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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더 젊어져서 돌아올게!' 귓가에 울리는 그 말!

귓가에 울리는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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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이 문장이다.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인 조제는 드디어 첫 애인 츠네오를 만나 동물원에 간다.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마당의 포도 넝쿨에서 쐐기가 툭 떨어지던 날,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 어린 날부터 시작된다. 그 어린 날엔 모든 것이 하늘에서 온다고 생각했었다. 비와 구름과 천둥 번개와 물고기와 눈물까지도. 그러니까 해를 보면 눈물이 나는 거라고 생각했었다.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서경식의 『소년의 눈물』의 이 문장과 너무나 비슷한 밤들이 떠오른다.

“우리 세 형제들은 커다란 이불 한 채를 함께 덮고 잤다. 여름이면 파란 모기장을 쳤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 작은 형은 내가 잠들 때까지 동서고금의 재미있고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보물섬』『몬테크리스토 백작』『철가면』 등. 작은 형의 이야기보따리는 아무리 길어 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과 같았다. 『15소년 표류기』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주인공 소년인 잭과 나 자신을 동일시해버렸다. 슬라우기호를 묶어둔 밧줄을 장난삼아 푸는 바람에 고난의 원인을 제공하게 된 소년 잭은 가책을 느껴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마침내 형 브리앙에게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브리앙은 동생의 허물을 보상하기 위해 자신과 동생 둘 모두에게 더더욱 자기희생적인 임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어린 마음에 우리 형제도 저들 같았으면 하고 간절히 소망했다.”

여름 모기장 안에서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키다리 아저씨』를 읽고 난 후로는 “아저씬 도대체 생각이 있는 분이세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열일곱 가지나 보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든가 “아저씨께 네 잎 클로버를 보내요”라든가 “수영 선생님은 제 허리띠 뒤쪽에 있는 고리에 밧줄을 걸어서 천장에 있는 도르래에 연결해 놓았어요”라든가 이런 문장을 보면서 나 역시 daddy-long-legs를 한 명 갖는다면 나도 쓸모 있는 인간이 될 텐데 라고 생각했었다. 여름 모기장 안에서 내가 읽은 책들로는 소공녀 세라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구박받는 소공녀 세라의 운명을 생각하고는 잠들어 있는 우리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식구들이 깰까 봐 숨죽여 혼자 울던 생각이 난다. 입술을 깨물면서 현실보다 더 리얼한 상상 때문에 고통받았었다.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스티븐 킹이 『사계 3편 자각의 가을』에서 쓴 이 문장이 떠오른다.

“1960년의 여름. 여름이란 언제나 주머니에선 동전들이 짤랑거리고 기온은 즐거운 화씨 구십 도 대에 있고 발에는 케즈 운동화를 신고 플로리다 마켓을 향해 길을 내려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로빈 루크가 수지 달링을 부르던 해, 굉장히 여름이 오래가던 해, 어느 아이가 늦은 저녁 식사를 위해 집으로 페달을 밟아갈 때 그의 자전거 살에서 따르륵거리는 기관총의 소음 같은 소리가 나던 해, 그리고 새로 깎은 잔디의 냄새에 뒤섞인 야구경기 해설 아나운서의 소리, ‘볼 카운트는 쓰리 투.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흔듭니다. 던집니다. 아 날아갑니다! 테드 윌리엄스가 그 볼을 힘껏 쳐냅니다. 굿바이 홈런입니다! 레드 삭스가 3대 1로 앞서갑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나는 마르고 상처 딱지투성이인 옛날의 그 소년이 이 나이 든 사람의 몸속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으며 그 소리도 들을 수 있다. 그 시절 최고의 기억은, 주머니 속에는 잔돈을 넣고 등허리에서는 땀이 흘러내리는 상태로 그 길을 달려 내려가 마켓으로 향하던 모습이다 ”

이 글은 나중에 <스탠 바이 미stand by me>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난 이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중 하나로 꼽는다. 이 글은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다!’라는 걸 알려주는 글이다. 이 글 속의 소년의 이미지는 ‘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고 고통스럽게 남몰래 묻는 모습이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과 폭력이 일상적인 소도시의 먼지 자욱한 여름 햇살 뒤에 서 있는 희망 없는 소년의 심장에는 그 질문이 숨어 있었다. ‘나,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여름 햇볕에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 서서 이 질문을 던져보고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사거리의 신호등을 불안하게 살펴보던 순간이 있었던 사람은 알 거다. 가장 중요한 일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법이라는 걸.

