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무죄, 무전유죄’ 대한민국을 뒤흔든 역대 3대 탈옥 사건의 전말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이라는 대담 코너를 담당하던 2000년 3월, 교도소에서 나온 지 1년3개월 된 조세형씨를 직접 섭외했던 적이 있다. 그는 전화 한 번에 흔쾌히 응했다. 대담 자리에 와서는 비상한 기억력과 방대한 독서량이 엿보이는 지식, 구수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를 바라보며 ‘대도’에 대한 존경심까지 품었던 기억이 있다.
201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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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선고받은 아이가 하나 있었는데, 아들 뻘 됐지. 스물여덟 살이었는데, 신창원 못잖은 강단이 있고 영리한 놈이었어. 근데 어느날 탈옥 계획을 세워 갖고 와서 자문을 구하는 거라. 계획이 그럴 듯해. 근데 하지 말라고 했어요. 우리나라 탈옥사건들 죽 비춰볼 때 다 말로가 비참하잖아?”
누구의 말일까.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은밀히 탈옥 컨설팅까지 의뢰받는 인물.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교도소를 벗어나는 것만 탈옥이 아니다, 항만 봉쇄가 너무 철통같아 함부로 빠져나갈 수도 없다. 탈옥을 하면 또 지하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건 징역살이보다 더 괴롭다’ 그렇게 며칠 설득을 했어요.”
80년대 ‘대도’로 이름을 날렸던 조세형씨의 말이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이라는 대담 코너를 담당하던 2000년 3월, 교도소에서 나온 지 1년3개월 된 조세형씨를 직접 섭외했던 적이 있다. 그는 전화 한 번에 흔쾌히 응했다. 대담 자리에 와서는 비상한 기억력과 방대한 독서량이 엿보이는 지식, 구수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를 바라보며 ‘대도’에 대한 존경심까지 품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탈옥을 상담하는 후배에게 ‘비참한 말로’라는 표현을 쓰며 말렸다고 했다. 정말 비참한가. 아버지의 스크랩 제15권(1983년)을 펼친다. 내처 스크랩 제21권(1988년)과 제23권(1990년)도 펼친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세 가지 탈옥사건에 관해 쓴다. 그들의 비참한 말로에 관하여 쓴다.
제목이 ‘대도 조세형 대낮 대탈주’다. 기사내용처럼, 그는 TV 드라마 속의 죄수처럼 탈출했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다가 대기 중인 구치감에서 순식간에 수갑과 포승을 푼 뒤 복도 벽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도주했다. 그 뒤 건물 옥상과 옥상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깜쪽같이 사라졌다.
조세형은 상습절도범이었다. 1983년 검거 이전에도 절도죄만으로 6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고아로 자라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던 그였다. 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감호1)까지 청구돼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론의 동정과 은근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는 주로 고위공직자, 기업체 사장 등 부유한 집만을 골라 귀금속과 금품을 훔쳐왔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도’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마치 의적처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우리 사회의 빈부갈등에 따른 위태로운 위화감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절도를 당한 이들이 오히려 쉬쉬하며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집안에 고가의 귀금속과 거액의 현금이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들이었다. 조세형은 부유층 주택만 노렸고, 사람을 해치는 강도짓은 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게 한 적 없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한데도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가슴에 총을 맞았다. 훅 갈 뻔 했다. ‘비참한 말로’가 일찍 닥칠 뻔 했다. 다행히 살았다. 하느님이 도왔다. 그는 80년대 어린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콩콩 등으로 완강히 저항했다. 끝내 총을 맞고서야 제압당했음은 ‘대도’의 자존심과 체면을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한 달 뒤 재판에서 징역 10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결손가정에서 보호자 없이 자라다가 범죄에 빠져들었으나 사회로부터 개과천선의 기회를 받지 못하였고 범행의 수단, 방법이 강도나 상해에 이르지 않고 흉기 소지도 없이 이뤄진 단순 절도로서 흉악범이라 볼 수도 없으며 법정에서 전부 자백하는 등 개전의 정이 뚜렷하고 또한 도주에 대하여는 교도소 내부에서의 징계와 체포 당시의 총상 등으로 응징을 당하였으므로 양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법원사>)는 이유였다. 괘씸죄였을까. 1983년 9월20일 항소심 재판부는 더 무겁게 선고를 내린다. 징역 15년 및 보호감호 10년. 도합 25년을 감방에서 썩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청송교도소 독방에서 긴 수감생활을 하던 조세형은 1998년 11월26일 출소했다. 16년만이었다. 조세형이 청구한 보호감호처분에 대한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항소심 재판부가 석방 결정을 내렸다. 당시 판결문은 이랬다. “조씨가 이미 50대 중반에 이르러 과거와 같이 대담하고도 민첩함을 요하는 절도범행을 할 육체적 능력이 많이 퇴화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2000년 대담 자리에서 만난 조세형은 삼성의 보안경비 회사 에스원의 범죄예방연구소 전문위원이었다. 그는 1983년 총을 맞고 잡혀 다시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도 재탈옥을 시도했고, 인권유린에 항의하기 위해 교도관을 인질로 삼아 며칠간 대치를 하다가 야만적인 보복을 당했다는 등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대담 내내 교도소 민주화를 강조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범죄의지를 불태우는 이들의 교화작업을 위해 민영화 교도소를 짓고 싶다”는 구상도 밝혔다. 당시 떠들썩했던 탈옥수 신창원2)에 관해서도 “하나의 흉악범죄자에 불과하다. 창원이도 겸손하게 자기 행동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재범의 길로 들어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고관대작의 집을 털다 검거됐다. 새로운 인생계획을 면전에서 접했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일본에서 3년여 간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2005년 3월 다시 서울 서교동 주택가 절도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또 2009년 4월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금은방 강도사건…. 언론에선 ‘대도’였던 조세형이 서민을 상대하는 ‘좀도둑’으로 전락했다고 비아냥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대도’의 비참한 말로였다. 명예의 추락, 정신적인 죽음.
