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엄마가 미워진다』는 25년간 트라우마 치료에 매진해온 배재현 임상심리전문가가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린시절 부정적 경험(스몰 트라우마)’에 대해 이야기한 책이다. 스몰 트라우마란 성인으로서는 소소해 보일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상처로 남을 수 있는 일상의 경험을 말한다.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어떤 경험은 성인기에도 치명적인 상처가 된다. 특히 이 책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방임, 학대에 대해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저자를 찾아온 많은 내담자는 현재의 모든 고통이 자신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라고 자책한다. 가뜩이나 힘든 자신을 탓하고 미워만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지금의 고통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찬찬히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해해 나가보자고, 지금 현재를 잘 살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함께 찾아보자고 이야기를 건넨다.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다. 지금은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을 함께 잘 이해해 나가보자’라고 말이다.
(해당 인터뷰는 독자들의 질문을 받아 진행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트라우마라니, 솔직하게 생각하고 이야기해보기가 쉽지 않은 주제인 것 같아요. 어떻게 이런 주제로 글을 쓰게 되신 걸까요?
트라우마는 오래전부터 제 관심 분야였어요. 2008년 처음 『내 아이의 트라우마』라는 책을 쓰기도 했고요. 당시에는 부모를 독자로 생각하고 내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트라우마에 대해 알리고자 쓴 책이었는데, 이번 책은 좀 달라요.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고통이 회복되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고통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 다뤘거든요.
트라우마를 공부하면서 역설적으로 개인이 상처를 받았을 때 그걸 극복하고 나아가는 힘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됐어요. 생각해 보세요. 똑같이 고통스러운 사건을 경험했는데 어떤 사람은 훌훌 털고 일어나 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떤 사람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고통의 회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건 왜 그런 걸까요? 우리 마음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제가 느낀 건 세월이 많이 지나도 성장 과정에서의 경험들이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든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거였어요. 이 책의 초점은 어린 시절의 고통, 트라우마가 아니에요. 어린 시절 경험이 지금 나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들여다보자는 거죠. 자라나면서 아무리 많은 상처가 있었어도 지금 그 상처가 내 일상이나 인간관계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내 나름대로 소화되고 삶의 배움으로 어딘가 자리 잡은 것일 거예요. 그대로 살아나가도 괜찮지요. 다만 문제는 지금 내 삶이 힘들 때예요.
현재의 고통이 어린 시절 기억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어린 시절 기억까지 꼭 들여다봐야 할까요?
중요하게 말씀드리고 싶은 건, 지금 내가 일상을 잘 해나가고 사람들과 무리 없이 지낸다면 그대로 지내도 괜찮다는 거예요. 뭐가 문제겠어요? 과거의 기억을 굳이 들춰볼 이유가 없죠. 그런데 제게 오는 분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부분은 멀쩡하고 잘 지내지만 한편으론 우울하고 불안이 많은 분들이에요. 더 심한 분들은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로 불안하거나 우울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신체 증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아마 우리가 어느 한순간 불안하고 우울해지는 건 아닐 거예요. 그래서 저도 상담을 할 때도 지금의 어려움이나 문제에 대해 충분히 귀 기울이고 그 불편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과정에서 현재에 영향을 주고 있는 또 다른 요인으로 과거의 해결되지 못한 경험이나 고통의 감정이 있지는 않은지 탐색하는 거지요. 사실 이제는 트라우마에 대해 인식이 많이 확장되었고 아동기 부정적 경험(Adverse Childhood Experience, ACE)에 관한 연구를 통해 어린 시절 부정적 경험이 성인기에 심각한 질병이나 정신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음이 밝혀져 있어요. 현재 어떤 고통이 있다면 어린 시절 경험을 들여다봐야 자신을 전체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고, 거기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말이죠.
자신의 문제로 상담을 막상 받으러 오기까지 많은 망설임이 있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이 책으로 보자면 ‘내게 이 책이 필요한 걸까, 그렇게 내게 어떤 문제가 있나’, 그런 생각도 들 수 있고요.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리고 사실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소중한 기회이지만, 이 기회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용기도 필요하고 현실적으로 시간과 비용이 들어요. 여기서 용기라는 건, 막상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고 또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 놓는 건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잖아요. 그런 의미에요. 아마 제게 찾아오는 분들은 매우 많이 망설이고 여러 번 생각하고, 결심해서 오시는 걸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이번 책은 제가 내담자분들에게 먼저 다가간다고 생각하고 썼어요. 이 책은 혼자 고민하고 힘들어하는 분들을 직접 만나지는 못해도 스스로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에게 어떤 변화의 실마리가 될 수 있는 씨앗을 뿌리자는 마음으로 썼어요. 책을 읽으며 여러분이 이제까지와는 다른 질문을 자신에게 해볼 수 있다면 좋겠고, 혹시 지금의 문제들에 대해서 자신을 탓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도 한걸음 물러서서 다르게 바라보는 시도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책 말미에 ‘저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많은 내담자분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고 쓰셨어요. 일하면서 언제 가장 뿌듯하신지, 매일 힘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상담자로서도 힘들지는 않은지 궁금해요.
