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이글스 취임한 김응용 감독 “한화는 한국시리즈 우승 가능한 전력”
한화 홈구장인 대구구장에서 첫 대면식을 한 코끼리 감독이 선수 한명한명과 악수를 나눴다. 그가 현역을 떠날 당시 프로에 데뷔조자 하지 못했던 젊은 선수들은 야구계의 살아있는 전설과 대면에 약간은 긴장한 듯한 표정이다. 화창한 날씨에 그라운드에 우뚝 선 그의 모습은 70세가 넘은 노장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기운이 넘쳐보였다. 지난 공백기 따위는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흐른다.
2012.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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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로서 우승 아니면 목표가 없다. 한화가 내게 원하는 것은 포스트시즌에 나가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는 것이다. 함께 하면 반드시 우승할 수 있다”
김응용 감독의 한화 행은 많은 야구팬들에게 깜짝 놀랄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현역 감독직에서 물러난 지 8년여, 지난 2004년 삼성 라이온스 사령탑을 끝으로 구단 사장까지 지낸 그가 다시 현역으로 돌아 온 이유는 뭘까. 선수들 앞에선 그가 ‘우승’이란 짧고 굵은 한 마디를 던졌다. 노장은 아직도 목이 마른 듯했다.
카리스마, 죽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를 지난 2004년 이후로는 다시 볼 수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세월을 비웃기라도 하듯 변함없는 모습으로 돌아왔다. 60대 시절 덕아웃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던 외국인 선수를 헤드록으로 제압했다던 체구는 70대가 되어서도 변함없는 듯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첫 취임 일성으로 ‘우승’을 이야기한 그에게 8년 만에 현장으로 돌아 온 소감을 물었다.
“삼성 구단 사장을 하면서부터는 유니폼을 안 입긴 했지만, 운동장에서 계속 생활한 것은 똑같았어요. 그 연장선상이라고 보고 있죠. 그래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매우 긴장되고 가슴이 떨립니다. 즐거운 심정이에요. (우승을 언급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고, 아직 선수 파악도 안되고 코칭 스태프하고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현재로서는 저 역시 백지 상태입니다. 조만간 합의를 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사실 그와 한화 이글스 사이에는 오래 된 묵은 악연(?)이 존재한다. 과거 1988년과 89년 시즌 한국시리즈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수장으로서 당시 빙그레 이글스와 맞붙었던 것. 성적은 두 번 모두 해태의 승리였다. 특히나 한화의 붙박이 팬들은 1988년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사연은 이렇다.
1988년 시즌 전 이글스가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것이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창단 4년째, 1군에 참가한지는 3년째에 불과한 신생팀이었던 데다가 바로 전 시즌 성적 역시 꼴찌를 다투고 있었던 탓이다. 그런 이글스가 그해 시즌에선 전기리그 2위에 오르며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급기야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이다. 더구나 후기리그 2위인 삼성과 치른 플레이오프에서도 3연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그런 이글스의 기세는 안타깝게도 해태에 의해 꺾이고 말았다. 6차전 접전 끝에 준우승에 머문 이글스는 그 다음해에도 해태와 우승을 다퉜지만 결과는 같았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팬에게 김응용 감독은 뛰어난 명장이었겠지만, 이글스의 팬들 입장에선 얄미운 적장이었을 터였다. 그런 그가 무려 20여년을 돌고 돌아 이글스의 수장이 된 것이니, 프로의 세계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말이 새삼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묵은 감정에는 입장 정리가 필요한 법, 한화 이글스의 팬들이 가장 바라는 목표를 제시한 그가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잡는다.
“삼성 라이온즈로 갔을 때도 저보고 제일 괴롭힌 감독, 제일 미워한 감독이 왔다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그땐 그때죠(웃음). 어쨌든 한화 이글스 야구팬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아닙니까. 우승하는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프로이기 때문에 우승이 아니면 목표가 없잖아요. 제가 봤을 때 (각 팀의 전력) 차이는 종이 한 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어쨌든 감독이 된 이상 그의 친정팀이라 할 수 있는 기아 타이거즈, 구단 사장까지 지냈던 삼성 라이온스와의 대결도 불가피하다. 더구나 한창 각 팀 사령탑의 세대교체가 이뤄진 마당에 유일한 최고령 감독으로서 한참 아래 후배 혹은 제자들과 겨뤄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는 오롯이 감독이라는 책임 외에 다른 것은 심중에 두지 않는 듯했다.
“전부 프로니까 다 붙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는 나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다. 프로면 모두 똑같은 프로인데…. 외국의 경우는 제자가 감독을 하고 그 밑에서 코치를 하는 스승도 많이 있습니다. 프로는 똑같은 프로에요.”
11번 째 우승을 향해
그가 처음 야구를 시작한 것은 부산 개성중학교 1학년 재학 무렵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대부분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구가 왜소했던 당시에도 그는 185cm의 키에 95kg의 풍채를 타고났다. 부산상고와 우석대를 거치며 국가대표팀 4번 타자를 꿰찬 그는 거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쾌한 장타를 무기로 실업야구에서도 1965년, 1967년 홈런왕에 오르는 등 선수로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후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1981년까지 한일은행에서 코치와 감독을 지낸 후 미국 조지아 서던 칼리지로 유학을 떠난다.
