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런던에서 첫 선을 보인 뮤지컬 <캣츠>가 장기공연의 기록부문에서 2019년 현재, 브로드웨이 사상 4번째, 웨스트엔드 사상 6번째에 올라있지만 무수한 뮤지컬 작품 중에서 단연 압도하는 게 있다. 그래서 흥행순위와 무관하게 대중적 인지도에서 1, 2위로 꼽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음악과 춤, 가무(歌舞)다. 얼핏 종결의 무게감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약점이 존재한다. 뮤지컬 흥행을 좌지우지하는 '감동'의 원천, 다름 아닌 특별한 줄거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희생시키고 노래와 춤만을 내거는 것은 드라마 부재 즉 '드라마틱'하지 않다는 점에서 분명 위험 소지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다양한 고양이들의 삶 이야기인 이 작품은 젤리클 고양이 선발 무도회가 지배하면서 악당 고양이 매캐비티가 선지자 고양이 올드 듀터로노미를 납치하는 사건을 중간에 삽입한 것 외에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다. <맘마미아>와 같은 주크박스 뮤지컬도 대본의 완성도를 전제해야 대중적 승부가 가능하다.
<캣츠>의 경우 태생부터가 달랐다. T.S. 엘리엇의 1939년 우화집 <지혜로운 고양이에 관한 주머니쥐의 지침서>(Old Possum's book of practical cats)>에 매료된 앤드류 로이드 웨버는 1977년 여기 등장하는 여러 고양이들에 관한 노래를 만들어 뮤지컬에 도전하는 대담한 기획에 돌입했다.
이 순간 <캣츠> 음악의 방향은 결정되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각기 다른 성격과 배경을 가진 고양이들 - 검비 고양이 제니애니도츠, 반항아 고양이 럼 텀 터거, 극장 고양이 거스, 말썽쟁이 커플 고양이 멍고제리와 럼블티저, 철로 고양이 스킴블섕크스 등등 -에 대한 음악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문화의 핵심이라고 할 '다양성'을 의미했다.
서로 다른 고양이들을 통해 음악의 다양성을 구현
이런 점에서 <캣츠>의 음악은 실제 뮤지컬을 본 사람과 (지금까지 관람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식의 차(差)가 존재한다. 두 집단을 포괄하는 노래가 있다. 다름 아닌 뮤지컬 절대 명곡 'Memory'다. 이 뮤지컬을 모르는 사람도 아는 노래가 '메모리'다 보니 '캣츠 = 메모리'라는 조금은 '부당한' 등식이 아주 오래전부터 구동해왔다.
물론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I don't know how to love him', <오페라 유령>의 'All I ask of you', <에비타>의 'Don't cry for me, Argentina'와 함께 명작으로 묶일 위대한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팝 발라드임에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이 아리아 형식의 노래가 작품을 온전히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다.
아마도 전체 극의 톤을 구축하는 노래로 작품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노래'인 'Jellicle songs for Jellicle cats'를 관객은 더 기억할지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사와 멜로디의 궁합이 그야말로 입에 짝짝 붙는 이 노래의 제목을 흥얼거리곤 한다. 관객으로 하여금 작품에 격렬하게 빠져들도록 자극하는 곡이다. <캣츠>에 만약 대형 호화 뮤지컬이라는 수식이 붙는다면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형 호화 음악'이 맞으며 그 대형 호화의 시작점이 이 곡이다.
그리고 난 뒤 천재의 산물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각각 고양이 테마의 수작들이 이어지면서 황홀 사운드의 세계로 우리를 끌고 간다. 하나에 여러 곡조가 뒤섞인 제니애니도츠 고양이 곡 'The old gumbie cat'을 시작으로 작품 전체에서 가장 유쾌한 곡이라고 할 '럼 텀 터거(Rum tum tugger)'를 거쳐 작품의 중요한 캐릭터인 그리자벨라의 테마 곡 'Grizabella: The glamour cat', 그리고 코믹한 분위기의 상류층 도회지 고양이 곡 '버스터 존스(Bustopher Jones)'에만 이르러도 관객들은 그로기상태가 된다.
