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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오밍의 사랑, <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마운틴>은 인습의 울타리가 커다란 어떤 사회에서든 어떤 형태로 벌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사랑은 계산할 것도 없고 계산 같은 것은 할 줄도 모르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와이오밍의 사랑
몇 년 전에 <번지 점프를 하다>를 극장에서 볼 때의 일이다. 영화의 마무리 부분에서 주인공들이 줄 없는 번지 점프를 통해 사랑을 완성했다는 결말이 은근히 제시될 때, 극장의 맨 뒤쯤 앉은 남자가 대뜸 큰소리로 떠들었다.
“뭐야! 재수 없게 사내놈들끼리!!”
그랬다. <번지 점프를 하다>의 두 주인공 인우와 (남학생으로 환생한) 태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자신들만의 사랑을 완성한다. 하지만 <번지 점프를 하다>를 그 투덜이 관객처럼 단순히 퀴어 영화의 아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엄연히 불교의 ‘윤회관’을 세계관으로 삼은 <번지 점프를 하다>가 보여주고자 한 것은 ‘동성애’가 아니라 죽음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 ‘사랑’이란 달콤한 동시에 씁쓸하며, 거부하고 싶지만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그 투덜이 관객은 분명 영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고 그런 발작적인 언사로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글쎄,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그런 그가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다면 어땠을까?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노인 회원들의 반대(유명 배우 출신의 토니 커티스는 노골적으로 표를 던지지 않았다고 말했다)로 오스카 작품상을 놓친 <브로크백 마운틴>은 메이저 영화로는 꽤 노골적인 동성애 표현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주요 테마 자체가 ‘두 남자의 사랑’이다. 하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을 단순히 ‘남자들의 사랑’에 국한된 이야기로 파악한다면 그것 역시 오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인습의 울타리가 커다란 어떤 사회에서든 어떤 형태로 벌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슴이 찢겨 나갈 것 같은 사랑은 계산할 것도 없고 계산 같은 것은 할 줄도 모르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진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이 되는 ‘와이오밍’이라는 고장은 그런 커다란 인습의 울타리가 처져 있으며 그토록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절절한 것은 그 고장에 쌓인 끝없는 외로움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 애니 프루는 그의 단편집 가운데 「와이오밍의 주지사들」에서 와이오밍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넓디넓은 고물수거장에서 사그라드는 케이브 걸치의 불기둥, 정제소, 개발 지역, 우라늄 광산, 석탄 광산, 트로나 광산, 펌프와 굴착기, 개벌지, 석유탱크, 오염된 강, 수도관, 메탄올 제조공장, 파멸을 부르는 댐, 아모코 석유회사가 만들어놓은 난장판, 철로. 겉으론 텅 빈 듯한 풍경으로 감춰진 이 모든 것을. 이번이 첫 방문은 아니었다. 와이오밍 주 정부가 연방정부로부터 광물 로열티 명목으로 받는 거저먹기식 수입, 퇴직 급여 및 종가세(從價稅), 그리고 컨트리 음악 스타들이 사들인 대목장과 비현실적인 카우보이 익살극에나 나올 법한 행동을 하는 각양각색의 억만장자, 머리 있고 재능 있는 인재들의 흡출 현상, 그리고 보통 사람들은 이동식 트레일러 주택에서 실업자로 살아간다는 사실, 이 모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브로크백 마운틴』 중 「와이오밍의 주지사들」, 261쪽)
와이오밍을 배경으로 한 애니 프루의 단편에는 온통 비릿한 삶과 고독 그리고 꿈틀거리는 욕망의 냄새가 진동한다. 미국의 중서부에 있는 와이오밍은 미국에서 9번째 크기의 주(州)지만 인구는 50만 명 정도에 불과하다. 당연히 사람은 적고 고독은 일상화된다. 가난한 농장의 자식들은 교육과 교양 대신 억센 성품과 편협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서부를 누볐던 카우보이의 후예들은 어느새 일자리도 별로 없는 동네에서 자신들의 욕망을 저 밑바닥으로 구겨 놓고 힘겹게 삶을 이어간다. 그들은 표현에 서툴며 다혈질에다 충동적이다.
사실 애니 프루의 소설에 그려진 와이오밍 속의 인간들은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완고하고 쉽게 잔혹해질 정도로 미련하다. 그들은,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비참한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격의 대상을 주위에서 찾으며 자신들의 세계가 전부인 양 생각하는 ‘우물 안 개구리’들이다. 플라톤의 ‘동굴의 우상’에 묘사된 것처럼, 그들은 ‘와이오밍’이라는 동굴 안에서 바라본 진리의 그림자가 인생의 전부라 믿으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다.