뜻밖에도 2009년 금은방 사건은 조세형이 신청한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가 났다. 2011년 12월의 1심 재판에 이어 2012년 7월의 항소심 재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는 “모든 게 모함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일본에서의 절도와 2005년 사건이 범죄목적이 아니었다는 항변이다. 2011년 12월부터 자유의 몸이 된 조세형은 현재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책으로 ‘항간의 오해’를 풀겠다고 한다. ‘비참한 말로’를 반전시킬 마지막 기회가 남은 셈일까.
또 다른 탈주사건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린 지 6일 되던 날이었다.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미결수 12명이었다. 조세형이 구치감의 환풍기를 뚫었다면, 이들은 호송버스를 탈취했다. 버스 안에서 교도관을 제압하고 권총까지 빼앗았다.3)호송버스를 돌려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낮12시경 서초동 공무원교육원 앞에 버스를 버리고 흩어진다.
사건발생 당일 5명은 서울 한남동의 룸살롱과 남태령고개, 미아동 등에서 검거됐다. 6일 뒤엔 손동완 등 2명이 추가로 잡혔다. 나머지 5명은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문엔 “시민들이 불안해 한다”는 기사가 났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대학4학년에 다니던 나는, 자취방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나운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탈주범들과 경찰의 긴박한 대치가 ‘실제상황’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 8일간이나 잡히지 않은 탈주범 5명 가운데 4명, 지강헌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이 거기 있었다.
언론에서는 ‘발악’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피어린 절규’였다. 35세로 탈주범 중 최연장자이자 리더격이었던 지강헌은 인질로 삼은 고선숙씨 옆에서 권총을 들고 말들을 쏟아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여기서 ‘전경환’은 중요한 키워드다. 지강헌은 5공시절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녔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자신을 비교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전경환’을 찾아봤다. 그는 1988년 2월25일 취임한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벌인 5공 비리 청산의 주요 대상으로, 1988년 스크랩에 뻔질나게 나왔다. 1988년3월31일치 <동아일보>는 ‘공금횡령 등 78억 6개 죄목’이라는 제목으로 전경환의 구속수감 뉴스를 전한다. 검찰청사로 들어가다 한 시민에게 뺨을 맞는 사진도 있다. 6개월 뒤 1심 재판에서 전경환은 ‘7년 형’을 선고받는다. 1988년9월6일치 <한국일보>의 제목은 “‘유죄’엔 초조ㆍ‘7년’ 듣고 여유”다. “퇴정 때 방청객에 손을 흔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전경환이 상습횡령범이었다면, 지강헌은 상습절도범이었다.(지강헌을 비롯해 탈주범들은 대부분 절도범이나 폭력범들로 흉악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세형처럼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원을 거쳤던 그가 훔친 액수는 ‘78억원 알파’인 전경환의 횡령액에 비하면 껌값이었다. 600만원도 안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은 전경환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조세형의 탈옥동기 중 하나도 이중처벌이었던 이 ‘보호감호’였다) 도합 17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지강헌은 경찰병력 철수와 봉고차를 대기시킬 것을 경찰에 요구한다. 설사 봉고차를 대기시킨다고 안전하게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앞에서 나온 조세형의 말처럼 “항만봉쇄가 철통같아” 영원한 도주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지강헌은 탈주범 중 한 명인 강영일을 밖으로 내보내 자수하도록 한다. 강영일이 마당을 서성이다 돌아오려고 하자 발밑에 총을 쏘며 제지한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당시 밖에서는 강영일의 어머니가 경찰의 호출을 받고 와 자수를 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반발하던 한의철이 지강헌의 총을 빼앗아 자살하고, 안광술도 그 총으로 뒤이어 자살한다. 최후의 1인으로 남은 지강헌. 그는 경찰에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틀어줄 것을 요구한다. 경찰의 착오로 스콜피언스의 ‘할리데이’를 틀어줬다는 설도 있지만, 지강헌이 경찰에게 받은 비지스의 ‘할리데이’ 테이프를 집에 있던 카세트로 틀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2006년 SBS ‘TV박스오피스’)
비지스의 ‘할리데이’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지강헌은 창가에서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긋다가 경찰의 저격을 받는다. 오른쪽 무릎과 하복부에 총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숨지고 만다.4) 쓰러진 인질범을 안타까워하며 울부짖던 인질 고선숙.(비록 인질극을 벌였지만 그들은 고영서씨 가족에 깎듯한 예의를 갖추고 위해가 되는 행동은 삼갔다고 한다) 나는 탈주범 지강헌의 ‘비참한 말로’를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복기할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들은 ‘죽음의 일요일 한낮’을 보냈다. 조가(弔歌)처럼 흘렀을 비지스의 ‘할리데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고…. “오 당신은 휴일 같은 사람/ 정말 그런 사람/(중략) 오 그것은 우스운 게임/ 항상 같을 거라 믿진 마요/ 내가 방금 한 말도 생각나지 않지요/ 내 머리에 부드러운 베개를 얹어줘요/ 많은 사람들이 알지요/ 왜 내가 아직도 눈이 멀었는지를.”
