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슬플 때 힙합을 춰”라고 말하던 『언플러그드 보이』의 현겸이, 자기가 베레베레베레라는 외계인이라고 철썩같이 믿으며 우울증을 겪고 있던 소년 황보래용을 당신도 기억하시는지. 90년대 가요계에 아이돌 열풍이 일어났을 때, 만화계에는 천계영이 나타났다.
『언플러그드 보이』(1997), 『오디션』(1998)은 그야말로 ‘핫’한 만화였다. 그때 우리가 입고, 보고, 생각하던 것이 만화 속에 그대로 담겨 있었으니까. 힙합이 유행하던 시절, 엉덩이 품은 크고, 길이는 바닥에 질질 끌리던 힙합 바지를 멋들어지게 입은 주인공들. 길고 ‘예쁜’ 현겸이와 황보래용은, TV속에 나오는 너무 먼 스타와 교복 입은 내 일상 그 사이에 ‘리얼하게’ 존재했다.
사춘기 시절, 웃음도 넘치고, 주변에 가족부터 친구까지 사람도 넘치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꿈도 넘쳤지만, 미완성인 나이라서 언제나 채워지지 않았던 그 때. 나만 달라서 외롭고, 나만 달라서 특별해지고 싶던 그 시절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천계영의 만화는 나와 친구들의 로망이었다.
폼 나게 살고 싶고, 가끔 외로운 순간마저 멋있게 보이고 싶은 그런 마음. 현겸의 “난 슬플 때 힙합을 춰” 같은 대사는 소녀들에게 허세 이전에 로망이었다. 유행처럼 친구들은 『언플러그드 보이』 『오디션』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는 공책, 필기구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나도 이런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야지’ 스스로 각인이라도 시키듯, 자꾸만 눈이 가고 마음이 가게 했던 그 만화들은 순정만화이자 꿈의 만화였다.
천계영의 리얼 변신 프로젝트
천계영 만화가의 세계는 계속 커졌다. 천계영 작가는 이후에도 『DVD』(2003) 『하이힐을 신은 소녀』(2007) 『예쁜 남자』(2009) 등등 꾸준한 작품활동을 하며, 독자를 만나 왔다. 작품만으로 독자를 만나 왔기 때문에, 베일에 싸인 작가이기도 했다. 최근에는 다음에서 ‘천계영의 리얼 변신 프로젝트’ 『드레스 코드』가 인기리에 연재하고 있다. 이 패션 만화는 천계영이 직접 캐릭터로 등장해, 패션을 몸으로 공부해가며 느끼고 배운 것들을 쉽게 보여주는 웹툰이다. 천계영 자신이 주인공이 된 만화여서일까, 천계영 작가에 관한 이야기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늘 작업을 하면서 집에만 혼자 있다 보니 사람들을 피하기도 했거든요. 신비주의 전략이라고 하는데, 그런 건 아니에요. 원래 나서는 성격이 아니라서 조용히 일만 열심히 해 왔어요. 지금 하고 있는 만화는 저 자신이 변하는 ‘리얼 변신 프로젝트’다 보니, 오랜만에 많은 분이 궁금해하셔서, 그 연장선으로 이렇게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만나게 되었다. 천계영 만화가! 그러니까, 연재물에 그려져 있는 캐릭터 ‘계영’과 굉장한 싱크로율을 보였달까. 양 갈래 머리로 나타난 이날의 작가는 만화 속 ‘은희경 작가’의 캐릭터와 굉장히 유사했다. 천계영 작가는 따라 했다며 소녀처럼 웃었다. 어쨌거나 『드레스 코드』를 그리는 작가를 만나려면 드레스 코드를 제대로 맞춰 가야지 않을까 하고 옷을 고르고 골라, 평소 안 입던 옷까지 입고 꾸미고 갔는데(‘여름 패션 추천 스타일링’에 맞춰 갔는데!) 막상 그녀는 편안한 옷차림으로 취재팀을 맞아주었다.
아차, 실수했다. 그러니까 천계영 작가가 말하는 드레스 코드는 ‘내가 가장 특별해 보이는’ 것보다, ‘내가 가장 편한’ ‘내 몸이 가장 예쁜’ 데에서 시작하는 건데 말이다. 의상 코드는 어긋났으나, 이날의 대화 코드만큼은 ‘가장 편한’, ‘가장 즐거운’ 모드로 진행되었다.
