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희
“만만찮은 필력”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강력하다”(심사위원 이기호 박형서)는 평을 받으며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임승훈의 첫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당선 소감을 밝히는 지면에서 임승훈은 “나는 애초에 수상소감으로 어떻게 웃길 것인가만 생각했다. 감성적인 서두로 시작되는 차분한 소감은 도저히 쓸 자신이 없었다”라고 운을 뗀 뒤 자신의 연애사를 밝히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리고 다음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이 치기 어린 소감은 아마 한 달만 지나면 후회하겠지. 하지만 나는 이런 후회할 만한 지질함이 좋다.”
‘지구에서의 내 삶이 형편없다’고 느껴질 때조차 임승훈은 유머를 포기하지 않는다. 「초여름」 속 ‘나’는 어릴 때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머리가 좋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현재는 자신의 소설적 재능을 인정받지 못해 결국 죽기로 결심하고 목을 매단 소설가다. 웃음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임승훈은 기발한 설정을 삽입해 그의 죽음을 유예시킨다. ‘나’가 자살을 결심하기 전 외계인에게 개조당해 죽지 않는 몸이 되었다는 것. ‘나’는 목을 매단 지 삼 일이 지나도록 죽지 않은 채 아이폰의 음성인식 기능을 통해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기까지 한다. 지질하고 가혹한 상황에서만 가능한 이런 ‘웃픈’ 장면을 임승훈만큼 능란하게 그릴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화자의 이름은 ‘임승훈’이다. 어딘가에서 임승훈은 목을 매달거나 마지막 시합을 앞두고 있지만, 또다른 곳에서 임승훈은 이서진을 닮은 탐정이 되어 파란 새를 찾으러 다니는 것이다. 사라진 아내를 찾아달라는 한 남자의 요청을 받은 탐정 임승훈이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내의 실종을 둘러싼 뜨악한 실체가 밝혀지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담담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탐정 임승훈의 성격이 묘한 화학작용을 일으켜 독특한 유머러스함을 형성한다.
첫 소설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7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쓰고 다듬은 소설들을 묶으셨는데요, 소감이 궁금합니다.
등단 이후 2014년까지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청탁도 거의 없었지만 그나마 가뭄에 비 오듯 왔던 것들도 거절했어요. 저는 우연히 등단했습니다. 글을 쓰겠다는 굳은 의지도 작가생활에 대한 동경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힘들었습니다. 제가 간절히 원했던 삶이 아닌데, 제 예상보다 매몰비용이 큰 직업이더라고요. 그에 비해 보상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작가들 대부분이 열정과 꿈으로 이 삶을 이어나가는 거 같은데, 근데 과연 나도 이걸 감당할 수 있을까? 이걸 원하는 걸까? 나한테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인 걸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2015년에 두번째 작품을 발표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어쨌든 해보자, 새롭게 시작해보자, 그렇게 결심했던 시기예요. 등단했을 때와는 마음이 좀 달랐어요. 그래서 이 책에는 등단작이 없습니다. 등단 후 4년 만에 발표한 작품도 싣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썼던 소설들도 당연히 포함시키지 않았고요. 아무래도 결이 많이 다르니까요. 소설을 대하는 제 마음도, 작법도.
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외부에서 봤을 때의 저는 등단 후 7년 만에 책을 낸 것이지만, 그 세월 동안 저는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난 것 같고, 그래서 실질적으로 제가 체감하는 등단은 2015년이고, 이런 이유로 오랜 시간 동안 다듬어서 소설집을 내는 작가 특유의 “이걸로 됐어, 이제 난 할 건 다 했어” 같은 느낌의 비장함이 없다는 거죠. 이걸 비장함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만 이 책으로 인해 드디어 정식 등단을 했다는 느낌은 듭니다. 저는 지금 비로소 소설가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것만 같아요. 비로소 더 우울한 세계로 접어든 거죠. 지난 7~8년은 저에겐 습작기 같은 거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요즘.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 를 처음 접하는 독자분들을 위해 책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말씀드린 대로 저는 오랜 시간 동안 방황했습니다. 저는 제 삶이 저에게 어울리는 것인지, 아니 더 정확히는 제가 던져진 이 삶에 제가 어울리는 사람인지 계속 고민했습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모호했습니다. 지금은 명쾌하게 알겠느냐 하면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매일 미움만 커졌고, 고통스러웠는데, 이런 마음들은 또 사랑 받고 싶은 격렬한 마음이 추동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밤을 꼴딱 새웠습니다. 그런 마음들을 되도록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했습니다.
