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성복 감독은 1990년대 대중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핑클, 젝스키스, 델리스파이스, 디제이 디오씨, 소찬휘, 쿨, 소향 등이 그의 손과 귀를 거쳐 갔다.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19년 동안 활동하며 엔지니어와 프로듀서로서 입지를 다졌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우송정보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대학원에서 MBA 과정을 취득하며 최근에는 '비욘드 뮤직'의 권리부문대표를 맡고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때 연주자를 꿈꿨던 그만의 새로운 연주 방식이다.
1990년대에서도 특히 댄스 음악으로 이름을 날렸던 변성복 엔지니어는 이 문법의 기준인 어스 윈드 앤 파이어의 'Boogie wonderland'를 듣고 음악의 흐름을 깨우쳤다. 당시 유행하던 정박 리듬이 아니고 뒤틀어 악센트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핑클 '내 남자 친구에게'가 그런 스타일이다. 베이스를 연주했던 경험 덕에 리듬감이 살아 있는 음악에 더 몸이 끌리고 귀가 트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변성복 감독은 리듬이 중요한 댄스 뮤직에 강했지만 항상 가수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으로 작업에 임했다. 보컬을 방해하는 것은 무조건 쳐냈다. 젝스키스 '커플'의 경우에도 반주의 코러스를 흑인 음악의 성지인 '모타운'에 맡겼는데, 그 화음이 정말 기가 막혔다고 한다. 그러나 노래와 각 보컬이 어우러지지 않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코러스를 낮췄다. 보컬, 킥과 베이스를 전체의 70~80%로 만드는 게 그의 팁이다.
스튜디오에서는 비싸고 좋은 스피커로 작업하지만, 소비 단계의 청취를 감안해 싼 장비로도 테스트를 진행한다. 약 25년 전만 해도 사운드의 중심은 클럽이었다. 비슷한 이유로 변성복 엔지니어도 음원을 발매하기 전 클럽의 디제이에게 요청해 미리 반응을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디제이들이 프로듀서를 하기도 했으니, 대중 반응도 보고 전문가의 견해도 듣는 일거양득의 기회였다.
변성복 감독의 취향도 시대의 기준을 따라갔다. 토토
그는 교편을 잡았을 때도 학생들에게 포 리듬(음악의 기본적인 구성, 기타-베이스-건반-드럼)이 유려하게 정리돼 있는
인터뷰 현장에 도착했을 때 <꽃보다 남자>, <주군의 태양> 등으로 유명한 오준성 음악 감독도 함께 자리에 있었다. 보통은 1시간~1시간 반을 인터뷰로 할애하지만, 이들과 잠시 있었던 음악 얘기만으로도 아이스 브레이킹은 30분을 훌쩍 넘겼다. 작곡가, 엔지니어, 평론가, 음악계 거장들이 한자리에서 나누는 대담만으로도 분위기는 이미 완벽했다.
오랫동안 우송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그만두신 걸로 알고 있다. 그 이후 '비욘드 뮤직' 활동에 대해 설명해주시면 고맙겠다.
박근태 작곡가의 추천으로 비욘드 뮤직에 참여하여 음악 인접권, 계약 관련된 권리대표직을 맡고 있다. 설립된 지 1년 만에 LF그룹 계열사 KNC 및 FNC 인베스트먼트 외 다양한 장르의 2만여 곡의 저작권과 인접권 등을 확보하고, 현재 국내 최대의 운용 자금 규모의 음악 IP 전문 투자사로 성장하였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음향 콘솔을 만지는 엔지니어의 꿈을 키웠나?
베이스 연주자가 꿈이었지만 20대부터 친한 동료인 밴드 송골매의 이태윤 베이시스트를 보고 한계를 많이 느꼈다. 마장동 스튜디오의 박영호 기사와 베이스 세션으로 처음 녹음을 한 적이 있는데 녹음 환경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처음 녹음실에 갔더니 정말 그곳이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절 유행했던 영화 <스타워즈> 우주선 조종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멋진 모습 속에 처음으로 '스튜디오 엔지니어'라는 직업의 매력을 알게 됐다.
