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사랑을 쓰고 싶었다.” 이 한 마디로 시작된 소설은 순도 높은 투명한 사랑 이야기로 뻗어 나갔다. 수진, 혁범, 한솔 각자의 일에 치열한 사람들이 상대의 불완전함까지 껴안는 애정의 모습. 임경선 작가는 많은 것이 불안한 시대이기에 “더 온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하는 어떤 진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서로의 손을 잡기 어려운 시기, 온기 가득한 장편소설로 돌아온 임경선 작가를 서면으로 만났다.
임경선 작가는 일과 사랑, 인간관계에 대해 글을 써오고 있다. 소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나의 남자』, 『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 『자유로울 것』, 『나라는 여자』, 『엄마와 연애할 때』를 비롯해서 다수의 책을 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처음 소설을 구상할 때,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으셨나요?
처음부터 ‘어른의 사랑’을 쓰고 싶었던 것 같아요. 어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자신이 상처받거나 손해 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데요, 어른이라는 것은 사실 강해서 어른이기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상대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그것을 탓하지 않기에 진정한 어른인 것 같거든요. 그렇게 인간이 한없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받아들이면서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이별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습니다.
제목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두 번째 소설집을 내실 때, 고려했던 제목이기도 해요. 어떻게 정하게 되셨나요?
앗, 그것을 기억하고 계셨어요? 맞습니다. 저에겐 ‘버려진 책 제목들의 무덤’이라는 파일이 따로 있는데요, 그간 스무여 권의 책을 내면서 모아둔 수백 개의 탈락한 책 제목들을 고이 간직해두었지요.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계속 최종 후보까지 올랐다가 마지막에 탈락한 제목이었는데, 이번 장편소설에 더없이 잘 어울려서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이 제목을 사용하게 되었지요. 한솔이 연상의 수진에게 연서를 보내면서 늘 부드럽게 ‘수진 님’으로 시작하는 점에서도 착안했고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 우리는 늘 조심조심 부드럽게 부르지 않나요? 제가 딸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처럼요(남편한테는 그러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매력적이었어요. 수진과 혁범은 공간을 설계하는 건축가고 한솔은 식물을 다루는 조경사예요. 캐릭터를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인데, 어떻게 설정하게 되셨나요?
소설을 쓰는 동안, 집 이사를 하면서 ‘집’이나 ‘공간’을 주목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와 관련된 직업을 주인공에게 주게 되었습니다. 건축에 관한 다양한 책과 자료를 읽고 공부하고 건축가의 강연을 들으러 다니면서 건축이란 삶의 방식이나 세계관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어요. 과묵하지만 단단하고 진실된 현실을 구축하려 하고, 냉철하게 안전과 책임을 중시해야만 하는 건축가의 성정이 혁범이 사랑하는 방식에 어울리겠다고도 생각했습니다.
조경사라는 직업은 제가 1년 전부터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떠올린 직업입니다. 단골로 다니던 식물 상점의 사장님들과 식물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고요, 앞치마를 두르고 일하는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식물이라는 생명체를 다루면서 찰나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아는 마음이나, 순리나 운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천진한 아이 같은 성정이 한솔이 사랑하는 방식과도 역시 적절하게 어울린다고 판단했고요.
현실을 알아갈수록 자연히 상처가 많아지고, 마음을 열기가 어렵잖아요. 그럼에도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 사랑이 슬픔과 고통을 언젠가 동반하게 된다 해도 사랑이 내게 찾아온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사랑에게 한껏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상처를 입는다 해도, 상대를 탓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이별한 스스로를 다독이며 언젠가는 털고 일어나서 다시 씩씩하게 내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믿어야 하겠지요. 상처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저절로 아물거나 더러는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게 될 거예요. 사랑을 ‘받는’ 일보다 사랑을 ‘주는’ 일에 더 가치를 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 수진에게는 두 남자 ‘혁범’과 ‘한솔’이 있습니다. 혁범은 일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타협하지 않는 사람이고, 한솔은 섬세하고 애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인데요. 조금 유치한 질문이지만, 작가님이라면 어떤 사람을 택할지 궁금해졌습니다. (웃음)
전혀 유치하지 않습니다. 저요? 혁범은 사실 지적이고 세련된 겉모습을 떠나 속마음이 시리도록 외롭고, 또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 제가 참 좋아하는 유형의 남자인데요(네, 실제로 이런 남자들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해도 저는 이번만큼은 한솔의 곁에 서겠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사무치게 사랑하고 그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일은 너무도 경이롭고 눈부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한솔의 맑고도 치열한 사랑의 힘이 결과적으로 수진과 혁범을 단계적으로 구원한 셈이니까요. 아낌없이 주는 진심 어린 사랑의 힘은 너무도 압도적이라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마저도 근본부터 변화시킵니다.
