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출근합니다."
노래를 만들기 위해 작업실에 가든, 첫 책을 홍보하기 위한 인터뷰 촬영을 하러 가든, 싱어송라이터 안예은은 늘 '출근'이라는 말을 쓴다. 일은 일답게, 나를 제외한 타인은 '선생님'으로 존중하고 자신을 돌보며 일하기 위해서다. 에세이 『안 일한 하루』는 그가 '일하는 안예은'과 '안 일하는 안예은' 사이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늠름하게 자신을 다져온 기록이다.
오랫동안 꿈꿔온 첫 책
책 출간이 오랜 꿈이었다고요.
솔직히 아직 실감이 안 나요. 청소년기에 이적 선생님의 『지문사냥꾼』을 보고 '와, 나도 이런 책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앨범을 낼 때는 늘 하던 일이니 거리를 둘 수 있는데, 책은 정말 달라요. 꿈꾸던 일이 이루어진 기분이에요.
음악과 달리 에세이는 비유 없이 나를 보여줘야 하는 장르잖아요. 걱정은 없었나요?
사실 걱정을 많이 했어요. 책에 우울증과 무대 공포증처럼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담았잖아요. 시행착오를 겪으며 저만의 방법을 찾은 건데, 혹시라도 독자분들이 '나는 왜 안예은처럼 안돼?'라고 자책을 할까봐 마음을 졸였죠. 얼마나 걱정했냐면 곳곳에 '사람 사는 게 다 다르고 이건 그냥 하나의 방법이에요'라고 쓸 정도였어요. 다행히 편집자님이 충분히 잘 전달되고 있다고 격려해 주셨어요.
글쓰기는 원래 좋아했나요?
전혀요(웃음). 일기도 잘 안 쓰는 편이에요. 소설은 많이 읽지만, 유독 안 읽는 장르가 에세이기도 하고요. 마침 친구가 이경미 감독님의 에세이 『잘돼가? 무엇이든』을 추천해줘서 읽었는데 너무 재밌는 거예요. 이렇게 유쾌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죠.
추천사가 특별했어요. 예은 님의 선천성 심장 질환을 치료한 박영환 세브란스 심장혈관 병원장님이 직접 써주셨더라고요.
추천사를 받고 정말 놀랐어요. 제가 그 분의 입장이었으면 '내가 수술을 해서 이렇게 잘 되다니 뿌듯하다'고 썼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너무 담백하게 깊은 의미를 담아주신 거예요. 병원장님이 은퇴하실 무렵, 제가 "사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연락을 드렸어요. 그런데 "난 수술을 했을 뿐, 예은 씨가 헤쳐나간 세상이니 즐기면서 살아요" 그러시는 거예요. 와, 이렇게 무게감 있는 말을 한마디로 할 수 있다니 충격을 받았어요. 그 말을 SNS에 올렸는데, 많은 분들이 용기를 얻으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추천사도 부탁드렸죠.
사실 가장 놀랐던 문장은 이거였어요. "나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 자신이 '연예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14쪽) 팬이 많은 예은 님이 그렇게 말하니 의외였어요.
누가 연예인이라고 알아봐주시면 정말 고마운 일인데도, 어딘가 고장이 나면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요.(웃음) 워낙 관심과 칭찬을 잘 받아들이는 성격이 못 돼요. 자연스럽게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는 게 제 꿈이기도 하거든요.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이야, 안예은!"하고 놀리면서도 제 성격을 잘 아니까 곁에서 걱정을 많이 해주죠.
심사위원들의 공통적인 평가가 "스타일이 독특하다"였죠. 그 이후로 쭉 "안예은이 곧 장르다", "독보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요. 부담을 느끼진 않았나요?
아직도 제가 특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나 고유한 개성을 갖고 있는데 굳이 '특이하다', '평범하다'를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나 다양한 음악가가 자신만의 색깔을 갖고 활동하고 있잖아요.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개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잖아요. 모두가 뚜렷한 캐릭터를 가질 필요는 없는데도요.
맞아요. '개성'은 고유한 성질일 뿐인데, 어느 순간 그 자체가 카테고리가 된 것 같아요. EBS <손수현 안예은의 이어달리기> 방송을 진행할 때 "취미도 없고 꿈도 없는데 괜찮을까요?"하는 사연을 자주 받았어요. 많은 청소년이 개성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으니까 진로를 찾을 때 고민하는 거죠. 그런데 정말 꿈이란 게 거창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나는 잠자는 게 좋으니까 폭신한 이불이 좋아'처럼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정말 좋아하는 것에서 출발했으면 해요.
