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
많이 기다려야 했습니다. 새 책이 언제 나오냐는 많은 질문들과, 많은 독자들의 관심 어린 기대에도 그저 침묵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글은 머리에서 출발해 곧바로 손끝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때는 텅 빈 백지를 놓고 몇 시간씩 바라보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기다림의 과정이 고통의 시간이었는지, 설렘의 시간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카페에서, 밤늦은 연구실에서, 대구로 향하는 KTX 기차 안에서, 기다리는 일이 습관이자 일상이 되었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지어낼수록, 걸음을 서두를수록 가슴에선 아무런 울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글은 제가 쓰기 시작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온전히 밀고 나가는 것은 제 삶의 모든 중력입니다. 그러다 보니 언어가, 문장이, 글이 제 가슴속에서 흘러넘칠 때까지, 무던히 기다려야 했습니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했던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가장 깊은 지점까지 도달하지 않는다면 결코 공명할 수 있는 문장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먼저 의식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것은 자신의 내면을 치열하게 바라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을 잊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처음에 글은 제가 쓰기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글이 저를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느꼈던 희열은 추운 가을 저녁 캠퍼스를 들뜬 기분으로 한없이 떠돌게 만들었습니다. 이 글은 그것의 기억이자 기록입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란 책에서 작가로서의 출발점은 반항심에서 연유한다고 말했습니다. 현실 세계에 놓인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비판하는 사람이 작가라는 것입니다. 비록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살아 보고 싶었지만 살아 볼 수 없었던, 삶을 그려 보는 것이 소설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소설을 써 보지는 않았지만, 제가 글을 쓰는 동안 저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 바로 이 ‘반항심’이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디자인을 처음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반항심이었을지 모릅니다.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바로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현실의 무엇인가를 바꿔 보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 무엇인가가 제 자신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도….
그래서 여기에 쓴 글들은 제 자신을 위한 글들이기도 합니다.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고,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에 대한 개인적 목록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 만족할 수 없는 그러한 반항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책이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생겨났고, 참 많은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참 바쁜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절망적 투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멀리 지방에 강의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독자분이 사인을 받기 위해 제가 쓴 책을 갖고 오셨습니다. 저는 그분이 들고 있는 책을 보고 일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책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붙어 있던 수많은 포스트잇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저와 토론하며 함께 글을 써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글 쓰는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또한 가장 큰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상상력에 엔진을 달아라』이후 그렇게 7년이 흘렀습니다.
그 시간 동안 인간과 인생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사람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했습니다. 사람 마음의 상태와 작용을 알고 싶었습니다. 마음은 결국 뇌의 활동이기에 신경과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람을 탐구하려면 마음의 생성 기원을 추적해야 했고, 진화심리학으로 그러한 허기를 조금은 달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철학이나 신학의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던져진 질문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이라는 연극에서는 갑자기 나타나 절망적인 상황을 해결해 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의 글은 제가 인생에 던지는 질문들입니다. 동시에 40대의 후반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불안하기만 한 한 영혼의 삶의 흔적과 상처이기도 합니다.
칸딘스키는『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란 책에서 정신적 생활을 예각삼각형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제일 위에 위치한 가장 좁은 각, 그 가장 높은 정점에 외롭게 선 사람만이 기쁨에 찬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통찰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해를 넘어선 것이기에, 동시에 그것은 엄청난 슬픔을 감당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정신병원에 갈 때가 되었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던 베토벤의 제7교향곡처럼.
예각삼각형의 가장 밑변에 위치한 우리가 가장 높은 꼭짓점까지 도달하기 위해선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요? 그 수준까지 오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정신의 허기를 달래야 하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오르는 일밖에 없습니다. 왜 오르는가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정점에서 내려올 때라야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찾을 수 없다 해도 괜찮을 겁니다. 그 등정의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이미 다른 질문을 던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원고를 쓰는 내내 시규어 로스Sigur Ros의 음악과 함께했습니다. 차가운 슬픔 같은, 그래서 더 투명하고 아름다웠던 아이슬란드의 풍경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춥고, 쓸쓸했고, 고요했습니다. 하지만 정신만은 청명하게 푸르렀습니다. 리드 보컬 욘시의 청아한 목소리는 안개처럼 저의 모든 감각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한여름에도 서늘했습니다. 작열하는 태양에 몸은 땀이 났지만, 마음은 점점 더 차가워졌습니다. 겨울보다 더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 차가움을, 밀려드는 슬픔을 고드름처럼 매달려서 견뎌야 했습니다. 아이슬란드로부터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습니다. 홀로 밥을 먹고, 홀로 차를 마시고, 홀로 아침에 깨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때로는 혼자 사랑을 하고, 혼자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운이 좋은 하루는 가슴으로부터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 뜨거운 온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가 이전에 썼던 글들을 차례로 찢고 있었습니다.
제목을『스티브를 버리세요』라고 정했습니다. 스티브는 스티브 잡스를 지칭할 수도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작은 신화나 영웅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있는 편견이거나 깊게 뿌리박힌 고정관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린 마음속에 각자의 스티브를 품고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스티브 잡스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쓴 책에 그의 스탠퍼드대학 연설문도 번역해서 실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제 스티브를 버려야 할 때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새로운 스티브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연설처럼 오래된 것들을 치움으로써 새로운 것들의 길을 만들어 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혁신은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제목만 보면 경영이나 혁신에 관련된 책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책은 사람과 인생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 책에서 저는 많은 사람들이 상식으로 생각했던 것과는 상반되는 말을 던질 것입니다. 스펙 쌓지 말라고 할 것이며, 바닥까지 내려가야 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세상과의 불화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더 많이 흔들리고, 더 많이 부딪치고, 전부를 걸고 사랑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부여된 숙명 같은 것. 우리의 한계를 정하고 구속하는 것. 그것들에 대드는 방법일 것입니다.
얼마 전 괴테의『파우스트』를 다시 읽었습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이 새삼 눈에 밟혔습니다. 삶과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더 방황하고, 더 아파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괴테는 말합니다. 이것이 지혜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살아 있기 때문에 싸워야 하고, 노력하고 있기에 방황해야 하는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당신은 이미 지혜의 마지막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 갑자기 듣고 싶은 음악이 하나 생각났습니다.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 자유를 찾아 떠나는 당신의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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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를 버리세요 임헌우 저 | 나남
63주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이후 여러 기업과 단체에 초청을 받아 상상력과 창조성에 대한 특강, 인문학 강의, 방송 출연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책의 반향이 너무나 컸기에 차기작을 기다리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저자는 백지를 마주한 채 가슴에 울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전작에서 독자들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열어주었던 상상력 오프너가 이번에는 사람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기 위해 이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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