또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의 이 문장이다.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인 조제는 드디어 첫 애인 츠네오를 만나 동물원에 간다.

“조제는 호랑이를 보고 싶다고 했다. 츠네오는 맹수 우리 쪽으로 휠체어를 밀고 갔다. 억제된 흉포한 힘을 느끼게 하는 호랑이의 광기 어린 노란 눈이 이쪽을 향하자 조제는 무서운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랑이는 어슬렁거리며 우리 안을 오가다가 갑자기 조제 앞에 우뚝 멈춰 섰다. 노랑과 검정이 만들어낸 강렬한 얼룩무늬가 움직일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조제는 호랑이의 포효에 기절할 만큼 놀라 츠네오의 옷자락을 잡는다.

-꿈에 나오면 어떡해.
-그렇게 무서워하면서 보긴 왜 봐.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걸 보고 싶었어.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을 때, 무서워도 안길 수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호랑이를 보겠다고. 만일 그런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평생 진짜 호랑이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에게 여름은 진짜 좋아하는 남자하고만 공포영화를 보러 갈 거라 결심하면서 모든 납량 특집물 관람을 거부하는 계절이었다. 사랑이 없다면 드라큘라 성에서 탈출하는 방법 따위는 몰라도 아무 상관없다면서.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북부 이탈리아 토스카나를 터벅터벅 걷는 소년이다. 그는 걷다가 종종 하늘을 바라본다.

“네가 커서 무엇이 되겠니? 학교를 그만두고 나가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다’라는 등의 폭언을 들으며 낙담했던 아인슈타인은 정말로 학교를 그만두고 토스카나를 여행하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빛의 속도로 이동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몸이 허약했던 나는 종종 조퇴를 했다. 한가한 소도시 여자 고등학교 뒤 돌담길을 따라 집에 돌아오다 보면 시간은 너무나 느리고 뜨겁게 흘렀었다. 그때 나도 어렴풋이 깨달은 것 같다. 시간은 상대적이란 걸. 그때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걷다가 돌담의 바위에 다리가 찢어졌었는데 그 끝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바위에는 오랫동안 내 피가 남아 있었다는 전설이 우리 가문에 전해진다.

어느 해 불볕더위가 오기 직전, 내가 속해 있는 <전 세계 맥주 다 마셔보기 자매 클럽>의 객원 멤버인, 키높이 구두를 신고 다니는 더할 나위 없이 섬세한 친구 한 명이 회사에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신은 곧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을 것이며 자신은 더 젊어져서 돌아올 것이라고, 일찍 온 가을바람처럼 청량하게 말해버렸다. ‘나, 더 젊어져서 돌아올게!’ 귓가에 울리는 아름답고 매혹적인 이 말은 다름 아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따른 것이다. 칼 세이건은 젊어지는 방법에 대해 『코스모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여행을 하면 당신은 나이를 거의 먹지 않지만 당신의 친구나 친척들은 여전히 늙어간다. 당신이 상대론적인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친구들은 몇십 년씩 늙어있겠지만 당신은 전혀 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빛의 속도로 여행한다는 것은 일종의 불로장수의 영약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특수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일 때 시간의 흐림이 지연된다. 그 까닭에 우주여행을 하는 사람은 늙지 않으면서도 다른 별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내 친구는 ‘멋진 여자는 모두 캘리포니아 걸!’이라 노래를 부르며 빛의 속도로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렸다. 난 친구를 생각하면 여름 햇살 아래 부서지던 깔깔깔 웃음소리와 너무나 정성스럽게 맥주를 따라주던 손길과 비치보이스의 ‘캘리포니아 걸스’가 끝없이 나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생각이 난다. 그날 우리는 (생각의 속도가 아니라, 즉 생각할 겨를도 없이) 빛의 속도로 여행 갈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에 대해 저마다의 한없는 이야기를 품고 헤어졌었던가? 빛의 속도로 달려가서 우리를 영원히 젊게 만들어줄 그곳은 어디인가? 이미 우리 안에 갖고 있는가? 빛의 속도로 여행하면 유월의 여름밤에 포도나무 아래 서 있던 그 시절을 찾게 되나? 장맛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창가에 버릇없이 다리를 올려놓고 있던 그 시절을 찾게 되나? 언제 생각해도 나를 미소 짓게 하는 그 시절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게 우리에겐 우주여행과도 같은 빛의 속도 여행일까?