독자들이 읽으면서 자기 몸의 전문가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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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반응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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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온 대로 따라 하면서 많이 예뻐졌고, 남편한테 칭찬도 받았다는 얘기도 들어요. 만화가 실제로 도움이 됐다는 피드백을 들을 때 뿌듯해요. 여자들이 비슷한 고민 하잖아요. 옷을 어떻게 입어야 하나. 이 옷이 적절한가? 저 역시 겪는 일을 하나씩 에피소드로 엮다 보니 공감을 많이 해주신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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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시즌3 준비 중이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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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조사는 이전에 해두었고, 시즌 준비하는 동안에는 어떻게 에피소드를 정리해서 체계적으로 전달할까 고민해요. 시즌 1, 2에는 이론적인 부분, 개괄적인 부분이 주로 나온다면 시즌 3부터는 아이템별로 진행될 예정이에요. 브래지어 편부터 시작하려고요. 여자들이 고민을 많이 하는 아이템이 있잖아요. 구체적인 것들 짚어서 소개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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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브래지어도 많이 사봤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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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사보고 입어보고(웃음) 제가 많은 독자를 대신해 시행착오를 많이 하고 있어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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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화려한 패션 만화를 제안 받으셨다고요. 어떻게 ‘리얼 변신 프로젝트’로 거듭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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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준비했어요. 처음에는 패션의 역사나 유명 디자이너들의 작품에 얽힌 얘기들을 공부해서 풀어보려고 했는데, 한계에 부딪혔어요. 실제로 옷이라는 건 입어봐야 아는 건데. 지식만 많다고 해서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할 수 없겠다 싶더라고요. 어떻게 해야겠다는 방향도 없이 일단 뭐든 직접 입어봐야겠다 생각했어요. 각종 매장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옷을 입어봤어요.
우리가 보통 옷을 선택할 때, 많은 옷을 입어보고 고르기보단 습관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 제 옷을 보고 점원이 추천해준 옷을 보게 되잖아요. 이제까지 내 스타일을 고민하고 발견하는 기회조차 없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평소 나라면 입지 않았을, 민망한 옷도 연구를 위해서 입어봤는데,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색깔이 저에게 어울리더라고요. 이런 과정을 통해, 만화를 보는 독자들도 나처럼 발견하고 변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작품의 방향을 ‘리얼 변신 프로젝트’로 잡았어요. -
이를테면, 길어 보이려면 상체를 짧은 걸 입어라, 길어 보이려면 V넥을 입어라 등등 단편적인 지식은 알고 있었는데 이 만화를 보니까, 그런 이론이 모두에게 해당하는 건 아니겠다 싶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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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만화가라서 보통 사람들보다 인체에 대해 공부할 기회가 많았어요. 의학 수준은 아니지만, 해부학도 공부했고요. 미술 할 때 기본적으로 뼈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사람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사람 몸의 디테일이 굉장히 다르다는 걸 알아요. 그냥 키가 작은 체형이라고 단정 지으면, 그 사람의 몸매를 살리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어떤 전문가로서 답하기보다, 독자들이 읽으면서 자기 몸에 대해 스스로 전문가가 되었으면 싶었어요.