애니 프루의 원작 소설을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브로크백 마운틴」은 우리말 번역본으로 40여 쪽, 영문판으로 30여 쪽의 단편 소설에 불과하다. 프루는 그 짧은 페이지를 꼭꼭 채워 20년의 세월을 압축해 놓았다. 꽉 짜인 문장 안에서 프루는 억눌린 슬픔과 사랑을 담아냈다.
찢어질 정도로 아프면서도 금욕적인 프루의 단편 소설 「브로크백 마운틴」이 이안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 것은 커다란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안은 이미 <아이스 스톰>(1997)을 통해 70년대를 관통하는 미국 중산층 가정의 파산을 그 어떤 미국 감독보다 뛰어나게 묘사하며 인간 내면의 깊은 상처를 담아내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아이스 스톰>의 배우들은 자신들이 출연한 다른 어떤 영화보다 뛰어난 연기를 보였고 그건 <브로크백 마운틴>의 젊은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그뿐만 아니라 이안은 대만 시절 만든 자신의 출세작 <결혼피로연>(1993)을 통해 동성애와 이성애의 문제를 대만의 전통적인 대가족 시스템과 결부시켜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바 있지 않은가?)
그래서 과묵한 캐릭터들이 지배하는 <브로크백 마운틴>은 가슴 깊숙이 담겨 있는 내밀한 정서가 깊게 배어 나오는 영화다. 브로크백 산에서 맺어진 젊은 남자들은 그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신들의 사랑을 깊숙이 묻어놓고 스스로 고립시켜 나가는 사람들이다. 아니, 그건 그들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숙명에 가깝다.
이안은 <브로크백 마운틴>을 <와호장룡>(2003)처럼 그려냈다. <와호장룡>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등장인물은 타인에게 자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서툴거나 너무 늦는다. <와호장룡>의 리무바이(주윤발)는 깊은 도(道)를 수행한 사람이지만 우연히 닥친 죽음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랑이 가까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건 리무바이를 오랫동안 기다리기만 하는 수련(양자경)이나 부모와 같은 사랑의 의미를 파멸 후에야 깨닫는 용(장지이)도 마찬가지다. 이안은 <와호장룡>에서 결코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로맨틱한 이안은 깊은 이해의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건 <브로크백 마운틴>도 마찬가지다. 20여 년간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에니스 델 마(히스 레저)와 잭 트위스트(제이크 질렌홀)는 세상과 소통하지 못한다. 그들은 사랑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미궁 안을 헤매기만 한다. 깊은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건만 이들의 사랑이 이해받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애절함은 그 사랑이 ‘남자들끼리의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물들의 내면과 외면에서 억압하고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안의 뛰어난 것은 심장이 부서져 돌처럼 굳어버린 캐릭터들의 심상을 탁월하게 담아낼 뿐 아니라 그들의 주변에서 같이 무너져 버리는 가족의 모습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에니스의 부인 앨마(미쉘 윌리엄스)는 에니스의 진짜 사랑의 실체를 발견하고 깊은 상처를 받는다. 이혼 후에도 에니스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앨마는 말하지 않아야 할 말로 에니스에게 가혹한 고통을 안기지만 앨마 스스로 오랜 시간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기에 설득력이 있다. 그건 앨마의 뒤를 이어 에니스와 사귀는 캐시에게 이어진다. 자신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 그녀들은 서서히 붕괴해 버린다. 그건 점점 ‘돈 귀신’이 되어가는 잭의 부인 로린(앤 헤서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원작 소설에서 에니스에게 잭의 소식을 차갑게 전하며 ‘눈보다 더 차가운 여자’로 묘사되는 그녀는, 영화에서는 에니스와 통화를 하며 눈물을 보이고 (소설과 달리) 동정을 받을 기회를 얻는다. 그녀 역시 잭의 진짜 사랑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었고 그 사실을 애써 부인하고 있었다.
애니스와 잭의 사랑은 환희보다는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찬란하게 아름답다. 9살 때 (남자들끼리 산다는 이유로) 타이어 레버로 성기가 뽑혀 죽은 사람을 목격한 에니스에게 동성애란 절?적 금기 사항이다. 당연히 냉정함을 유지하려는 에니스와의 사랑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하는 잭의 삶 역시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의 사랑이 서서히 무너지는 동안 그들의 가정도 서서히 붕괴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안은 20년간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남자들의 사랑을 ‘숭고함’으로 치장하지 않는다. 에니스는 잭과의 사랑과 자신의 본래 정체성(이성애자)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는 이혼 소식을 듣고 14시간을 달려 찾아온 잭을 내몰고 새로운 여성과 데이트한다. 잭 역시 남창을 찾아 멕시코로 가고 새로운 연인을 찾아 나선다. 더구나 그들의 사랑은 평등하지도 않다. 늘 잭은 장시간 운전을 해서 에니스를 찾아온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런 평등의 개념을 가볍게 넘어서 버린다.