마치 태양이 두 개나 있는 쌍성계처럼 밤이란 없을 것 같은, 상상 속의 그 도시에서 친구가 어느 날 돌아온다면 나는 이 시를 선물할 것이다.

“예전에 빛남이란 이름을 가진 앳된 처녀가 있었지요.
빛보다 훨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
어느 날 처녀가 출발하였답니다.
상대성의 방식으로 말예요.
그랬더니 떠난 전날 밤에 돌아왔지 뭡니까.”
(『지식의 원전』)

친구가 돌아오는 날은 우리 모두에게 친구가 떠나기 전날 밤이 되는 것이다.

그 뒤로 나에게 여름이라 하면 ‘빛의 속도 여행’의 계절이다. 별을 무척 사랑한 나머지 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사람처럼, 빛을 사랑하고 나면 세월이 흘러감과 헤어짐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랐다.

어느 잠들지 못하는 눅눅하고 후텁지근한 여름밤에 베란다에 나가 하늘을 보다가 만물 중 사람만이 자신의 시선을 하늘로 향할 수 있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로 사람만이 빛의 속도로 여행할 자기만의 목적지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곳에서 나를 잃으면 다른 곳에서 자신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만이 자신을 격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객관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각자의 내면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의 시대에서 지치지 않고 살기 위해 가끔 과거를 현재로 돌려봐야 하기 때문이다.

아! 갑자기 생각나는 한 문장 더!

“순백색 줄무늬를 가진 청록색의 커다란 네발나비가 내려앉아 날개를 오므릴 때 몸 아래쪽 빛깔과 어울리는 기름진 찰흙 위를 활강하여 낮게 선회하는 것을 유월 셋째 주에 볼 수 있으리라 확신하였다. 그해 여름 나는 달이 뜨지 않는 밤이면 공원의 숲 속 빈터에 침대보를 펼쳐놓고 아세틸렌 램프(6년 후 첫사랑 타마라에게 빛을 비추게 될)로 침대보에 빛을 비춰가며 열심히 나방들을 채집했다. 내 소년기의 검은 보석들인 박각시나방들에 대해서도 기억을 되살려보겠다. 유월의 저녁 빛깔들은 오랫동안 죽어 있었다. 포충망을 손에 들고 서 있던 내 앞에 만개한 라일락 관목들이 가벼운 회색빛 꽃송이들을 과시하고 있었다. 축축한 초저녁달이 이웃한 목장의 안개 위에 걸려있었다. 이후에 수많은 화원에서 그렇게 서 있어 봤지만 저 어두움이 번지는 라일락 나무들 앞에서처럼 그렇게 강렬한 욕망을 가지고 기다렸던 적은 없었다.”

이건 롤리타의 작가 블라드미르 나보코프의 빛의 속도 여행이다. 『지식의 원전』에서 이 문장을 발견한 뒤 나는 『나보코프 블루스』라는 나보코프의 나비책을 사버렸다. 틀림없이 빛나는 책일 것이라 생각하면서. 나보코프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간을 믿지 않는다. 단지 마법 양탄자를 겹쳐놓기를 좋아할 뿐이다.” 나보코프에게 시간은 겹쳐진 마법 양탄자였다면 그에게 남은 문제는 날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아주 젊고 생기 있는 영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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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혜윤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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