입었을 때 내 몸이 더 예뻐 보이는 것. 그게 나한테 맞는 사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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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계영의’ 리얼 변신 프로젝트잖아요. 몸을 정말 많이 던져서(!) 작업하셨다고 들었다. 작가님 본인에게 생긴 변화가 많을 것 같은데요, 정말 옷을 잘 입게 되었나요? 어떤 변화를 겪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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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를 다 끝낼 즘에는 더 좋은 모습이 되어있겠죠.(웃음) 만화를 시작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옷 입는 스타일은 비슷해요. 다만 자료 조사하고, 연재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드러내는 게 ‘옷을 잘 입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작업 전에도 꽃무늬 레이스 옷도 많이 입어보곤 했어요. 그걸 입을 때마다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 저 답지 않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지금은 ‘이게 나답구나’하는 걸 알게 되니, 저 자신의 옷차림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이 옷을 입은 모습이 진짜 나구나. 그런 게 예전과 많이 달라진 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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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의 변화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옷 상담을 해온다거나, 작가님을 만날 때 옷에 신경을 쓴다거나.(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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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도 문자로 물어봐요. ‘내가 지금 옷을 샀는데 단추는 잠기는데 뱃살이 삐져나온다. 이거 맞는 거니?’ 제가 알고 있는 한해서는 성의껏 답을 해줘요. 가끔 옷 사이즈가 애매할 때 있잖아요. 하나는 큰 것 같고, 하나는 작은 것 같고. 그때 제가 선택하는 기준은 확실해요. 입었을 때 내 몸이 더 예뻐 보이는 것. 그게 나한테 맞는 사이즈다. 그렇게 얘기해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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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천계영 작가님의 캐릭터들을 이렇게 기억해요. 허리가 긴 남자들. 팔다리도 길쭉길쭉한 남자들. 지금의 그림체를 보고 많이 달라져서 놀랐거든요. ‘나의 일상’을 표현하기 위해 단순화하셨다고 했는데요. 그림체를 변화시키면서 어떤 고민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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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가 패션 만화를 한다고 했을 때, 다들 스타일리시한 만화를 기대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동안에는 스타일리시한 그림을 그린 건,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한 거예요. 반면 옷 자체, 몸의 구조를 정확하게 그리려고 했어요. 옷과 옷이 어떻게 어울려서 어떤 형태를 만들어내는지 명료하게 보여줘야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몸매가 좋으면 흰 티에 청바지만 입어도 예쁘잖아요. 그걸 독자들이 똑같이 따라 입는다고 해서 그 느낌이 나진 않으니까요.(웃음) 그림을 최소화, 단순화해서 옷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하려고 했어요.
『드레스 코드』 내 몸에서 출발하는 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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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패션디자이너를 꿈꿨고, 패션학과 지망생이었다고요. 패션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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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때부터 꿈이 뭐냐고 하면, 전 디자이너라고 했어요. 그리고 TV에서 가끔 해외 패션쇼 영상이 나오면 어쩐지 눈물이 났었어요.(웃음) 중학교 때 스타일화나 드레스 같은 거 많이 그리고. 이런 정도는 사실 보통 여자 친구들도 한 번쯤 겪어봤을 일 같은데, 저는 어려서부터 꾸준히 그리면서, 의상학과에 가고 싶었거든요. 그 꿈을 이루지 못해서, 늘 마음 한쪽에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지금 와서 패션에 대한 만화를 하게 되면서 한 부분에 오랫동안 관심을 두다 보면, 꿈은 비슷하게 이루어지는구나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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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상을 다 구상하려면, 스토리를 짜는 것만큼이나 오래 걸리지 않을까 싶었어요. 평소 쇼핑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자기를 꾸미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요. 패션에 끌렸던 건, 다른 이미지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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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체가 가진 아름다움이 있잖아요. 멋진 모델들이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을 때의 조형미. 움직이는 조각 같은 느낌이 좋았어요. 제가 그 옷을 입어서 비슷한 느낌이 났으면, 입고 말았을 텐데, 너무 다르니까!(웃음) 예전에 록음악을 되게 좋아했어요. 나도 저렇게 멋지게 기타를 쳐보고 싶어서, 낙원상가에 가서 기타를 사왔어요. 기타를 딱 메고 거울 앞에 섰는데 모양이 너무 아닌 거죠.(웃음) 보기도 싫어서 창고에 기타를 넣어버린 적이 있거든요. 옷도 비슷한 것 같아요. 제 머릿속에 있는 건 만화처럼 길쭉한 이미지인데. 현실이 너무 다르니까 포기하고 살았어요. 『드레스 코드』를 계기로 다른 시각에서 옷을 볼 수 있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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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각이라는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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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서 출발한 옷이요. 