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주의 『마린을 찾아서』를 읽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학교는 교과를 중심으로 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능하지만, 삶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이 책이 ‘노동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나는 유용주의 독자였다. 자전소설이기도 한 이 책의 작가는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 부모·가족과 헤어져 온갖 노동 현장을 전전한다. 작가는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을 증오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감싸 안는다. 한 소년의 성장을 노동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런 책은, 요즘 들어 점점 낯설고 귀한 것이 되어 간다. 진흙이 신발 밑창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이 삶의 체험에서 길어 올린 진득한 문장은 가히 일품이다.
3. 28. 유용주의 『마린을 찾아서』(한겨레신문사, 2001)를 읽다.
이 책이 ‘노동일기’라는 제목을 달고 <한겨레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나는 유용주의 독자였다. 자전소설이기도 한 이 책의 작가는 초등학교(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 부모?가족과 헤어져 온갖 노동 현장을 전전한다. 작가는 어린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을 증오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감싸 안는다. 한 소년의 성장을 노동의 시각으로 풀어낸 이런 책은, 요즘 들어 점점 낯설고 귀한 것이 되어 간다. 진흙이 신발 밑창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이 삶의 체험에서 길어 올린 진득한 문장은 가히 일품이다.
책 제목에 나오는 ‘마린’은 매일 가게 앞을 지나가던 여대생에게 작가가 몰래 붙여 준 별칭이다. 유용주는 자신의 신분으로는 도저히 여대생과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비탄에 빠진다. 항상 자랑스럽게 여겨 왔던 노동자의 자긍심이 한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유용주는 여대생과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야학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게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된다.
하지만 그에겐 인생의 전환점과 성장의 순간이 함께 왔다. 첫 번째 국어 수업 시간에 윤동주의 ‘서시’를 읽고, 못 배우고 가난한 이웃과 노동자들의 삶을 정직하게 기록하는 시인이 될 것을 결심한다(“건강하고 튼튼한 시인”, p.162). “내 운명은 정동교회 배움의 집 첫 국어 수업 시간에 결정이 났다”(p.161)라고 말했던 열여덟 살 때, 그는 성장의 광맥을 움켜쥔 것이다. 요즘은 유용주 작가처럼 초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생활 전선에 투입되는 청소년이 많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새로운 독자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학교는 교과를 중심으로 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는 능하지만, 삶에 대해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는 삶을 신비화하고 은폐하면서, 신분 상승 혹은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우선 교과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다그친다. 학교가 삶에 대해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은 삶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삶에 대한 두려움을 키워 간다.
그런데 유용주의 이 책은, 어울려 사는 것이 삶이며 또 노동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가르쳐 줌으로써 학생들의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덜어 준다. 어울려 살며 노동하는 삶! 이게 ‘삶의 정면’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같은 작가의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솔, 2002)도 읽었으나, 나는 그 책으로부터는 아무런 감동을 받지 못했다. 나의 개인주의는 유용주 주변 시인들의 끈적한 연대를 낯설어한다. 다름으로써 증명되는 모더니스트의 삶과 문학이, ‘함께, 똑같이’라는 민중주의자들의 삶과 문학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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