다만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만이 아니라 소설책으로서 읽는 재미를 불러일으킬 장치를 제 나름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어차피 책이 늦게 나오게 되니까 메모해놓은 것들이 많았거든요. 이를테면 우리집 고양이 사진을 서두에 싣는다든지, 마치 거울에 비친 것처럼 닮은 두 편의 소설을 첫 소설과 마지막 소설로 배치한다든지(「초여름」은 쓸 때부터 소설집 마지막에 넣을 작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간 저와 같은 이름의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들을 썼습니다. 편편으로는 그저 우스운 치기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모두 모이면 꽤 재밌을 거라고 판단했거든요.
「이서진을 닮은 탐정―새가 된 아내」를 읽고 난 독자분들은 아마 책날개에 실린 프로필 사진을 한번 더 살펴보지 않을까 싶어요. (웃음) 이 작품 외에도 「초여름」 「우울한 복서는 이제 우울하지 않지」 「졸피뎀과 나」 속 화자의 이름이 모두 ‘임승훈’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일단 저는 이서진을 닮지 않았습니다. (웃음) 저도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 없죠. 이서진을 제 얼굴에 대입시켜본 적도 없어요. 하지만 이 소설을 쓸 때 왠지 그런 남자 배우를 쓰고 싶었어요. 단박에 얼굴이 떠오르는 건 아닌데(그때는 이서진이 예능 활동을 활발하게 하기 전이었습니다), 왠지 무표정하고, 왠지 다정한 느낌의, 아니 다정한 눈빛의 남자. 재밌는 건,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진 이서진에게 관심이 없었는데, 이 소설을 쓰고 난 후론 이서진이 남 같지 않아요. 괜히 정이 가고, 아는 형 같고 그래요. 저 혼자 그러고 있습니다.
아무튼 다른 소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라는 사람의 삶을 온전히 그대로 갖다 쓴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떤 마음들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도 있을 거 같아요. 어떤 사실은 사실이어도 진실이 아니고, 어떤 진실은 사실이 아님에도 진실이라는 거요. 저는 제 마음을 토해낸다는 감각으로 썼고, 그걸 조금 더 잘 전달하기 위한 장치로 제 이름을 활용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오브제화시키는 미술 작업처럼요.
「가혹한 소년들」이나 「비워진 우주의 대기자들」같이 완전한 허구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 배경묘사에 무척 공을 들인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허구의 공간을 배경으로 할 때 특히 신경쓰는 부분은 어떤 것일지요.
소설이 허구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꼭 그만큼의 질감이 느껴지길 바랍니다. 읽는 사람의 뇌에 정확히 상이 맺혔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저 소설들은 설정이나 배경이 비현실적인 것도 있지만, 감정도 과잉되고 연극적이라, 세계가 구체적으로 전달되지 않으면 소설이 명확하지 않고, 독자들이 읽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기 십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런 붕 뜬 감각을 선호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방식으로는 제가 원하는 만큼의 힘을 생성하기 힘들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전 세계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똑같아진다거나(「2077년, 여름방학, 첫사랑」), 평행우주 속 또다른 ‘나’가 작중 현재의 ‘나’를 찾아와 죽음을 예고한다거나(「우울한 복서는 이제 우울하지 않지」) 등 소재와 발상이 독특한데요. 보통 이런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으시는지도 궁금합니다.
평소에 메모를 많이 합니다. 그리고 소설을 쓸 때 평소 메모해놓은 것들을 합치거나 변형하거나 해봅니다. 목적이 뚜렷할수록 그 작업은 쉬워집니다. 「2077년, 여름방학, 첫사랑」의 경우에는 ‘어떻게 웃길까’ 하는 고민만 했습니다. 요즘은 웃기는 소설이 많지만 당시에는 아직 문단이 웃기는 것에 조심하던 시절이었어요. 웃기더라도 고급스럽게 웃겨야 했고, 그러니까 어감으로 말하자면, ‘개그’가 아니라 ‘위트가 있다’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그런 센스를 선호하던 시기였어요(그러고 보면 요즘 분위기는 정말 신기해요. 몇 년 새에 이렇게 빨리 분위기가 변하다니). 그래서 무조건 웃기자는 생각에 거의 <개그콘서트> 개그맨들이 아이디어 회의하듯이, 제 메모들 중에 재밌을 만한 요소가 있는 것들을 뽑아서 합쳤어요. 하나는 제 얼굴로 하는 일종의 ‘밈’이었고, 하나는 어리숙한 첫 섹스, 하나는 까도 까도 나오는 양파, 뭐 이런 느낌의 것들이요.
「우울한 복서는 이제 우울하지 않지」는 그 당시 제 마음이었어요. 그 복서가 자기 직업을 싫어하듯 저는 제 직업을 견디기 힘들었고, 삶을 견디기 힘들어했는데, 또 그렇다고 이걸 그만두지도 못하고 삶도 끝내지 못하고 있으니까, 왜 그런 걸까? 이런 마음이란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게 잘 드러나려면 죽음 직전이어야 했고, 그리고 당시 마감이 코앞이라 예전에 썼던 걸 활용하자는 마음에 「2077년, 여름방학, 첫사랑」에서 쓴 ‘같은 얼굴’이란 소재를 변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합쳤어요.