예전에는 어떤 옷이 예쁜 옷이고, 어떤 디자이너가 만든 옷이고, 이런 걸 생각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입어야 내 몸이 더 예쁘게 보일까? 나로부터 출발해서 옷을 생각하거든요. 시작점이 어딘가에 따라 굉장히 다른 것 같아요. 그렇게 해답을 찾아나가는 거죠. 이 작업은 조금이라도 나를 더 예쁘게 보이게 할 수 있는 옷을 찾아 나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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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코드』는 서사보다 정보성 짙은 만화잖아요. 예전에 작가님은 『The 클럽』 같은 소설을 쓸 만큼 스토리에 대한 애착을 보여주셨는데, 어떠실까 싶었어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열망이 있진 않으신지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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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사실 하고 싶은 스토리는 생각날 때마다 메모하고 있어요. 『드레스 코드』를 쓰면서 제일 풀리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일단 『드레스 코드』에 몰입할 수 있는 건, 그동안 안 해봤던 스타일의 작업이기 때문에 여기에 대한 열망도 되게 커요. 『드레스 코드』를 좋은 컨텐츠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책꽂이에 꽂아두고, 오래오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요. 예전에는 내 만화가 컵라면 같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물만 부어서 얼른 먹고 잊어버려도, 먹는 순간만큼은 즐거운. 그런 생각을 바꿔놓은 게 이 작업이에요. 그래서 도전이죠. 당분간은 전념해서 잘 만들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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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왜 컵라면처럼 잊혀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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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이 세상에 없다면? 불편하잖아요. 장인이 만든 궁중음식도 가치가 있지만,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음식도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순간적으로 큰 즐거움을 주고 빨리 잊히는 것. 그러니까 굳이 고르자면 궁중 음식보다 컵라면이 제 성향에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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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작품의 감수성이 좋아요. 『DVD』 같은 단편만 봐도 한 에피소드에서 마음을 묘하게 건드리는 장면, 대사가 있잖아요. 이를테면, 비밀번호를 잊어버린 주인공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이라는 비밀번호 힌트 질문 앞에서 온갖 사람을 떠올리는 에피소드 같은 거요. 이런 감수성의 재료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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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기억력이 아주 나빠요. 어떤 책이나 영화를 보고 나면, 전혀 기억이 안 나요. 무의식 저편에 불분명하게 저장되어 있다가, 현실에서 어떤 장면을 만났을 때, 합쳐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흔한 소재를 독특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나 할까요? 소재는 늘 일상적인 데서 찾거든요. 『DVD』에서는 전철을 타고 인도로 가기도 하잖아요.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것들을 엮는 거죠. 그게 설득력이 있게끔 이야기하는 게 기술인 것 같고요. 인도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예전에 봤던 동화나 뭔가를 엮어서 새로운 모양새를 갖추게 되는 것. 제가 창작하는 메커니즘이 그런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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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과 졸업하고 만화가로 데뷔하셨는데요. 만화 창작을 스스로 익혀나가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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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분명했어요. 그림을 정말 못 그려요. 이렇게 말하면 의외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요. 결과만 놓고 보면 다른 만화가들의 그림이랑 비교했을 때 못 그린 그림은 아닐 수 있어요. 그런 결과물을 내기까지 썼던 시간과 노력은 정말 남들의 열 배는 될 거에요. 근데 눈만 높아서, 대중 그리면 해 놓고도 맘에 들지 않았어요.
2000년대 초반까지는 맘에 들 때까지 고치고 고쳐서 완성했었어요. 그게 너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식으로 그렸다간 평생 몇 작품 못하고 죽겠다 싶더라고요. 저는 지금 3D로 작업하고 있거든요. 뎃생력이 떨어지기 때문에요. 3D가 더 쉽게 그림을 그린다기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만드는 방식이에요. 스트레스도 많이 줄고, 그림체도 많이 변했어요. -
이전에 이와 관련해서 글을 쓰신 적 있었죠. 만화가가 그림이 그리기 싫다니! 깜짝 놀랐어요.(웃음) 그리고 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없느냐고 물으셨잖아요. 인상적이었는데요. 독자나 후배들이 작가님에게 ‘정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주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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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은 어렵죠.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만 솎아낼 수 있는, 그런 때를 기다리는 게 필요한 것 같아요. 제가 그 얘기를 하게 된 건, 만화는 하고 싶은데,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어떻게 만화에서 그림 그리는 작업을 뺄 수 있을까? 그렇게 출발했던 고민이었어요. 제가 만화 작업에서 그림을 빼야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던 건, 제가 그림을 끝까지 그려봤기 때문이에요. 내가 더는 노력해도 이것은 발전이 없겠다는 판단을 하는 건 만화가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에요. 근데 정말 끝까지 해봤거든요.