조세형처럼 구치감의 환풍기 구멍을 뜯지 않았다. 지강헌처럼 이감 도중 호송버스를 탈취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아예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박봉선 신광재 김아무개 3명은 감방 창문에 설치된 철책 2개를 쇠톱으로 자르고 사물함으로 쓰이는 선반으로 2.7m짜리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그리고 이틀도 되지 않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였다. 서슬퍼런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헌법상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겠다며 범죄척결 의지를 밝힌 게 10월13일. 아버지의 스크랩에 있는 1990년 10월14일치 <한국일보>기사를 읽어본다. “정부는 모든 외근경찰관을 무장시키는 등 검찰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범죄와 폭력에 정면대응할 것…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은 일과성조치로 끝나지 않고 국민이 불안에서 벗아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러한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게 미흡하다면 (특별법 제정 등)특단의 대책도 강구할 것.” 한편으로는 날로 흉악해지는 범죄자들을, 또 한편으로는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으로 이어지던 남북 민간교류 움직임과 학생ㆍ노동자들의 시위를 겨냥한 조치였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탈옥을 감행했다. 그 뒤 경찰의 검문을 받다가 실탄 6발이 장전된 권총까지 빼앗았다. 이틀 만에 대전에서 경찰 감시망에 걸린 이들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대청호 안으로 숨어든다.
이 사진은 유명하다. 대전일보 기자가 찍었다. 다음날 모든 일간지가 1면에 받아 실었다.(이 사진은 <대전일보>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다. 사진을 찍은 전재홍 기자는 얼마 뒤 <조선일보>로 스카웃되었다)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차례대로 권총을 이용해 목숨을 끊는 모습이다. 박봉선은 앉은 채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고, 신광재는 선 채로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살인범이었다. 피를 묻히지 않았던 1983년의 조세형이나 1988년의 지강헌을 비롯한 영등포교도소 탈주범들과 다른 점이다. 박봉선은 무기징역을, 신광재는 징역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비해 함께 탈주했던 열일곱 살 김아무개 군은 폭력 초범이었다. 1년만 형을 살면 나오게 돼 있었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김 아무개군의 이런 처지를 참작했는지, “먹을 것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주어 사실상 경찰에 잡히도록 한다. 마치 지강헌이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어린 강영일을 경찰에 보낸 상황과 비슷하다.
자수를 할 수는 없었을까? 그들은 “먹을 것을 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다. 탈옥 뒤 굶주림에 시달렸으리라. 경찰은 먹을 것을 줄 수 없었을까? 여유를 주고 배를 채우게 했다면,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악과 독기가 조금은 완화되지는 않았을까? 경찰은 토끼사냥을 하듯 탈주범들을 호수 끝으로 내몰았다. 먹을 것 대신 경찰 검거조는 조준사격을 준비했다. 서부활극을 연상케 하는 대청호 야산기슭에서의 살인게임.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탈옥극의 전모는 영구 미스터리로 남았다. 경찰에 잡힌 김아무개군은 단순공범이라 아는 게 없었다. 직경 2cm나 되는 쇠창살을 어떻게 잘랐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수시로 감방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이 작업을 완성하려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지강헌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탈옥수와 교도관의 내통 의혹이 이는 건 당연했다. 교도소 쪽은 검찰수사를 받은 김아무개군을 기자들에게 딱 3분만 공개하고 전주교도소에 바로 수감했다. 기자들은 한 개의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박봉선과 신광재. 사람을 죽였고, 모범수의 길 대신 감옥을 뛰쳐나와 야수처럼 날뛴 두 사람. 그들에 관한 기사를 보며 가장 마음이 아팠다. 조세형은 인생 절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노년엔 ‘좀도둑’이라는 험담을 들었을망정 끝내 자유를 얻었다. 아마 현재 집필 중인 자서전에서 원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리라. 지강헌은 죽기 전 생중계 카메라에 대고 마음껏 소리 질렀다. 단말마적 저항이었지만, 그가 남긴 말들은 그 어떤 저널리즘보다 시대의 모순을 후벼 판 명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지강헌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않는가. 더구나 그가 사랑한 음악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에 스며들었고, 마지막 몸부림은 영화 <할리데이>(2006년)로 부활했다.
