 나방들 좀 보세요. 제 방 전체가 나방들로 가득 찼어요. 나는 급히 건너가서 녀석이 흥분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아들의 흥분이 이해가 된다. 거대한 나방들이 우리 집에 침입한 것이다. 거기서 본 것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커다란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하며 커다란 나방들이 철망 주위를 맴돈다. 어떤 놈은 우리 어깨에 내려앉고 어떤 놈은 우리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사랑에 빠진 산누에나방들이 사방에서 날아든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오늘 아침에 내 서재에서 태어나 결혼 적령기가 된 암컷에게 사랑을 다짐하러 온 것이다. 그다음 주까지 매일 저녁 나방들이 날아들었다. 나방들은 성숙하면 짝짓기를 위해서만 산다. 성숙한 나방들은 입이 구부러져 결코 먹이를 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곧 지쳐버린다. 이틀 내지 사흘 저녁의 몇 시간 동안만 짝을 찾아 사랑의 축제를 벌이는 것이 수컷에게 허용되어있다. 삶의 환상과 수고가 모두 끝나는 순간이다. 사로잡힌 암컷은 철망 속에서 여드레를 살았다. 그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수컷 150마리가량을 유인했다. 수컷들은 먼 곳에서 와야 했다.”

나는 이 긴 글을 한 남자에게 인용하고 딱 한 마디만 덧붙였었다. “나방만도 못하진 않겠지?” 물론 나를 더 사랑해 달라는 뜻이었다. 아주 멀리서도 나임을 금방 알아보고 달려와 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파브르 평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은 「꿈」이란 제목이 달린 부분이다.

“나는 꿈에 잠길 때마다 단 몇 분만이라도 우리 집 개의 뇌로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라기도 했다. 세상의 사물들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것인가?” (‘천 겹 모기의 눈으로 나를 봐주세요. 개의 뇌로 나를 봐주세요!’ 한 번은 부장님께 잘못 써먹어서 회사에서 쫓겨날 뻔하긴 했지만.) 하지만 난 아직도 여름밤의 윙윙거리는 모기를 보면 모기와 눈을 맞추는 상상을 한다.

변두리의 어린이 도서관 앞을 지나갈 때, 어린이들이 와글와글 나오는 장면을 보면 까뮈의 『최초의 인간』(열린책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할머니와 장애인이나 다름없는 어머니와 알제리에 사는 지독하게 가난퇇 소년 자크(까뮈의 자전적인 모습)는 매주 도서관에 간다. 그 도서관의 위치부터가 상징적이다. “그 길의 한쪽 편에는 고급 빌라들이 늘어서 있었고 다른 한쪽은 값이 싼 작은 공동주택들”인 곳의 경계에 있었다.

“그 책들 속에 담긴 내용은 따지고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도서관에 들어가면서 우선 받게 되는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그들이 보게 되는 것은 검은색의 책들이 아니라 문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자기 동네의 편협한 삶에서 그들을 낚아채 가는 어떤 공간과 다양한 지평이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들이 빌릴 수 있는 두 권의 책을 받아 옆구리에 끼고 그 시간이면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대로로 걸어 나와 플라타너스 나무의 열매들을 밟으며 큰 골목에 이르러 자신들의 즐겁고 탐욕스러운 희망을 북돋우어 줄 어떤 구절(가령, ‘그는 범상치 않은 정력을 지닌 사람이었다’)을 골라보려고 이제 막 켜진 가로등의 불빛 아래서 그 책들을 펴보기 시작하는 그런 시간이 오는 것이다.”

자크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으므로 뭐든지 다 알고 싶어 하는’ 소년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자크는 어른이 된 내가 더 나이 들어서까지, 삶이 계속되는 한 영원히 닮고 싶은 모습이다. 그래서 난 해질 무렵 책을 옆구리에 끼고 가로등 밑을 걸어 지나가는 어린아이들을 보면 기분이 참 좋다.

『최초의 인간』은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명장면이 몇 개나 더 있는데 -이를테면 마흔 살이 된 자크가 (자신의 나이보다 훨씬 젊은) 스물아홉 살에 죽어버린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궁금해 하는 장면 같은 것, ‘어쨌든 난 스물아홉 살에 살아있었잖아!’라고 자기 인생을 긍정하는 장면- 난 비가 주룩주룩 오는 날 끈적끈적해서 기분 나쁠 때 『최초의 인간』의 첫 장면을 떠올리면 멋진 연작화를 보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사흘 전에 구름들은 대서양 위에서 부풀어 올라가지고 서풍을 기다렸다가 가을 바닷물 위를 대륙 쪽으로 곧장 날아가 모로코의 물마루에서 실처럼 풀렸다가 알제리의 고원 위에서 양떼들처럼 다시 모양을 가다듬더니 이제 튀니지, 국경에 가까워지자 티레니아 바다 쪽으로 나가서 자취를 감추려고 하는 것이었다. 숱한 제국들과 민족들이 수천 년 동안 이동해 온 것보다 더 빠를 것도 없는 걸음으로 그 이름 없는 고장 위를 지나 북쪽으로는 요동치는 바다가, 남쪽으로는 얼어붙은 듯이 정지한 모래의 파도가 보호해주고 있는 그 거대한 섬 같은 지역의 하늘 위로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 오고나자 뻗쳐오르던 기운이 쇠했는지 그중 몇은 어느새 굵고 드문 빗방울로 변하며 네 사람의 여행자들 머리 위 마차 포장마차를 후려치면서 투탁거리기 시작했다.”

이 긴 문장은 단 하나의 목적, 젊은 부부가 타고 있던 포장마차 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묘사하는 데 바쳐졌다. 이런 표현이야말로 세계와 나를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해준다. 우리는 스커트를 적시는 빗방울을 바라보는 순간에도 오호츠크해 기단을 궁금해 해야 하는 존재 아닌가?

 

좀 다른 방식으로 나를 기분 좋게 해주는 책도 있다. 이를테면, 인생의 문제로 이것인가 저것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불을 밝히듯 해답을 들이미는 책이 있다. 어느 해 겨울 길거리에서 신장 180센티미터의 선배가 팔짱을 낀 채 나보다 대략 십 센티미터 위의 높이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선언했었다.

“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 나는 이 말에 어리둥절했었다.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해준 책은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이후)이다. 수잔 손택은 “당면의 과제가 타인의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이라면 더 이상 ‘우리’라는 말을 당연시해서는 안 된다”라고 선언한다.

수잔 손택은 ‘사람들은 왜 전쟁의 참사를 기록한 끔찍한 사진을 보는가?’라고 묻는다. 수잔 손택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말하는 것은 재빠르고 편안한 연민이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연민은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오로지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하는 이유, 그것은 내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은 내가 나를 대하는 방식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우리라는 말을 쓸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조심하게 되었다. 뭔가 행동해 줄 수 있을 때에만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할 때) ‘우리’라는 말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우리’라는 말을 하는 관계를 늘리는 것, 그것이 내가 이 사회에서 할 일이다.

“책이 당신을 기분 좋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책은 고독 속에 있으면서도 끝없이 세상과 연결하고 대면할 기회를 갖게 한다는 점 때문이라 우선은 대답하고 싶다. ‘우리는 그 무엇이긴 하지만 전체는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파스칼의 말을 알게 되는 것. 그건 참 기분 좋은 양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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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런던을 속삭여줄게』,『고전읽기-세계가 두번 진행되길 원한다면』이후 쭉 고전 읽기에 푹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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