지금도 누가 그림을 잘 그리는 비법을 물으면 잘 설명해줄 수 있어요. 다양한 방식으로 해봤고, 그렇게 늘기도 했고, 벽에 부딪히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충분히 노력했고, 이 결과에 대해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거죠. 처음부터 하기 싫다고 그냥 안 하기 시작하면, 할 수 있는 게 많이 남지는 않을 것 같아요. 무엇을 선택해서 그걸 포기할 때 그 과정에 정말 미련이 없어야 할 것 같아요. 시원하게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만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기 잘했다 싶을 때는 언제인가요? 만화가라서 기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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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할 때마다!(웃음) 그냥 작업하는 게 제일 재미있어요. 예를 들어 술 마실 때는 잠깐 기쁘잖아요. 다음날 힘도 들고요. 일하는 건 힘든 만큼 결과물도 나오고, 반응을 보내주는 독자도 있고요. 제일 재미있고 제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정말 좋아요. 반면 의지와 상관없이 쉬어야 할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시즌과 시즌 사이. 그럴 때 약간 우울하죠. 일을 못하다니.(웃음)
모든 도전을 다 더했을 때, 비로소 천계영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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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자면, 작가님의 삶은 점점 나아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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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최고예요. 독자들이 천계영이라는 만화가한테 어떤 걸 기대하고 있을까? 막연하지만 알 수 있거든요. 『오디션』 같은 만화를 또 해주길 바란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만화라는 게 하나의 작품이고요. 책 속에 있는 거지만, 저한테는 인생이거든요. 내가 어떤 식으로 살아야 할지 계속 결정하는 과정이에요.
그때 매우 많은 관심을 받았을 때, 아, 이렇게 사는 방식이 저한테는 좀 버겁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많은 분이 좋아해 주는 작품을 해봤으니까 이전에 안 해봤던 것들에 도전하고 싶었어요. 『드레스 코드』라는 작품이 그래서 저한테 의미가 커요. 이것도 만화가가 아니면 해보지 못했던 도전이라고 생각하니, 제가 사는 이 방식이 정말 맘에 들어요. 이런 새로운 모험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기쁘고요. 지금이 최고로 즐거운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신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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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코드』는 8권에서 10권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다음 작품은 또 새로운 걸 보여드리려고요. 천계영이 『예쁜 남자』를 하더니, 『드레스 코드』를 하더니 이번에는 또 의외다!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요.
혹자는 그랬다. 천계영 작가의 좋은 시절은 『언플러그드 보이』 『오디션』 때라고. 그건, 우리가 가장 뜨거웠던 시절, 만화를 가장 뜨겁게 받아들였던 시절이 그때였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에게는 달랐다. 그녀는 매일 좋은 시절을 갱신해가고 있었다. 결과보다도 도전 그 자체가 삶의 큰 기쁨이라면, 그녀는 앞으로도 어떤 작품을 선보이든 즐겁게 작업하겠구나 싶었다. 독자들의 기대를 살짝 배신(!)해가며 자기 안에 새로운 것을 꾸준히 내보이고 있는 작가는, 먼 훗날 돌아봤을 때 그 모든 것이 천계영이라는 이름으로 꿰어져 있는 ‘천계영 월드’를 꿈꾼다고 했다. 모두 다르지만, 결국 하나인 것. 그녀 머릿속 마음속 곳곳의 일부분이겠지만, 결국 천계영의 모든 것. 그녀가 앞으로 내보이는 작품을 꾸준히 따라 읽으며, 그곳, ‘천계영 월드’에 한번 도착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드레스 코드 천계영 글,그림 | 예담
『드레스 코드』는 『오디션』 『예쁜 남자』 『하이힐을 신은 소녀』의 천계영 작가가 데뷔 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웹툰이다. 옷 쇼핑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패션에 전혀 관심도 없이 일명 ‘고시생 패션’을 고수하던 천계영 작가가 자신의 몸과 스타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도전하여 조금씩 ‘스타일리시하게‘ 변화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옷은 어디에서 어떤 것을 살지, 옷값은 어떻게 쓸지 등부터 시작해서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가릴 수 있는 실루엣과 네크라인, 칼라, 소매의 비밀까지…
김수영
summer2277@naver.com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중요한 거 하나만 생각하자,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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