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된 폰 쇤부르크 씨, 쿨하게 가난해지기로 마음먹다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이 윤리적 가난이라면 폰 쇤부르크 씨는 미학적 가난이다. 금욕의 진지함을 벗어던진 명랑한 가난, 부자를 경멸하는 쿨한 가난이다. 석유문명의 종말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난해져야 할 필연성이 있을 때 마땅히 가난해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저자의 통찰에서 비롯된다.
2013.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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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일부 독자들은 보편적 복지의 혜택을 누리는 독일 언론인 실업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게 무슨 가난이란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이 책의 주제는 사실 가난보다는 미학에 가깝다. 어느 시인의 “가난하다고 해서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 하는 식의 탄식조가 아니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사는 게 부끄러워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거절해야만 하는 여동생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 뒤에서 스타킹을 걷어 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묘사한 80년대식 가난도 아니다. 그물코출판사에서 나온 에른스트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은 이보다는 좀더 품위 있지만 여전히 너무 진지하고 심지어 약간은 금욕적이다. 반면 우리의 폰 쇤부르크 씨는 쿨하게 가난하다. 궁상맞지 않고 구김살 없는 가난이다. 원초적으로 헤어날 수 없는 빈곤의 굴레가 아니라 부 자체를 경멸해서 막대한 유산을 던져 버렸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류의 가난에 가깝다. 비트겐슈타인은 ”장식은 범죄”라는 아돌프 로스의 건축철학에 동조하여 벽걸이 그림조차 걸지 않았다. 이것은 실용적인 가난이 아니라 철학적 가난이다.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이 윤리적 가난이라면 폰 쇤부르크 씨는 미학적 가난이다. 금욕의 진지함을 벗어던진 명랑한 가난, 부자를 경멸하는 쿨한 가난이다. 석유문명의 종말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난해져야 할 필연성이 있을 때 마땅히 가난해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저자의 통찰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 저자의 집안에서는 과잉은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며, 낭비는 감정의 결핍이었다. 찻주전자는 조금 금이 가거나 이미 한번 때운 경우에야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다. 또한 재킷도 다른 사람이라면 내다 버릴 순간이 되어야 스타일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려면 낡고 오래된 것에서 미학적 풍취를 느낄 정도의 교양과 안목이 필요하다.
왕년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노래부르던 새마을 운동 시절, 일단의 골동품 수집가들이 시골 마을의 할머니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베니어 합판과 톱밥으로 만든 공장제 ‘새’ 가구를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거나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낡은 고가구들과 맞바꿔주면서 생색내며 사기를 쳤다. 지금이야 바뀌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손으로 만든 ‘구질구질한‘ 물건보다 공장에서 기계로 반듯하게 만든 것들을 더 높게 쳐주던 시기였기에 시골 할머니들은 “이게 웬 횡재여?” 하면서 사실은 금덩이를 주고 돌덩이와 바꾸었던 것이다. 소비 자본주의의 광고 마케팅이 우리를 현혹하는 소위 명품들과 우아한 생활양식이야말로 시골할머니들을 속였던 공장제 톱밥 가구가 아닐는지 스스로의 미학적 감수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동네에서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는 것보다 수백만 원을 들여 해외 휴양지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과소비하는 것이 더 멋지다는 생각이나, 끊임없이 에르메스나 카르티에 같은 공장제 명품들을 찾아 소비하면서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가치있는 골동품을 싸구려 공장제 양산 가구와 바꾸던 시골할머니들과 무엇이 다를까. 낡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 한 켤레, 티셔츠 하나면 부족할 것 없이 자연 속을 걸을 수 있는데도, 흉물스럽게 화려한 아웃도어 브랜드를 걸치고 온갖 장비로 무장한 아웃도어 소비자들이 녹지대의 환경을 알록달록하게 오염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저자는 우아한 가난의 조건으로 가치를 식별하는 안목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는 자주성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탈리아에는 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 있다. 휴가를 떠난 척 위장하는 것이다. 자동 응답기를 틀고 화분을 옆집에 맡기고 냉장고에 음식을 가득 채우고 아이들에게 비디오를 틀어주고 2주일 동안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약 3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해마다 휴가를 떠난 척 가장한다고 한다. 여행을 떠날 만큼 돈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만의 생활양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슈마허의 <자발적 가난>이 윤리적 가난이라면 폰 쇤부르크 씨는 미학적 가난이다. 금욕의 진지함을 벗어던진 명랑한 가난, 부자를 경멸하는 쿨한 가난이다. 석유문명의 종말과 더불어 역사적으로 가난해져야 할 필연성이 있을 때 마땅히 가난해지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는 저자의 통찰에서 비롯된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인 저자의 집안에서는 과잉은 추하고 혐오스러운 것이며, 낭비는 감정의 결핍이었다. 찻주전자는 조금 금이 가거나 이미 한번 때운 경우에야 정말 아름다운 것이었다. 또한 재킷도 다른 사람이라면 내다 버릴 순간이 되어야 스타일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려면 낡고 오래된 것에서 미학적 풍취를 느낄 정도의 교양과 안목이 필요하다.