박봉선 신광재는 어떠한가. 대특종 사진으로 길이 남을 비극적 최후의 순간은, 그것을 포착해낸 사진기자만을 빛나게 했을 뿐이다. 박봉선 신광재는 누구냐! 이름을 기억하는 이 별로 없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는지, 교도소에서 어떤 처지였는지, 왜 탈옥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들은 긴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마음껏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독 안에 갇혀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탈옥수들의 비참한 말로’에도 등급이 있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최악이었다.
1) 사회보호법에 의거해, 수감된 피고인에 대해 재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수감생활을 마친 뒤 별도로 일정기간 감호소에 머물도록 하는 조치. 5공 때 만들어진 이 제도는 이중처벌과 인권침해논란으로 결국 2005년 7월 폐지됐다.
2) 19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 화장실 환기구 철창을 잘라내고 달아난 탈옥수(당시 30세). 그는 무려 2년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였다. 이 글에 나오는 세 건의 탈옥과는 도피의 능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탈옥 뒤에도 여러 차례 경찰과 맞닥뜨렸으나 격투 끝에 도주했다. 1999년 7월에야 경찰에 잡혔다. 조세형이 ‘대도’였다면 신창원은 ‘슈퍼맨’이었다. 홍길동에 빗대 ‘신길동’이라는 별명까지 나왔고 <깜빵 탈옥수 신창원>이라는 실명 만화도 등장했다. 신드롬 현상이 일 정도였다.
3) 검찰이 탈주범 중 검거된 손동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강헌은 호송버스에 타기 전 교도관으로부터 수갑열쇠를 건네받아 입속에 감추고 있었다. 다른 탈주범들도 쇠꼬챙이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은 채 버스에 올랐다. 이 쇠꼬챙이는 교도소 내 의무실의 철제침대 받침살을 뽑아 만든 것이었다. 교도관이 탈주범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정해창 법무부장관과 이춘구 내무부장관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동아일보>1988년 10월15일치)
4) 탈주범 12명 중 유일하게 잡히지 않았던 김길호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실크인쇄공장에 취직해 일하다가 탈주사건 발생 21개월만인 1990년 7월1일 경찰에 검거됐다.
누구의 말일까.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은밀히 탈옥 컨설팅까지 의뢰받는 인물. 그의 말을 더 들어보자. “‘교도소를 벗어나는 것만 탈옥이 아니다, 항만 봉쇄가 너무 철통같아 함부로 빠져나갈 수도 없다. 탈옥을 하면 또 지하 생활을 해야 하는데, 그건 징역살이보다 더 괴롭다’ 그렇게 며칠 설득을 했어요.”
80년대 ‘대도’로 이름을 날렸던 조세형씨의 말이다. 시사주간지 <한겨레21>에서 ‘쾌도난담’이라는 대담 코너를 담당하던 2000년 3월, 교도소에서 나온 지 1년3개월 된 조세형씨를 직접 섭외했던 적이 있다. 그는 전화 한 번에 흔쾌히 응했다. 대담 자리에 와서는 비상한 기억력과 방대한 독서량이 엿보이는 지식, 구수한 입담으로 좌중을 휘어잡았다. 그를 바라보며 ‘대도’에 대한 존경심까지 품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탈옥을 상담하는 후배에게 ‘비참한 말로’라는 표현을 쓰며 말렸다고 했다. 정말 비참한가. 아버지의 스크랩 제15권(1983년)을 펼친다. 내처 스크랩 제21권(1988년)과 제23권(1990년)도 펼친다.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세 가지 탈옥사건에 관해 쓴다. 그들의 비참한 말로에 관하여 쓴다.