1년 후 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그는 운명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감독으로 취임한다. 해태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그의 야구 지도자 인생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취임 첫해부터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 시작해 1986년부터 1989년까지의 네 시즌은 연속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1991년과 1993년, 1996년과 1997년 등 한국시리즈에 진출하기만 하면 무조건 우승을 해내며 ‘한국시리즈 승률 100%’라는 믿기 힘든 기록을 달성한다. 총 9번, 해태에서 그가 일궈낸 우승의 숫자다. 그 시절 동안 그의 밑에는 선동렬을 비롯한 이종범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주역으로 활약하고 있었지만, 타이거즈하면 ‘김응용’이 먼저 떠오를 정도로 감독으로서 그의 위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그의 불같은 성격은 많은 일화를 남겼고 거침없으면서도 인간적인 입담 역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됐다. 경기 전 그가 덕아웃으로 나올 때면 수십 명의 기자들이 그의 말 한 마디를 듣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하니 그 입담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그런 그에게 기자들은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을 정도.
이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감독으로서 한국에 동메달을 안긴 그는 정든 해태 타이거즈를 떠나 2001년 삼성 라이온스로 자리를 옮겼다. 기록은 삼성에서도 이어졌다. 비록 첫해 준우승에 그쳤지만 2002년 삼성에게 21년만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안겨주며 또 한 번 저력을 과시한 것. 게다가 2004년 선수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삼성 구단 사장직까지 오르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 선수로서, 지도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야구인으로서 이룰 것은 다 이룬 삶이었다.
지난 2010년 삼성 구단 사장직에서도 물러난 지 2년여, 이제 그에게 더 이상 도전할 것은 남아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과 달리 그는 명예로운 은퇴 대신 또 한 번의 도전을 선택했다. 통산 10번의 우승을 일궈낸 노장이 또 다시 새로운 구단에서 11번째 우승을 언급하게 되리라고는 최근까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 야구와 관련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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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광, 재현할까?
한화 이글스는 김응용 감독 영입에 이어 작심한 듯, 기존 송진우를 비롯해 수석코치로 김성한 전 기아 타이거즈 감독, 주구코치로 이종범, 재활코치로는 올 시즌을 끝으로 LG에서 은퇴하는 이대진까지 감독급 코치들을 영입하며 분위기 전환에 나서고 있다. 특히 이종범의 경우 지난 5월 은퇴를 한 뒤 일본 주니치 연수를 계획하면서 지도자 공부를 할 생각이었지만 김응용 감독의 말 한마디에 마음을 바꾼 경우다. 사실 그가 선수 생활 대부분을 몸담았던 기아 타이거즈 팬들로서는 서운함이 생길 수밖에 없는 상황. 김응용 감독에 이어 한화의 유니폼을 입고 모습을 드러낸 그 역시 그런 감정을 알고 있다는 듯,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설명했다.
“감독님 성격 아시잖아요. ‘와, 한번 도와줘’ 그러시더군요(웃음). 두말없이 알겠다고 했습니다. 초년에 김응용 감독님하고 함께하는 것이 제 코치 생활에 뜻 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한화라는 구단도 매력 있어서 왔고요. 김응용 감독님이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불렀든, 어디든 저는 달려갔을 겁니다. 사실 저도 감독님이 한화에 오신 것이 뜻밖이긴 해요. 어쨌든 감독님께서 저를 필요로 해 불렀기 때문에 선택을 했고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코치로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기아 팬들로서는 제가 그 구장에서 얼굴을 빛냈기 때문에 물론 아쉬움이 있겠지만, 선수가 아닌 코치로서 어느 팀이든 가서 지도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아 역시도 언젠가는 돌아갈 수도 있는 팀이죠. 지금 현재 한화에서 최선을 다하고 (기아로)돌아간다면 그걸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신인 시절부터 이종범의 모든 것을 보아 온 김응용 감독인 만큼 신뢰의 크기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해태시절부터 선수들에게 직접 지시하지 않고 코치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기는 김 감독의 스타일은 이번에도 여전한 듯했다.
“변하면 죽는 거야. 난 원래 지휘해 본 적이 없어요. 훈련도 잘 안시키는데… 못하면 죽는 것이 프로세계잖아요. 이종범 코치에게는 물론 기대가 많죠. 요즘 야구는 뛰는 야구 아니면 못 이기잖아요. 옛날처럼 홈런 때려서 이기는 야구는 아니니까. 이종범 코치를 데려온 것은 선수들이 전수받을게 많아서예요.”
복귀를 결심하기까지 가족들의 반대도 적지 않았다. 야구계 일각에서도 70세가 넘은 그가 과연 예전과 같은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어쨌든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복귀로 인해 내년 프로야구 시즌을 흥미진진하게 기다리는 팬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이번 겨울을 보낸 한화가 어떤 팀으로 거듭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충분히 기대할 만한 가치는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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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황정호
최선을 다해서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합니다. 언제나 꿈꾸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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