왕년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를 노래부르던 새마을 운동 시절, 일단의 골동품 수집가들이 시골 마을의 할머니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베니어 합판과 톱밥으로 만든 공장제 ‘새’ 가구를 집안 대대로 물려받았거나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낡은 고가구들과 맞바꿔주면서 생색내며 사기를 쳤다. 지금이야 바뀌었지만 70년대만 하더라도 손으로 만든 ‘구질구질한‘ 물건보다 공장에서 기계로 반듯하게 만든 것들을 더 높게 쳐주던 시기였기에 시골 할머니들은 “이게 웬 횡재여?” 하면서 사실은 금덩이를 주고 돌덩이와 바꾸었던 것이다. 소비 자본주의의 광고 마케팅이 우리를 현혹하는 소위 명품들과 우아한 생활양식이야말로 시골할머니들을 속였던 공장제 톱밥 가구가 아닐는지 스스로의 미학적 감수성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동네에서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는 것보다 수백만 원을 들여 해외 휴양지 호텔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과소비하는 것이 더 멋지다는 생각이나, 끊임없이 에르메스나 카르티에 같은 공장제 명품들을 찾아 소비하면서 우아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가치있는 골동품을 싸구려 공장제 양산 가구와 바꾸던 시골할머니들과 무엇이 다를까. 낡은 운동복 바지와 운동화 한 켤레, 티셔츠 하나면 부족할 것 없이 자연 속을 걸을 수 있는데도, 흉물스럽게 화려한 아웃도어 브랜드를 걸치고 온갖 장비로 무장한 아웃도어 소비자들이 녹지대의 환경을 알록달록하게 오염시키는 것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저자는 우아한 가난의 조건으로 가치를 식별하는 안목과 더불어 다른 사람의 생활양식을 자신의 척도로 삼지 않는 자주성을 갖출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탈리아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탈리아에는 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 있다. 휴가를 떠난 척 위장하는 것이다. 자동 응답기를 틀고 화분을 옆집에 맡기고 냉장고에 음식을 가득 채우고 아이들에게 비디오를 틀어주고 2주일 동안 집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약 300만 명의 이탈리아인이 해마다 휴가를 떠난 척 가장한다고 한다. 여행을 떠날 만큼 돈이 없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기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자신만의 생활양식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 책을 읽어보면 알 수 있다.
- 폰 쇤부르크 씨의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 저/김인순 역 | 필로소픽
저자 폰 쇤부르크는 500년 동안 영락의 길을 걸어온 귀족 가문의 전통과 근검절약을 미학적 수준까지 끌어올려 실천했던 부모님의 생활 방식을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덕분에 경제적 곤경 속에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품위를 잃지 않고 우아하게 가난해질 수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난해지면서도 부유하게 느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화려한 시대와의 결별을 먼저 겪은 유럽 사회를 통해 우아하게 불황을 견디는 지혜를 알려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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