압도적 순간들, 자기망각의 순간들, 무장해제의 행복을 만끽하는 순간들이다. 고양이 의상과 분장을 한 캐스트들의 역동적인 댄스도 있지만 절정으로 견인하는 주체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음악이다. 그 정체는 상기한 '다양성'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곡들을 줄줄이 써냈는지 의아할 정도.
'그리자벨라: 더 글래머 캣'의 경우 나중 다시 한 번 등장하는데 전통적인 '파사칼리아' 형식의 베이스 라인이 압권이다. 낮은 성부를 반복하다가 변주해가는 느린 3박자의 춤 형식을 가리키는 파사칼리아는 아마도 바흐나 쇼스타코비치를 탐구했을 웨버의 클래식 기반을 시사한다. 이 곡을 최우수 <캣츠> 음악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전체를 관통하는 선율의 '올드 듀터로노미(Old Deuteronomy)' 또한 미감(美感)이 빼어난 멜로디다.
2막의 노래들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극장 고양이 거스('Gus: The theatre cat'), 춤과 행진 욕구를 부르는 철로 고양이 스킴블섕크스('Skimbleshanks: The railway cat') 그리고 육감적이고 매혹적인 곡 매커비티('Macavity', 팜므 파탈 고양이 밤불루리나가 악당 매커비티에게 바치는 노래)도 경이적 곡조의 퍼레이드를 선사한다.
2019년 영화 버전에서 톱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부른 후자는 조금 편곡을 달리한다면 상업적 팝 싱글로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스윙 감을 지닌 해피 송 '미스터 미스토펠리스(Mr. Mistofelees)'도 베스트 대열에서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처음부터 등장하는 코러스 파트의 '..and they all say, oh, well, never was there ever..'는 꽤나 익숙하다.
그리고 'Memory'... 아름다운 고양이로 전성기를 수놓았던 그리자벨라는 돌아왔지만 이제는 늙고 외로운 고양이로 추락해 주변의 의도적 거리두기를 당한다.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포용을 갈구하는 이 노래는 초연 때부터 일레인 페이지(Elaine Paige)의 노래로 관객들의 전율을 야기한 바 있다. 음악학자 제시카 스턴펠드는 '지금까지 뮤지컬에서 나온 곡 가운데 가장 성공한 곡'으로 일컬었다. 'Memory'로 극중 그리자벨라는 새 생명을 얻었다면 <캣츠>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할까.
가장 음악으로 성공한 뮤지컬, 음악의 낙원을 선사하다
누구라도 그리자벨라 관련 두 곡 'Memory'와 'Grizabella: The glamour cat'의 빼어난 곡조를 사랑한다. 하지만 <캣츠>가 제공하는 행복음악은 이것 말고도 'Jellicle songs for Jellicle cats'와 'Rum Tum Tugger', 'Macavity' 등 부지기수다. 어느 한곡에 무게가 쏠리지 않고 각 고양이 관련 테마곡들 모두가 평등하게 감동을 배분하는 작품은 팝 앨범으로 비유하자면 '베스트 컴필레이션'이다.
그만큼 템포, 스타일, 진행이 곡마다 천차만별이다. 이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천재성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캣츠>로 떠오르는 이름은 많다. 연출가 트레버 넌, 미술의 거장 존 네이피어, 안무가 질리언 린, 제작자 캐머런 매킨토시... 하지만 무엇보다 으뜸은 40년 관객 사랑이라는 경이를 창출한 시대불변(timeless) 음악의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익숙한 느낌을 가지면서도 그만의 각별한 터치가 살아 숨 쉬는, 놀라우리만치 다채롭고 풍요로운 음악... 말 자체가 모순일지 모르지만 <캣츠>는 가장 성공적인 '음악 뮤지컬'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토대의 작곡가가 대중의 시대에 가야할 길을 시범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위대한 40년 역사'를 쌓은 이 작품을 통해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우리에게 선사한 영토는 '음악낙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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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
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