‘대도’ 조세형 대낮 대탈주 구치감 환풍기 뚫고 전과11범인 대도 조세형(39)이 14일 하오 3시25분께 서울중구 서소문동 법원구내 구치감에서 TV드라머 속의 죄수처럼 탈출해버렸다. 조는 이날하오2시께 서울형사지법 14부 심리로 열린 자신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사건 결심공판을 마치고 구치소로 넘겨지기 직전 다른 피고인들이 재판을 받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구치감 벽의 환기통을 뜯고 탈주, 담을 뛰어넘어 이웃 한일병원을 통해 시내로 잠입해 버린 것이다. 이웃 건물 옥상에서 수의 바꿔입어 면회객 가장 탈출도운 공범 있는듯 사장-고관집대상 5억털어 무기징역 탈출에 성공한 조는 이날 하오 7시와 11시께 두 차례에 걸쳐 공중전화로 공범인 단골장물아비 정윤용씨(37ㆍ구속수감중) 집(서울서대문구홍제동322의119ㆍ 태진연립주택 다동101호)에 전화를 걸어 정씨부인 양모씨에게 “탈출했는데 돈이 없다. 30만원만 구해 달라”고 요구한 사실이 밝혀져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은신해 있거나 도피자금 마련을 위한 범행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서울구치소는 조가 탈출직후 구치감과 이웃한 송치피의자 구치감 2층 옥상에서 조가 벗어놓은 수의 한 벌을 발견, 공범이 미리 준비해 놓은 일반 옷으로 바꿔 입고 도망한 것으로 보고 경찰과 합동으로 추적중이다. 구치소는 이와함께 조가 수감중 면회객을 가장한 공범과 탈출극을 모의했을 것으로 보고 그동안 조를 면회 온 사람들을 모두 찾고 있다. 조는 상습특수절도전과만 11범으로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10여 차례에 걸쳐 정부고관, 국회의원, 기업체 사장 등 부유층집만을 상대로 5억원 상당의 금품을 훔친 혐의로 지난해 11월28일 서울동대문경찰서에 구속돼 지난 2월25일 결심공판에서 무기징역에 보호감호10년이 구형됐었는데 경찰이나 범죄사회에서 대도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탈주경위】 조는 이날 하오2시 공범4명을 포함한 다른 사건 피고인 15명과 함께 형사법원 대법정에 입정, 담당재판부 (재판장 김성만 부장판사) 심리로 40분가량 재판을 받았다. 재판이 끝난 뒤 조는 다른 피고인 7명과 함께 교도관의 호송을 받으며 법정에서 20m가량 떨어진 서울구치소 피고인대기 구치감으로 가 3층 22호실에 다른 피고인 3명과 함께 입감됐다. 입감직후인 3시25분께 3층담당 교도관이 2층에 내려가 2층담당 교도관과 잠시 대화를 나누는 순간 조는 22호실 문을 발로차고 복도로 나와 한쪽 수갑을 푼 후 포승도 풀어 복도에있던 책상위에 버리고 복도 벽에 붙은 환풍기(40x40cm) 를 뜯어내고 40cm 가량 떨어진 송치피의자구치감 2층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조는 옥상에서 입고 있던 남청색 미결수복을 벗어버리고 한쪽 손에 수갑을 찬 채 1ㆍ2m쯤 아래인 법원구내매점옥상으로 다시 뛰어내려 이웃 한일병원 담을 넘어 달아났다. 조가 탈주할 당시 구치감 정면에 있는 교도관대기실에 5∼6명의 호송교도관이 있었으나 피고인들의 입ㆍ출감이 잦아 조의 탈출을 눈치 채지 못했다. 조는 탈주당시 노란T셔츠에 하의는 미결수복차림이었는데 신발은 털신을 신고 있었다.(하략) (<한국일보>1983년 4월16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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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대도 조세형 대낮 대탈주’다. 기사내용처럼, 그는 TV 드라마 속의 죄수처럼 탈출했다. 서울 서소문에 있는 서울형사지방법원에 재판을 받으러 갔다가 대기 중인 구치감에서 순식간에 수갑과 포승을 푼 뒤 복도 벽의 환풍기를 뜯어내고 그 구멍으로 도주했다. 그 뒤 건물 옥상과 옥상 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깜쪽같이 사라졌다.
조세형은 상습절도범이었다. 1983년 검거 이전에도 절도죄만으로 6번이나 실형을 선고받았다. 고아로 자라 소년원을 제집처럼 들락거렸던 그였다. 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감호1)까지 청구돼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여론의 동정과 은근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법원행정처가 펴낸 <법원사>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그는 주로 고위공직자, 기업체 사장 등 부유한 집만을 골라 귀금속과 금품을 훔쳐왔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대도’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마치 의적처럼 보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우리 사회의 빈부갈등에 따른 위태로운 위화감이 표출되기도 하였다.”