두 남자를 향한 수진의 선택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더라고요. 결말을 고민하진 않으셨나요?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완벽한 모습을 한 사랑을 받는다고 해도,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정직할 수밖에 없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궁극에는 가 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설사 한없이 불완전하고 불안해 보인다고 해도요. 사랑은 ‘이성’이나 ‘합리’의 영역에 있는 감정이 아니거든요.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다 알면서도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 그래서 인간이 기계가 아니라 인간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앞서 얘기했듯이, 수진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보여준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 덕분이 아닐까 생각해요. 투명하고 맑은 사람은 말없이 나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어주거든요. 또한 소설의 에필로그는 ‘그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요, 제가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서도 수진의 선택은 ‘그 사람’이어야만 했습니다.
주인공 ‘수진’ 역시 유년기의 결핍을 간직하고 있는 인물이죠. 누구나 사람은 결핍이 있을 텐데요, 어떻게 마주해야 ‘어른’이 되는 걸까요?
예민한 사춘기에 찾아온 급작스러운 엄마의 부재나 아빠의 냉담함은 수진을 표현에 서툰 사람으로 만든 감이 있습니다. ‘좋은 아이’가 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질문을 속으로 삼키고, 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마음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 습관이 되어 어른이 되어버렸죠. 스스로의 생활을 잘 통제하고 자립된 어른으로 컸지만 마음속에는 응석 부리지 못한 쓸쓸한 어린아이가 여전히 남아 있지요. 그래서 어쩌면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다 내보이며 성큼 다가서는 한솔로 인해 많이 흔들렸을 거예요.
사실 대개의 어른들은 성장기에 부모로부터 저마다의 크고 작은 상처를 받게 되는데요, 그 결핍을 이제 와서 부모를 통해 채우는 것은 무리입니다. 오히려 떨쳐낼 것은 과감히 떨쳐내고 자신을 보호해온 껍질을 자발적으로 깨고 나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또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경험의 누적들로 마음의 상처를 조금씩 누그러뜨릴 수밖에는 없을 것 같습니다. 완전한 치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결핍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살살 달래가면서 같이 데리고 살아나가야죠. 그런 상처나 결핍을 경험했기 때문에 우리는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이해하고 그에 너그러울 수 있는 힘을 가지는 게 아닐까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초고를 수정하는 도중 코로나19가 퍼졌고, 사랑에 관한 소설을 쓰는 것에 잠깐 회의하기도 하셨다고요. 힘든 시기에, 그럼에도 아직 우리가 ‘사랑 이야기’를 읽고 듣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코로나19는 안전과 생사 등 워낙 국가 단위의 큰 문제가 삶의 중심에 놓이다 보니, ‘생명’의 문제에 대비해 ‘감정’의 영역인 사랑을 논하는 것이 조금 사치스럽지 않나, 너무 태평하지 않나, 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실생활에 반영된 모습은 무척 구체적으로 잔인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를 떼어놓고, 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을 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칠 수 있다는 잔인한 가능성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외로움이 마음을 잠식해버릴 것만 같은 이럴 때에, 온 마음을 다하는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불신과 미움, 갈등이 일어나기 쉬운 이때,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한다고 믿었어요. 두려움 없이 다가서고, 상처를 기꺼이 온몸으로 떠안는 그런 한 치의 주저함도 없는 투명한 사랑이 도리어 마음을 정화하고 온기를 보태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집필 계획이 궁금합니다.
그간 소설과 산문을 번갈아 내왔으니 다음 책은 산문이 될 텐데요, 아직은 확고하게 주제를 정하지 않고 연말까지 여러 가지 주제들을 탐색해볼 생각입니다. 산문을 건너뛰고 바로 단편소설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임경선 글쓰는 여자. 12년간의 직장 생활을 거쳐 13년째 전업으로 글을 쓰고 있다. 일과 사랑, 인간관계와 삶의 태도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한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네이버 오디오클립을 통해 인생 상담을 하기도 했다. 소설 『곁에 남아 있는 사람』, 『나의 남자』, 『기억해줘』, 『어떤 날 그녀들이』, 산문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공저), 『다정한 구원』, 『태도에 관하여』, 『자유로울 것』, 『나라는 여자』, 『엄마와 연애할 때』,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일하는 여성에게 들려주는 『월요일의 그녀에게』, 그리고 여행서 『교토에 다녀왔습니다』, 독립출판물 『임경선의 도쿄』를 비롯해서 다수의 책을 냈다. 『가만히 부르는 이름』은 세 번째 장편소설이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임경선의 개인주의 인생상담’ 시즌2를 진행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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