원래는 사운드 엔지니어보다 음악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다. 이 분야에 대해 확신이 있었지만 당시에는 엔지니어나, 프로듀서가 되기 위한 왕도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일본에서 일하던 선배의 일본 유학 권유에 가벼운 마음으로 1988년에 치요다 예술대학을 가게 되었다. SSL사(Solid State Logic)의 콘솔이 두 대가 있었다는 이유가 그 학교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당대 국내 최고의 엔지니어들도 우리 학교에 견학을 왔었고 덕분에 당시 학생이었던 내가 안내하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 또 퓨전 재즈와 일본 사운드에 빠지게 됐다. 사실상 1980년대 한국과 일본은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우리는 가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면 일본은 재즈와 락 등의 연주 분야 외에 야마하, 롤랜드 등을 비롯한 수많은 음향 기기와 레코딩 기술의 발전도 대단했다.
카시오페아와 티스퀘어 등 일본의 퓨전 재즈 음악과 음향 기술의 발전상을 본 것이 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유학파 변성복 엔지니어의 음악 철학은 무엇인가?
좋은 음향이란 제작자, 연주자, 엔지니어가 교감을 하며 좋은 소리를 나쁘지 않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좋은 사운드는 개인 스포츠가 아니라 팀플레이다." 일본 유학 당시 교수님이 했던 말이다. 앞단이 망가진 상태에서 후단이 절대 잘 될 수 없다는 뜻으로 좋은 편곡, 좋은 연주와 좋은 레코딩, 그리고 후에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좋은 믹싱의 합이 절대적이다. 실제 음악을 하는 세션들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며 사운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실연자들과 내가 한 팀이 돼야 한다.
일본 대학교에는 음향 공학과와 음향 예술학과가 따로 있다. 공학과는 엔지니어링 등 기술적인 부분을, 예술학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MI(Musicians Institute)처럼 음향뿐 아니라 비즈니스도 배운다. 당시 이곳에 입학하면 연주는 필수고 한 학기 동안은 빅밴드 합주를 무조건해야 한다. 악기 소리를 직접 들어보고 화성을 알아야 엔지니어링도 할 수 있다는 방침이다. 나는 다행히 다양한 밴드 활동을 했고, 경찰대악대 출신이라 진행이 수월했다.
광화문 스튜디오 있을 때 그런 배움을 실천하셨던 것 같다.
그렇다. 광화문 스튜디오에서 19년 동안 일하며 1995년쯤 엔지니어치고는 빠르게 입봉을 했다. 사실은 그때 녹음실이 부도나서 당시 사장님께서 팔려고 했다. 그래도 녹음실 불을 꺼놓고 있으면 안 되니까 잠깐의 관리원 같은 느낌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바로 전에 있던 곳이 예음 스튜디오였는데 감사하게도 당시 함께 작업을 했던 많은 아티스트가 내가 광화문 스튜디오로 가자 따라서 찾아와 주었다.
DJ DOC, 쿨, 영턱스 클럽, 젝스키스, 핑클, 소찬휘, 김현정, 김경호, 유승준 등이 광화문 스튜디오에 오자마자 대박이 났다. 당시 광화문 스튜디오를 팔려고 내놓았는데, 앨범마다 잘되니까 사장님이 기계를 또 사주셨다. 나에게 오는 아티스트들은 보통 48개 트랙 레코더를 주로 썼는데 당시 광화문에서는 32트랙만 쓰다 보니 힘들게 녹음을 했다.
제한된 트랙 안에서 몰아서 해결해야 하기때문에 힘드셨겠다.
녹음을 받으면서 믹싱하기도 하고, 10개 악기를 2개 트랙으로 묶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스튜디오 간의 경쟁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강북의 맹주는 서울 스튜디오, 강남은 어디 어디라는 평판이 녹음실 주류를 결정지었던 시대였다. 아티스트들이 스튜디오를 왔다 갔다 할 때, 레코드테이프의 호환이 되는 곳으로 이동하기에 믹스를 위하여 마스터 테이프를 가져가는 건 일종의 패배라는 느낌을 받았던 시대였다. 그 경쟁을 조금씩 이겨나가면서 아티스트와 작품자들이 우리 광화문 스튜디오로 많이 오게 되었다.
그렇게 일이 잘되다 보니 엔지니어 입장에서는 적은 채널과 스튜디오 공간에 대한 압박이 컸다. 백지영 'Dash'를 예로 들면 브라스, 현, 기타, 바이올린, 타악기를 포함 채널이 200개가 넘었다. 당시 결정권자는 녹음이 채 끝나기 전에 "좋게만 해주세요"라는 말만 남기며 녹음실을 떠났고, 정리할 방법이 달리 없던 환경 속에 작품자의 허락 없이 채널을 많이 지우고 수정했다. 다행히도 직접 들어 보더니 너무 좋아했고, 나 자신 또한 만족했던 작업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로 참 많은 작품 문의가 왔지만 트랙과 음반 기획 구성 등에 구애받지 않고 녹음하기 위해 앨범을 기획하고 작품권자와 협의를 하는 결정권자, '프로듀서'가 되기로 결심했다.