이 일을 하며 제가 정말 기쁠 때는 내담자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그야말로 성장하는 게 느껴졌을 때예요. 기억에 남는 일을 하나 꼽자면, 제 내담자 중에 부산에서 오시는 분이 있었어요. 처음 오셨을 때가 20대 중반이었죠. 내면의 고통이 컸고 여러 증상이 있었어요. 어린 시절 상처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했지만 좀처럼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고요. 그런데 그 먼 곳에서도 상담을 받기 위해 꾸준히 오셨어요. 그러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연애를 시작하고 결혼을 하고, 지금은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분 인생의 중요한 시간을 함께 걸어간 거 같아요. 저는 그분이 정말 대견하고 감사합니다. 사실 상담자가 내담자에게 선물을 주거나 하는 것은 흔히 있는 것은 아닌데 그분께는 진심을 담은 카드와 함께 아이 옷을 선물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 성장이 정말 감사해서요. 그분도 울면서 기뻐하셨던 순간이 종종 떠올라요. 우리가 그 긴 동행을 잘 마쳤구나… 지금 만나고 있는 다른 내담자분들도, 저마다의 리듬으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정말 제 일이 의미 있고 좋은 일이라고 느껴요.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이분들이 얼른 혼자서 걸어갈 수 있기를 바라죠.
아, 제가 힘들 때요? 이 부분은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웃음) 소설보다 더한 이야기들을 매일같이 듣지만 상담자로서 내담자의 고통에 휩쓸리지 않고 중심을 잡아 제 마음을 다스리는 일도 매일같이 훈련하고 있거든요. 이 부분은 상담자의 수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코로나가 장기화되면서 취업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젊은이들이 많은 거 같아요. 책 3장을 보면 ‘자기 비난의 목소리’에 빠진 젊은 사람들 이야기가 나와서 공감이 많이 됐어요. 완벽하게 하지 못하느니 그냥 포기하는 사람들이요. 이런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해주면 좋을까요?
참 많이 힘들 것 같아요. 말할 수 없이요. 지금의 상황은 뭘 혼자 노력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누가 봐도 힘든 상황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은 자신을 다독이고 격려하는데, 또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는 말을 해서 더욱더 기운을 내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처럼 힘든 상황에서 내면에 끊임없이 자기 비난의 말이 들린다면 어떨까요.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많은데 종일 집에서 누워있다고 할 때 사실 그분들은 마음이 편안하게 누워서 쉬고 있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뭔가 내면의 갈등이 있는 걸 거예요. 빨리 뭔가 해야 할 것 같고 돈도 벌고 싶고 잘 지내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자책하고 한심해하는 목소리는 커지고요. 여기서 벗어나는 것의 시작은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겁니다. “어느 때보다 힘든 이 시간에 왜 나는 나를 격려하지는 못하고 계속 비난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요.
독자분이 이런 질문을 해주셨어요. 자녀에게 정서적으로 공감해 주고 안정적인 애착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면 되는지요.
어떤 경험을 쌓아주려고 하지 마세요!(웃음) 사실 정서적으로 공감해 주고 안정적 애착을 쌓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요. 특별한 어떤 일을 해주기보다 아이와 함께할 때 부모라는 존재가 안정적으로 편안하게 있어 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에요. 그럼 아이는 엄마라는 베이스캠프를 두고 밖으로 나가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부모가 자신을 안정적일 수 있도록 노력할 때 아이를 제대로 잘 볼 수 있고, 그때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어요. 궁극적으로 부모는 ‘주유소’와 같다고 할까요. 자녀가 마음껏 세상을 여행하고 필요한 것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고, 그러다 기름이 떨어지면 다시 부모에게 돌아와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 받고 휴식을 취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거죠.
이 책이 어떤 독자에게 가닿기를 바라시나요?
뭔가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힘들고, 별다른 만족감이 없고, 변화가 필요한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분들이 여기 있으실까요? ‘왜 이렇게 힘들지? 남들도 이렇게 사나?’ 내가 문제인 것 같은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질문이 있는 분들이요. 『나는 가끔 엄마가 미워진다』가 이런 질문에 대해 길잡이를 해줄 거라 생각해요.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좋아요. 스스로에 대해 더 명확한 지도를 가질 수 있거든요. 살아있는 내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끼고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죠.
이 책 제목을 보고 ‘전 이 책 집에서는 못 읽을 거 같다’ 말씀하신 분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늘 엄마가 좋기만 하나요. (웃음) 가끔 미울 때도 있죠. 미운 감정도 있고 고마워하는 마음도 있고 걱정하는 마음도 있고 애틋한 마음도 있죠. 이런 내 안의 다양한 감정들을 알아차리고 인정해 주고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할 줄 알고, 이럴 수 있는 게 지금 현재를 유연하게 살아가는 것이겠죠. 이게 제가 바라는 회복이고 성장이에요.
*배재현 임상심리전문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에서 임상심리학을 전공했고, 현재 서울 EMDR 트라우마센터 부센터장이다. 2005년부터 트라우마의 주된 치료법인 EMDR을 통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어린 시절 반복적인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료해 왔으며 정신 건강 전문가들의 EMDR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국제 EMDR 협회 치료자이며 EMDR Institute Trainer, 한국 EMDR 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 아이의 트라우마』가 있고, 『트라우마, 기억으로부터의 자유』, 『트라우마, 내가 나를 더 아프게 할 때』, 『복합트라우마와 해리에 대한 이해』 등을 번역하기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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