절도를 당한 이들이 오히려 쉬쉬하며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집안에 고가의 귀금속과 거액의 현금이 있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은 유력 정치인과 기업인들이었다. 조세형은 부유층 주택만 노렸고, 사람을 해치는 강도짓은 하지 않았다. 피 한 방울 흘리게 한 적 없다는 것은 그의 자부심이었다. 한데도 검찰은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조세형 총쏴 잡았다 시민제보→경찰추격→인질대치 흉기 휘두르다 가슴 1발 맞아 어제 서울 장충동 주택가서 대도 조세형(39)이 탈주6일째인 19일 상오10시40분께 서울 중구 장충동에서 경찰관이 쏜 권총에 맞고 검거됐다. 조는 이날 상오 10시12분께 이원주군(18ㆍ재단사)이 목격하고 신고함에 따라 경찰의 추격 끝에 잡힌 것이다. 이군은 이날 모교인 해동상업전수학교로 졸업증명서를 떼러가던 길에 장충동 112앞 골목길에서 조를 발견, 50여m쯤 떨어진 서울 중부경찰서 장충파출소에 신고했으며 박용호 순경(30)과 정경주 순경(35)등 2명이 전경4명, 이군과 함께 30여분동안 조를 추격, 서울 중구 장충동2가112의 4 김지억씨(50)집에 숨어있는 것을 포위했다. 그러나 김씨의 아들을 인질로 잡고 스카이콩콩과 드라이버, 톱 등으로 완강히 버텨 박순경이 권총 4발(2발은 공포)을 발사, 이중 1발이 조의 귀를 스치고 가슴에 박혔다. 조는 이날 경찰의 추격을 받는 동안 인근 주택 9채의 담과 지붕ㆍ장독대 증을 곡예하듯 넘나들다 김씨 집에 들어갔으며 화장실에서 김씨의 2남 승환군(19ㆍ명지대 2년)을 인질로 잡고 대치했었다. 경찰은 처음 조에게 자수를 권유, 듣지 않자 가스분사기를 발사했는데 조는 드라이버로 자해하겠다며 완강히 대항했다. 총상을 입은 조는 이날 상오11시50분께 서울중구저동2가61의7 영락병원을 거쳐 백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수술을 받고 하오3시12분 서울구치소로 옮겼다. 조는 백병원에서 박효일 신경외과 과장(42)의 집도로 왼쪽 늑골에 박혀있는 탄환 한발의 제거수술을 받았는데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 (중략) 한편 조는 이날 하오2시15분께 백병원 회복실에서 “탈주는 공모자가 없는 단독범행이었고 범행동기는 절도로 무기징역을 받아 억울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그동안 서울시내에서 계속 혼자 도망다녔고 양형숙씨에게 전화한 것도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한국일보> 1983년 4월20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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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총을 맞았다. 훅 갈 뻔 했다. ‘비참한 말로’가 일찍 닥칠 뻔 했다. 다행히 살았다. 하느님이 도왔다. 그는 80년대 어린이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스카이콩콩 등으로 완강히 저항했다. 끝내 총을 맞고서야 제압당했음은 ‘대도’의 자존심과 체면을 살려주기에 충분했다.
“영동서 줄칼사 수갑 끊었다” 검찰, 조세형 탈주경위 등 조사결과 밝혀 한손 수갑 찬 채 이틀간 시내 배회 미 거쳐 브라질서 부인과 살 계획 서울지검은 총상의 상처로부터 회복되기 시작한 조세형을 심문, 조가 탈주를 결심한 것은 자신이 무기징역이 구형된 데다 보호감호 10년까지 청구돼 15~20년간을 복역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나이가 60이 가까워지므로 부인 나영씨와의 결혼생활이 지켜질 수 없다고 생각, 어떤 방법으로든지 탈주하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조사결과를 밝혔다. 조는 탈출 후 미국을 거쳐 브라질에 정착한 뒤 홍콩에 있는 부인 나씨를 불러들일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검찰발표에 의하면 조는 부인 나씨와 결혼하기 전에도 브라질에 함께 이민가 살기로 약속했었다는 것. 또 수갑을 푼 것은 형사대법정 대기실에서 교도관에게 손목의 통증을 호소, 수갑을 느슨하게 해준 것을 이용해 구치감에서 왼손을 빼내 탈주할 수 있었으며 탈주 후 한쪽손에 수갑을 매단 채 서울 시내를 배회하다가 15일 하오 1시께 후암동에서 한차례 절도를 해 돈을 마련, 16일 상오 10시께 영동의 모 철물점에서 줄칼을 사서 이웃빌딩 화장실에 들어가 오른쪽에 차고 있던 수갑의 알루미늄부분을 절단했고 서울 강남구 신사동 리버사이드 호텔과 반포동 뉴코아쇼핑센터 사이의 간선도로 옆 하수도 맨홀에 그 수갑을 버렸다고 자백, 20일 하오 현장에서 찾아내 증거물로 회수했다는 것. 조는 구치감 22호실에서 손목을 비틀어 느슨해있던 수갑에서 왼손을 빼내고 팔목에 매어져있던 포승의 매듭을 풀어 탈주준비를 갖추었으며 3층에 교도관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방에서 나와 복도에서 포승을 풀고 교도관용 책상에 올라가 환풍기를 밖으로 밀어제치고 탈출했다.