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스플래쉬
그것은 쌓이는 것이다. 페스추리처럼 한 겹 한 겹, 견고하게 쌓이는 것이다.
피로. 이것을 ‘열렬히’ 느낄 때야 비로소 어른이 된 줄 알게 되는 것. 생각해 보니 나는 서른 무렵에도 피로를 몰랐다. 친구들과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에도 말짱히 깨어 밖으로 나갔다. 일이 있든 없든 나는 재미있는 일은 밖에 있다고 생각하며, 집 밖으로 나서는 타입이었다. 친구들은 나를 두고 체력 하나는 좋다고 감탄했다. 정말 내가 체력이 좋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 내가 피로를 몰랐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나 몸 여기저기가 아프던 친구 하나는 “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고 말해 종종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친구의 집으로 찾아가(물론 놀러 나가자고), 누워있는 친구 곁을 어슬렁거리며, 거짓말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라고 성화를 부렸다. 친구는 누운 채 손가락을 몇 번 꼼지락거리더니 정말이라고, 손끝에 힘을 주기 어려울 정도로 피곤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과자 따위를 씹어 먹던 나는, 그만 역사에 기리 남을 우문을 던지고 만다.
“설명해 봐. 피곤하다는 게 정확히 어떤 상태야?”
아, 무식하게 힘세고 팔팔해서 아름다웠던 내가 그립다. 어깨가 뭉치는 게 뭔지 몰랐던, 아니 내 몸에 어깨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건강한 나여!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나는 피로한 상태를 몇 시간이라도 말할 수 있다(아, 그러면 피로하겠구나). 이제 나는 ‘에구구구’를 내뱉지 않으면 기상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했다. 어깨와 목이 무겁지 않은 적이 없고(지금도 아프다), 오전에 일을 많이 하면 오후엔 녹초가 된다. 세 시간 이상 내리 집중하는 게 어렵고, 요리를 하고 나면 바로 다른 일을 못한다. 하루에 두 번 이상 미팅을 하면 영혼이 사라진 채 몸만 집으로 돌아온다(영혼은 다음 날 아침, ‘에구구구’ 소리와 함께 돌아온다). 누군가 예전의 나처럼, 피로한 게 어떤 상태냐고 묻는다면? 일단 얄미우니 꿀밤을 한 대 때리고는, 이렇게 말하리라.
“내가 하수구가 된 기분이야. 몸 곳곳으로 ‘버려야 할 여러 가지’가 흘러들어오지. 사방에서 말이야. 나를 깔때기 삼아 통과해 가는 것들! 나는 여과지처럼, 아니 수챗구멍처럼, 가만히 앉아 그것들을 견디어야 해. 타인의 시선을, 의무를, 책임을, 일상을, 업무를! 몰려드는 그것들이 나를 통과해 지나갈 때까지 견디어야 해. 그러고 나면 내 몸에 그 모든 것의 찌꺼기가 남아. 나는 끈끈해지고 어두워져. 사타구니가 특히 까매지고, 얼굴로 소낙비 같은 먹물 몇 점이 튀기고, 코끝이나 목구멍에서 피 냄새가 휘이 돌아. 이해하겠어? 목구멍이 싸해져. 기분이 아니라 정말 아프다고. 잠깐 침대에 누우면 나는 지진에 뿌리 뽑힌 나무처럼 묵직하게 쓰러지는 기분이 들어. 잠들지. 이 잠이 얼마나 게걸스러운 잠이냐면 걸신들려 달려드는 아귀처럼, 허겁지겁 빠져드는 잠이라서, 어딘가 나를 상하게 하며 빠져드는 잠 같달까? 조금의 여유도 없이 침입해서 들어오는 잠 말이야. 나를 침략하듯이, 내 존재에 개입해 나를 휘저어놓는 잠! 내가 자는 잠이 아니라 잠이 삼킨 내가 되는 기분이야. 잡아먹힌 동물, 숨통이 끊어진 짐승처럼 자는 거지. 기절 상태. 이런 잠에서 깨어나면 전류가 흐르듯 손발이 잠깐 떨려. 나는 조금씩, 죽은 이가 부활하듯 깨어나지. 깨고 나면 민망해. 마치 내가 급한 욕구를 서둘러 해결한 짐승 같아서.”
대관절 우리는 왜 이토록 피로한 걸까?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서? 나 이외의 것을 신경 쓰며, 그들에게 잘 보여야 하고, 그들을 돌보거나 배려하며 살고 있기 때문일까? 확실한 건 더 많이 애 쓰는 사람들이 피로하다는 거다.
이 딱딱한 괴물. 모든 피로는 경직된 상태이므로 물컹하게 만들어 풀어내야 한다. 그렇다. 그것은 풀리는 것이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고 몸을 뉘어봐야 피로가 ‘풀리는 것’임을 안다. 내 경우엔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깊은 잠을 자고 나서, 따뜻한 차를 마신 후, 바닥에서 스트레칭을 꼼꼼하게 하고, 물구나무를 서고, 마지막으로 명상을 짧게 하고 나면! ‘겨우’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긴다. 몸은 달래야 한다. 몸 없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므로. 생각도 몸이 하는 거다. 다시 해보자고, 함부로 써서 미안했다고 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내 눈치를 가장 많이 보아야 하는 사람은 나다. 지나치게 피로하다면 잠깐이라도, 세상에 나밖에 없는 듯, 나만 생각하며 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게 뻔한, 어른일지라도.
박연준(시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나 동덕여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4년 중앙신인문학상에 시 '얼음을 주세요'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시집『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가 있고, 산문집『소란』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