이안은 원작 소설이 지닌 과묵한 카우보이들의 정서를 전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시에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 와이오밍을 배경으로(사실 이 영화는 캐나다에서 촬영되었다) 이어지는 이 영화의 금지된 사랑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짐에도 불안하기 이를 데 없다. 그들의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안감은 서로 벽으로 밀어붙이는 격렬한 키스처럼 충돌을 낳고, 남자와 남자가 만났을 때 취할 수밖에 없는 후배위의 체위처럼 마주볼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사랑처럼, 다른 이들처럼, 그들의 충돌은 차가운 와이오밍의 대자연 속에 녹아들어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정을 유지하고 있는) 잭이 가정으로부터 탈출하려고 하는 데 비해 (이혼으로 가정을 잃어버린) 에니스는 애써 찌꺼기만 남은 가정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둘의 사랑이 정말 비극적인 것은 그 둘이 이미 파멸적인 사랑의 길에 접어들었고 그들이 결코 (이해받지 못할 사회로) 귀환할 수 없다는 점이다.
패배자의 정서가 가득 담긴 애니 프루의 소설에 비해 에니스와 딸들과의 관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이 담긴 이안의 영화는 한결 따뜻하다. 하지만 느린 호흡으로 캐릭터들을 어루만지듯 응시하는 영화는 보이는 것 이상의 감성을 가득 담아 오래간만에 깊은 사랑의 상처를 체감하게 한다. 이안은 빠른 편집이 지배하고 화려한 스펙터클로 필름을 가득 메우려는 시대에 인간의 감정을 담아내는 몇 안 되는 영화 작가다. 그리고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증거다.
★★★★
메뉴 화면
1.85:1 비율의 영상은 최신작다운 준수한 영상을 선보인다. 잡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전반부 브로크백 산에서의 밝은 장면들은 그 웅장한 아름다움을 즐기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의 칼 같은 영상을 선보이는 블록버스터급 타이틀에 비해 세밀한 표현력은 조금 떨어져 보이며 밤 장면의 표현력 역시 고해상도 디스플레이에서는 약간의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전체적인 감상에는 큰 문제가 없을 정도.
★★★☆
영어 5.1 채널을 지원하는 음향 역시 준수한 수준이다. 초반부 차량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음장감이 비교적 잘 살아 있고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구스타보 산타올랄라의 섬세한 기타 사운드의 표현 역시 부드럽게 전해진다. 섬세한 사운드의 표현 역시 깔끔하게 잘 살아있는 편이다.
★★★☆
On Being Cowboy (05:44)
영화를 위해 카우보이 훈련을 받아야 했던 세 배우에 관한 간략한 영상물이다. 스턴트 코디네이터와 카우보이 훈련 코치들이 등장해 훌륭히 참여해 준 배우들에게 칭찬을 하는 메뉴로 일부 훈련 장면도 담고 있다. 호주 출신의 히스 레저는 어릴 적부터 목장에서 자라 말을 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으며 앤 헤서웨이 역시 말을 탈 줄 알았다고 한다. 다만 로데오 선수로 등장하는 제이크 질렌홀은 도시 출신으로 한 달간 새로운 훈련을 통해 목동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Directing The Heart : Ang Lee
(07:27)
이안 감독이 연출을 맡게 된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와 이안의 연출에 대해 출연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칭찬 릴레이를 하는 메뉴. 대작(<헐크>)를 연출한 후 영화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을 이안 감독으로부터 직접 들어볼 수 있다. “믿음이 있었다”, “자상하다” 등으로 이어지는 칭찬 릴레이는 “신비롭다” 등으로까지 이어진다.
From Script to Screen : Interview with Larry McMurtry & Diana Ossana (10: 53)
금년도 오스카를 수상했던 각색자 래리 맥머티와 다이아나 오사나의 인터뷰 클립이다. 소설이 처음 소개된 잡지 <뉴요커>를 보고 다이아나 오사나가 감동하여 래리 맥머티에게 읽어보라고 권했고 두 사람이 각색 작업을 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 들어볼 수 있다. 조역으로 참여한 랜디 퀘이드와 제작자 제임스 슈마스의 인터뷰도 수록되어 있다.
Sharing The Story : The Making of Brokeback Mountain (20:47)
본격적인 메이킹 필름이라기보다는 흥미 중심의 TV용 영화 소개 클립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두 남자의 키스신이라든가 양떼나 곰이 말을 안 들어 힘들었다는 등의 ‘연예가 중계’ 스타일의 내용을 통해 영화에 대해 안내하고 있다. 가볍게 볼 정도의 내용으로 빠른 내레이션과 편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품의 무게에 비해 서플먼트의 양과 질이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하지만 초회 한정판에 제공되는 원작 소설은 서플먼트의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줄 만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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