(하략) (<한국일보> 1983년 4월21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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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한 달 뒤 재판에서 징역 10년과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결손가정에서 보호자 없이 자라다가 범죄에 빠져들었으나 사회로부터 개과천선의 기회를 받지 못하였고 범행의 수단, 방법이 강도나 상해에 이르지 않고 흉기 소지도 없이 이뤄진 단순 절도로서 흉악범이라 볼 수도 없으며 법정에서 전부 자백하는 등 개전의 정이 뚜렷하고 또한 도주에 대하여는 교도소 내부에서의 징계와 체포 당시의 총상 등으로 응징을 당하였으므로 양형이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법원사>)는 이유였다. 괘씸죄였을까. 1983년 9월20일 항소심 재판부는 더 무겁게 선고를 내린다. 징역 15년 및 보호감호 10년. 도합 25년을 감방에서 썩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청송교도소 독방에서 긴 수감생활을 하던 조세형은 1998년 11월26일 출소했다. 16년만이었다. 조세형이 청구한 보호감호처분에 대한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항소심 재판부가 석방 결정을 내렸다. 당시 판결문은 이랬다. “조씨가 이미 50대 중반에 이르러 과거와 같이 대담하고도 민첩함을 요하는 절도범행을 할 육체적 능력이 많이 퇴화돼 재범의 가능성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2000년 대담 자리에서 만난 조세형은 삼성의 보안경비 회사 에스원의 범죄예방연구소 전문위원이었다. 그는 1983년 총을 맞고 잡혀 다시 교도소에 들어간 뒤에도 재탈옥을 시도했고, 인권유린에 항의하기 위해 교도관을 인질로 삼아 며칠간 대치를 하다가 야만적인 보복을 당했다는 등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그는 대담 내내 교도소 민주화를 강조했다. 그는 “교도소에서 범죄의지를 불태우는 이들의 교화작업을 위해 민영화 교도소를 짓고 싶다”는 구상도 밝혔다. 당시 떠들썩했던 탈옥수 신창원2)에 관해서도 “하나의 흉악범죄자에 불과하다. 창원이도 겸손하게 자기 행동을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재범의 길로 들어서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2001년 일본에서 고관대작의 집을 털다 검거됐다. 새로운 인생계획을 면전에서 접했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일본에서 3년여 간 수감생활을 했던 그는 2005년 3월 다시 서울 서교동 주택가 절도사건에 휘말린다. 그리고 또 2009년 4월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 금은방 강도사건…. 언론에선 ‘대도’였던 조세형이 서민을 상대하는 ‘좀도둑’으로 전락했다고 비아냥거렸다. 이것이야말로 ‘대도’의 비참한 말로였다. 명예의 추락, 정신적인 죽음.
뜻밖에도 2009년 금은방 사건은 조세형이 신청한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무죄가 났다. 2011년 12월의 1심 재판에 이어 2012년 7월의 항소심 재판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는 “모든 게 모함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일본에서의 절도와 2005년 사건이 범죄목적이 아니었다는 항변이다. 2011년 12월부터 자유의 몸이 된 조세형은 현재 자서전을 집필중이다. 책으로 ‘항간의 오해’를 풀겠다고 한다. ‘비참한 말로’를 반전시킬 마지막 기회가 남은 셈일까.
탈주범 출몰…시민들 공포 떼지어다녀 어디에 나타날지 가슴 조여 금융기관 습격대비 경비 강화 한낮에 호송버스를 탈취, 집단 탈출한 미결수들은 권총을 갖고 서울시내에 나타나 절도행각과 인질극을 벌이는 등 ‘제2, 제3의 범행’을 서슴지 않고 있다. 탈주 미결수 12명중 5명은 8,9일 이틀 사이 검거됐으나 나머지 7명은 사건발생 만 이틀이 지난 10일 오전 현재 시내에 잠복한 채 경찰과 군의 추격을 받고 있다. 시민들은 이들이 대낮에 호송버스 안에서 탈주극을 벌일 수 있도록 허술했던 계호행정에 충격과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이들의 또다른 범행을 우려하며 불안해하고 있다. ◇제2의 범행=탈주주범 지강헌씨(35)등 7명은 9일 새벽2시반경 서울 성북구안암동 3가 132의13 손병록씨(51ㆍ약국경영)집의 열려있던 대문을 통해 침입했다. 이들은 안방에서 잠자던 손씨부부를 깨운 뒤 건넌방 등을 차례로 뒤져 각각 잠자던 장남 우식군(18ㆍY고3년)과 장녀 은숙양(24ㆍS여대2년) 등 일가족 4명과 이찬정씨(20)등 약국종업원 2명을 안방에 몰아넣고 권총과 30cm가량의 칼 등을 내보이며 “우리는 TV에 나온 탈주범이다. 소리치면 모두 죽인다”고 위협, 넥타이등으로 손발을 묶은 뒤 이불을 덮어씌웠다. 인질극을 벌이던 탈주범들은 27시간만인 10일 새벽 6시 반 달아났다. (하략) (<동아일보> 1988년 10월10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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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탈주사건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막을 내린 지 6일 되던 날이었다. 1988년 10월8일 서울 영등포교도소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미결수 12명이었다. 조세형이 구치감의 환풍기를 뚫었다면, 이들은 호송버스를 탈취했다. 버스 안에서 교도관을 제압하고 권총까지 빼앗았다.3)호송버스를 돌려 서울로 돌아온 그들은 낮12시경 서초동 공무원교육원 앞에 버스를 버리고 흩어진다.