기분 좋은 책임감이 찾아왔다
무조건 사람이 먼저 살아야 좋은 창작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저도 우울할 때 나오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했어요. 이게 없어져버리면 어떡하나 혼란스럽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치료 의지가 굉장히 강한 편이었고,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더라고요. 무엇을 하든 일단 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죠.
'몸'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어요. 뮤직비디오 '유(有)'를 찍을 때 몸의 흉터를 애써 감추지 않았죠. 영상 아래에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는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
정작 저는 몸의 흉터를 신경 쓰지 않고 살았어요. 청소년기에도 콤플렉스가 없었고 "그냥 이런 몸도 있다"하면서 드러내고 다녔거든요. 방송이나 화보 촬영을 할 때, 오히려 관계자분들이 "흉터 지울까요?" 물을 정도였어요. '유(有)' 뮤직비디오를 찍을 때는 그냥 지우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영상이 나간 후에 메시지를 엄청나게 받았어요. "저도 팔에 흉터가 있는데 예은 님을 보고 처음으로 민소매를 입었다"는 거예요. 누군가 저를 보고 그렇게 힘을 얻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그때부터 기분 좋은 책임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최근에 운동을 시작했다고요. 아까 촬영할 때 보니 자세가 굉장히 바르더라고요.
전에는 어깨를 이렇게 움츠리고 다녔거든요. 그런데 운동을 하고 나서 자세가 확 펴졌어요. 노래를 부를 때도 '아 근육의 이 부분에 힘이 들어가는구나' 새롭게 느껴지고요. 에세이에도 썼지만 저도 다른 여성분들과 마찬가지로 외모 강박에 시달렸어요. 대학생 때, 지금보다 5kg이 덜 나갔는데도 제가 뚱뚱하다 생각하고 살았죠. 지금은 '그냥 살자'고 생각해요. 억지로 '난 살이 쪄도 사랑스러워'하기보다 '그냥 살이 조금 붙었네'하고 넘어가는 거죠. 그러고 나니 저를 위한 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안예은의 노래들은 늘 고유한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어요. '창귀'가 주인공인 호러송도 있고, <섬에서>, <섬으로>처럼 연작 판타지소설을 읽는 듯 구성된 앨범도 있죠.
저는 최대한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창작자의 가치관이 들어간다는 걸 앨범 <섬에서>와 <섬으로> 작업을 할 때 처음 느꼈어요. 비슷한 설정이라도 자유 의지에 맡겨놓는 방식으로 세계관이 만들어져요. 또, 팬분들이 제 호러송을 듣고 "주인공이 인간이 아니라 창귀나 쥐처럼 멸시받고 하찮은 존재들이 목소리를 내는 게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아, 정말 그러네 했죠.
호러송 '창귀'를 발매한 후, 자신의 곡을 직접 해설하는 영상을 찍으셨어요. 정말 많은 자료를 참고하며 가사를 쓰시더라고요.
테마 하나를 정하면 최대한 자료를 많이 찾아봐요. 이 설화가 옛날에 어떻게 해석됐는지, 어떤 식으로 미디어에 노출이 되었는지요. 제가 철저한 고증을 좋아해서, 편곡자 친구들도 알아서 다 준비를 해요. "얘들아, 창귀 설화가 이런데 약간 굿판 느낌이 났으면 좋겠어"라고 설명하니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옛날 악기들을 찾아서 실제 굿판에서 쓰는 리듬을 다 녹음해 놨더라고요. 심지어 '창귀' 마지막에 남성 합창단 목소리가 나오는데, 이거 서양풍인데 넣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끝까지 고민했어요. 결국, "이건 대충 퉁치자"하고 넣었죠.(웃음)
곡을 쓸 때, 의도적으로 모호한 부분을 남긴다고 하셨어요. 상상 속의 이야기를 만들어 놓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떡밥'을 숨기는 느낌이라고요.
무엇보다 제 음악을 듣는 분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팬분들이 제가 생각지도 못한 멋있는 해석을 많이 해주죠.(웃음)
'문어의 꿈' 비하인드 스토리도 재밌었어요. 비관적인 어조로 썼던 곡인데, 틱톡 유행을 타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사랑을 받았어요. 자신의 창작물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고요.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노래를 만들 때 정한 원칙이 있나요?