「골키퍼 에릭 홀테의 고양이가 죽은 다음날」과 ‘작가의 말’에서 축구(혹은 축구 게임)에 대한 지식과 애정이 물씬 느껴지는데요, 좋아하고 잘하는 소재로 글을 쓰는 게 쉽다고 하는 작가님도 계시고, 그렇지 않다는 분도 계시잖아요. 작가님은 어떤 쪽이신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걸로 글을 써본 적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거든요. 「골키퍼 에릭 홀테의 고양이가 죽은 다음날」은 다시 제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2014년 무렵에 쓴 소설이에요. 그때는 어쨌든 한 줄 쓰는 것도 힘든 시기여서 집필할 때 너무 고통스러웠는데, 지금 다시 쓰면 어떨지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엄청난 덕후는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덕후적 기질이 있어서 관심 있는 게 많아요. 이 관심들에 대해 앞으로도 어떤 식으로든 쓰겠죠. 그땐 더 쉬울까? 쉽지 않을까? 아마 다음 책이 나올 무렵에 알겠죠. 다만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좋아하는 걸 쓴다는 건 그래도 즐거운 일이긴 해요(정확히 말하면 그나마 즐거울 만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조금 다른 거지만, 말한 김에 얘기하자면, 요즘 제가 새롭게 즐거움을 붙인 건 수영과 여행이에요. 특히 여행이 저에겐 이채로운데, 전 살면서 어딜 놀러가 본 적이 거의 없거든요. 여행 욕구 자체가 없었어요. 솔직히 그 큰돈 들여서 겨우 다른 인간들이 사는 곳을 적당히 돌아다니고, 어차피 남들 다 가는 곳에서 남들 느낄 만한 감상을 느끼고 오는 게 뭐 대단한 건가 싶었어요. 그러다 최근 제주도를 가보고 깨달았습니다. 이래서 하는 거구나. 어차피 사람 사는 동네인데도, 그저 낯선 곳을 걸어 다닌다는 것 자체가 이렇게 신선한 거구나. 그래서 다행이고 고맙다는 생각도 했고요. 뭐가 고맙냐면, 여행에 무관심했던 제 과거가요. 가본 데가 없으니까 어딜 가도 금세 감동하거든요. 전 술 담배 안 하고 거의 집에만 있는 스타일이에요. 운동, 카페, 집, 이 사이클이죠. 남들 즐기는 것 중에 못해본 게 정말 많아요. 그래서 여행이 그렇듯 앞으로 즐길 게 이렇게 많이 남았구나, 이런 삶이란 나름 괜찮구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는 앞으로 무엇에도 감흥이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열광하는 것도 없는 그런 시기가 찾아오면 어쩌지 하는 거거든요. 어쨌든 많은 소설가들이 여행하는 화자로 소설을 쓰는데 저도 언젠가 쓸 날이 올 것만 같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가 좋아하는 걸 글로 쓴다는 게 어떤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꼭 써보고 싶은 소재나 분위기의 소설이 있는지, 언제쯤 다시 만나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예전부터 주변에 엄청 말하고 다녔는데 연애소설을 쓰고 싶어요. 근데 최근에 봇물 터지듯이 젋은 작가들의 연애소설들이 쏟아져서 당황했어요. 혼자 생각했죠. 정말 난 평범한 사람이구나, 내가 원하는 것, 내가 떠올린 건 지극히 평범하고 그 시절 누구나 원하는 걸 내가 원하는구나, 이런 생각. 또 무슨 생각을 했냐면, 정말 뭘 생각하든 빨리 손을 써야 하는 거구나. 왜냐하면 나 따윈 평범한 ‘닝겐’이니까.
아무튼 그런 연유로, 연애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된 거 잘됐어요. 더 속 편하게 쓰죠 뭐. 큰 기대 하지 말고.
다시 만나볼 수 있는 건, 잘 모르겠어요. 누가 저 좀 데려가세요. 고기만 사주면 됩니다.
2011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에 단편소설 「그렇게 진화한다」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지구에서의 내 삶은 형편없었다임승훈 저 | 문학동네
대개 문학을 향한 애정과 신인으로서의 포부를 드러내며 자신의 문학적 시작을 알리기 마련인 상황에서, 임승훈은 엄숙함과 진지함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유머’와 ‘지질함’을 올려놓았다.
출판사 제공
출판사에서 제공한 자료로 작성한 기사입니다. <채널예스>에만 보내주시는 자료를 토대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