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사랑을 기억하는 그 여자와 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 남자의 사정
영석에게 조제는 오래된 담벼락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는 풀꽃처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글ㆍ사진 허남웅(영화평론가)
2020.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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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조제>의 한 장면


(*영화 속 내용이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조제(한지민)는 자기 세계에 갇혀 산다. 다리를 쓰지 못해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조제는 어쩌다가 바깥에 외출할 때면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단발머리를 눈이 안 보이게 턱 끝까지 늘어뜨리고 후드를 눌러쓴다. 조제라는 이름도 실은 본명이 아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한 달 후, 일 년 후』의 주인공 이름을 가져왔다. 안 그래도 조제는 할머니(허진)가 어디서 주워오는 책들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익힌다. 198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에, 아버지는 외국인이고, 이름은 프랑스의 것인데 조제의 외양은 어딜 봐도 한국인이다. 그녀는 소설을 쓰듯 자신의 캐릭터도, 출생도, 성장 과정도 지어내는 것 같다. 조제는 소설 속에 한 발을, 현실에 또 한 발을 디딘 채 살아간다. 

영석(남주혁)은 지방대 학생이다. 잘생긴 얼굴에, 훤칠한 키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남편이 있는 교수와 몰래 정을 통하고, 영석을 마음에 둔 후배가 먼저 그에게 대시한다. 영석도 후배가 맘에 들었나 보다. 술을 마시며 대화를 매끄럽게 가져간 후 자연스럽게 손을 터치하는 연애의 ‘기술’이 뛰어나다. 사랑하는 ‘감정’이 무언지 아직 잘은 몰라도 몸이 먼저 반응할 줄은 안다. 그러다가 길가에서 쓰러진 조제를 발견한다. 망가진 휠체어 대신 리어카로 조제를 실어 그녀의 집으로 향한다. 타인의 호의가 처음인지 표정이 어두운 조제는 식사 한 끼로 고마운 마음을 대신한다. 영석은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처럼 다가온 조제에게 자꾸 ‘마음’이 간다. 

조제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 전하는 인생의 진리를 안다. 조제는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생면부지의 할머니가 그녀를 거둬 함께 살고 있지만, 언제 또 이별할지 모를 일이다. 영석에게 친절하지 않았던 건 마음을 줬다가 상대가 돌아섰을 때 느낄 아픔을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다. ‘열흘 가지 않는 붉은 꽃’처럼 영원한 건 없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는 인생의 묵직한 ‘보디감’을 조제는 진작에 깨달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작별을 암시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Farewell, My Lovely’이다. 그걸 모르는지, 영석이 ‘안녕 Hello’ 인사하듯 잊을 만하면 찾아온다. 땅에 닿으면 녹아 없어지는 걸 알면서도 하늘에서 나리는 눈(雪)에 눈(目)을 떼지 못하듯 밀어내도 다가오는 영석에게 정을 뗄 수가 없다. 

영석은 인생의 쓴맛을 모른다. 커피를, 위스키를 마시고 표현하는 보디감을 이해할 수가 없다. 학과 교수의 소개로 서울의 한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하려다가 한때 정을 통했던 교수의 농간으로 기회를 잃었다. 그때 들이킨 위스키는 보디감이 남달랐다. 인생의 쓴맛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조제를 만나 동거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몸이 불편한 그녀에게 영석은 난생처음 마음으로 사랑을 준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놀러 간 수족관에서 조제는 쓸쓸하게 말했다. 우리 눈에 물고기들이 갇혀 보이지만, 물고기들이 보기에 우리가 갇혀 있는 거겠지. 그러면서 떠나도 좋다고 말하는 조제에게 영석은 반문하지도 못하고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때 영석은 깨달았다. 조제에게 주는 사랑이 아니라 받는 사랑이었다. 더는 조제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지자 다른 사랑을 받으려고 도망치듯 그녀를 떠났다. 


영화 <조제> 공식 포스터

영석이 떠난 지 5년이 됐다. 그동안 조제는 운전을 배웠다. 차를 몰 수 있게 됐다.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듯 조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 인생의 목적지를 향해 스스로 운전할 수 있게 됐다. 그녀는 아픔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아니, 그 아픔을 마음속에 간직할 줄 알게 됐다. 못 쓰는 물건을 가져다 집을 빼곡히 채웠듯이 영석과 나눴던 가장 아름다웠던 사랑을 기억에 꾹꾹 담아 살아가는 법을 터득했다. 조제는 예전에 영석에게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사다 달라고 했던 적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다. 사랑할 동안의 열정을 믿었다. 그 열정을 간직하는 한 조제에게 영석은 소설 속의 한 구절처럼 영원히 기억할 이름이다. 

조제와 헤어지고 나서 영석은 다른 사랑을 만나 결혼을 앞두고 있다. 예비 신부가 차를 몰고 영석의 회사 앞으로 찾아왔다. 운전 보조석에 앉은 영석의 자세가 자연스럽다. 예비 신부는 영석에게 먼저 대시했던 바로 그 후배다. 사랑에 있어서 영석은 여전히 리드하고 주기보다 따라가고 받는 사랑에 익숙한 듯하다. 신호등에 걸려 차가 멈춘 사이 옆의 차량을 보니 운전석에 조제가 앉아있다. 영석은 조제와의 사랑, 무엇보다 이별을 통해 인생의 쓴맛을, 삶의 묵직한 보디감을 경험했다. 한 인간으로 좀 더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두운 시야의 한줄기 빛이 되어준 조제를 떠났다는 사실에 영석은 마음이 복잡하다.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그 눈물이 계속되는 한 영석에게 조제는 오래된 담벼락의 갈라진 틈으로 돋아나는 풀꽃처럼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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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남웅(영화평론가)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