음향계에도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이를 음악과 접목하면 그 가능성은 무한해진다. 거기에 개인의 노력까지 더한다면 어떨까. 변성복 감독은 실로 많은 업계를 누볐지만 아직도 꿈이 많다. 심지어 그 꿈이 현실로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거대하다. 그러나 80년대 유학길에 올라 90년대 음악과 음향의 불모지에서 K팝의 전신이라 할 댄스 뮤직을 꽃피웠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믿음이 넘친다.
음향 엔지니어가 되려면 어떤 자질과 조건이 있어야 할까?
지식, 경험, 태도 중 지식은 배우면 된다. 과거에는 지식이 고프고 기술과 능력이 공유가 안되는 시대였다. 지금은 지식이 널리 공유되는 시대임에도 경험 없이 지식으로만 성공하려 한다. 실패의 경험도 경험인데 요즘은 경험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일본 유학 여름방학 때 스튜디오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 자재실에서 종일 짐이나 몇 번 나르면 끝나던 잡일이었다. 월급도 없던 단순한 잡무라 다른 친구들은 금방 그만뒀는데, 나는 계속 출근했다. 그러다 여름 방학이 끝날 즈음 드디어 콜롬비아 레코드 사에서 어시스턴트 기회를 주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좋은 인상으로 인사를 잘했기 때문이다.
'지식과 능력보다 가장 중요한 건 애티튜드다'라는 숨겨진 뜻에 아주 공감한다.
맞다. 가장 중요한 건 '태도'다. 신입이 왔을 때 일을 잘한다는 걸 인정받아야 하는데 "그 사람 인사 잘해", "성실해", "밝아"라는 말이 돌면 다른 것도 잘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직업 세계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요즘은 이런 경험과 태도 없이 지식으로 끝을 보려고 한다.
이 인터뷰를 보게 될 후대의 엔지니어들을 위해 조언을 해주신다면?
반드시 함께 가야 하는 레코딩과 믹싱이 분리되고 있는 게 아쉽다. 디지털 음악에서 우리나라 엔지니어 능력은 세계 최고급이지만 밴드 쪽은 아니다. 밴드 음악의 엔지니어링이 잘 되려면 연주와 룸 사운드가 좋아야 하는데 스튜디오가 궁핍하다. 또, 샘플링이 강화되다 보니 기술은 없어지고, 이러다 과연 엔지니어의 영역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전에 녹음했던 인디 밴드 델리스파이스를 예로 들면 이 친구들은 드럼과 베이스를 따로 녹음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메트로놈에 연주하지도 못해서 원테이크로 녹음했다. 기대도 없었는데 시작하자마자 U2가 연주한 줄 알았다. 댄스를 많이 작업할 때라 그런지, 영화 <원스>의 한 장면을 경험 한 것 처럼, 그때 느꼈던 소름과 짜릿함은 정말 환상이었다. 밴드의 합이라는 게 정말 중요한데 이렇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던 당시의 녹음이 그립다.
우리 음악계에 대한 통렬한 일침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현실은 실제로도 별로 좋지 않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겠지만 요즘 실용 음악과에 신입생은 대부분이 보컬 전공이나 댄스와 MIDI(Musical Instrument Digital Interface) 전공들이고 순수한 연주 전공은 극소수인 경우가 다반사다. 밸런스가 맞지 않지만 드럼 학생 1명을 위해 교수 1명을 둘 수 없기에 점점 그 영역이 줄어들고 있다. 자원이 많은 곳에서 음악도 좋은 게 나온다. 연주자와 밴드의 음악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그들이 활성화될 수 있는 환경이 척박하다고 본다.
인터뷰를 정리하며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
미국에서는 엔지니어나 기술 스텝들도 예술가로 인정해주고 음악 관련된 학교를 도시 중심에 둔다. 마찬가지로 나 또한 그러한 기준을 가진 학교와 그들을 인정해주는 '한국의 그래미 어워드'를 만드는 목표로 나아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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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