오히려 특별한 원칙이 없어진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저도 모르게 '어린이는 이런 노래를 들어야 해'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린이와 청소년이 우울한 '문어의 꿈'이나 살벌한 '창귀'를 좋아하는 걸 보고 내가 너무 틀에 박혀 있었구나 싶더라고요. 사실 어린이에게 유해한 것과 색깔이 강한 음악은 다른 것이잖아요. 제가 쓴 가사를 다시 봤는데, 그렇다고 직접적인 폭력이 노출된 내용은 아니더라고요. 지금은 미리 선을 그어놓지 말자고 생각해요.
스스로의 색깔을 만들어나가는 싱어송라이터지만 애니메이션, 뮤지컬 등 다른 창작물에 색을 덧입히는 활동도 하잖아요. 협업할 때의 안예은은 어떤 사람인가요?
개인 앨범은 제 색깔을 자유롭게 살리지만, 협업은 반대예요. 최대한 뭘 안 하려고 노력해요.
안예은에 대한 에세이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자주 등장하더라고요. 안예은에게 현실 감각을 부여하는 존재 같기도 했는데요.
정확하게 맞는 말 같아요. 친구들은 제가 멍 때리다 집에 가건, 혼자 무뚝뚝하게 대답하건 10년 동안 제 옆에 붙어 있어준 존재거든요. 같이 밴드 하는 친구들도 제가 한 푼도 못 받으며 공연할 때부터 쭉 함께하고 있고요.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고마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 에세이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 같아요.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하루
'일하는 하루'와 '안 일하는 하루'의 균형을 어떻게 맞추는지 궁금했어요.
쌓인 모든 업무를 끝내야만 완벽하게 스위치가 내려가는 스타일이에요. 3주간의 일정을 다 소화하거나 곡의 후반 작업이 딱 끝나면 마음이 진짜 편해지거든요. 그럴 때 집에서 밀린 영화를 보고 책도 읽죠. '덕질' 이야기를 많이 하니까 굉장히 폭넓게 즐길 것 같지만, 정작 덕질 하는 작품의 가짓수는 많지 않아요. 대신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거기서 못 빠져나오죠.(웃음)
책을 정말 좋아하시더라고요. 50권이 넘는 독서 리스트를 인증하고 책장에 900권이 넘는 책이 있을 정도로요. 근데 어린 시절에는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콤플렉스였다고 했어요.
저는 여자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은데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취미가 없어서, 남자인 친구들과 PC방에서 하루 종일 게임하는 아이였어요. 저도 모르게 털털하고 걸걸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예전만 해도 '책 읽는 여자아이'하면 모범생이고 정적일 것 같은 이미지가 있었잖아요. 그렇다 보니 아예 말을 안 했죠.
그럼 언제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게 됐어요?
마침 트위터에서 여성 작가의 책을 읽는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어요. 동참할 겸 여성 작가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그렇게 매년 읽은 책을 인증하게 됐죠.
'여성 작가 책 읽기 챌린지'를 올린 지도 벌써 4년이 넘었더라고요.
5년 전인가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가 여성이라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저도 모르게 '유명한 소설은 당연히 남자가 썼겠지' 생각한 거예요. 그걸 계기로 여성 작가가 쓴 고전 작품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재밌는데 불편한 지점이 없다는 게 무척 좋았어요.
SF 소설뿐만 아니라 로렐 켄달의 『무당, 여성, 신령들』부터 과학책까지 독서 리스트가 다양해요.
제 취향에 갇히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평소에는 대프니 듀 모리에나 옥타비아 버틀러의 작품처럼 어두운 SF, 스릴러 소설을 많이 읽어요.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리스트가 편중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 취향을 따라가면서도, 사이사이에 의외의 책을 끼워서 읽게 됐죠.
직접 쓴 동화와 짧은소설을 공개하기도 했어요. '소설가 안예은'을 기대해도 될까요?
소설을 쓰고 싶다는 꿈이 계속 있었어요. 그런데 긴 소설을 완성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고 느껴요. 가사는 은유적으로 써도 설정의 빈 부분을 청자들의 해석에 맡길 수 있거든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소설은 그게 안되는 것 같아요. 특히, 제가 좋아하는 장르가 SF니까 더 촘촘한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언젠가 소설은 꼭 써보고 싶네요.(웃음)
(장소 협조: 온더홀)
아마 살면서 작든 크든 많은 실패가, '내일의 내가 해주겠지' 식의 많은 회피가 작심삼일의 세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러면 어제의 실패가, 그제의 회피가 다른 과거들과 함께 지지 말라며 응원을 해주겠지. 미래와 과거,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이 지구 위에서, 나는 넘어져 깨져서 피가 맺힌 무릎을 하고도 어떻게든 버텨내겠다. 그 무엇도 슬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안예은 서사가 있는 가사와 독창적인 음악으로 사랑받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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