사건발생 당일 5명은 서울 한남동의 룸살롱과 남태령고개, 미아동 등에서 검거됐다. 6일 뒤엔 손동완 등 2명이 추가로 잡혔다. 나머지 5명은 어디로 갔는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신문엔 “시민들이 불안해 한다”는 기사가 났다.
‘신촌 독안의 5명’ 또 놓쳤다. 탈주범 사건 탈취차 타고 침입 민가 물색 중 1명만 잡혀 경찰의 삼엄한 경비망 속에 서울시내 곳곳에 출몰, 강도인질극을 일삼고 있는 탈주범 6명이 14일 밤 신촌에 나타나 또다른 범행장소를 물색하다 이중 손동완씨(26)가 경찰에 검거됐다. 경찰은 14일 밤 손씨를 검거하고 신촌일대에 비상경계망을 폈으나 15일 오전 현재 달아난 나머지 범인 5명의 행적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어 시민들은 이들이 언제 어디서 나타나 또다른 범행을 저지를지 몰라 크게 불안해 하고 있다.(하략) (<동아일보> 1988년 10월15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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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일요일이었다. 대학4학년에 다니던 나는, 자취방에서 늦잠을 자고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었다. 아나운서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탈주범들과 경찰의 긴박한 대치가 ‘실제상황’으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장소는 서울 북가좌동의 가정집. 8일간이나 잡히지 않은 탈주범 5명 가운데 4명, 지강헌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이 거기 있었다.
탈주범 가정집서 인질 대치극 2명자살 1명사살 1명검거 12명중 1명만 안 잡혀 난동9일 사실상 종막 교도소 이감도중의 호송버스에서 집단탈주, 연쇄인질강도행각등을 벌여온 탈주강력범 잔당5명중 지강헌(35) 안광술(22) 한의철(20) 강영일씨(21)등 4명이 16일낮 12시25분경 서울서대문구북가좌동 384의15 고영서씨(50ㆍ동해운수배차담당)집에 침입, 일가족6명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극을 벌이다 안씨와 한씨는 권총으로 자살하고 강씨는 생포됐으며 지씨는 경찰의 진압작전중 저격당해 중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오후 숨졌다. 이로써 지난8일 이감도중 탈출해 인질강도 납치강도 원정강도행각을 벌이던 12명의 죄수중 김길호씨(21)를 제외한 8명이 자수하거나 검거되고 2명이 자살, 1명이 사살됐다. 아직 도피중인 김씨는 16일 밤 이 사건의 수사본부장인 김종구 서울지검3차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검찰은 이들의 탈주사건과 관련, 몸수색 등을 제대로 하지 않은데다 탈주모의를 묵인 또는 방조한 것으로 알려진 영등포교도소 김종업 교도관 등 교도관 5명을 16일 밤 철야조사, 수사결과를 17일중 발표할 예정이다. 탈주후 각각 한차례씩의 원정강도와 노상강도 그리고 네 차례의 인질강도극을 벌인 이들 탈주범들은 15일 밤 10시10분경 다시 고씨집에 침입, 고씨와 부인 김정애씨(52)및 딸4명 아들1명등 가족6명을 인질로 잡고 은신해 있다가 이들이 잠든 사이 몰래 빠져 나온 고씨의 신고로 출동한 경찰과 대치했다. 이들 범인들은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경찰과 가족들의 자수권유를 거부한 채 완강히 맞서다 인질로 잡은 고씨 가족 가운데 일부를 내보낸 뒤 자체분란을 일으켜 난투극을 벌이다 안씨와 한씨는 지씨가 소지하고 있던 권총을 빼앗아 머리에 쏴 자살했다. 주범 지씨는 안, 한씨가 자살한 뒤에도 장녀 선숙양(회사원)을 끝까지 인질로 잡고있다가 경찰테러특공대에 저격당해 중상을 입고 연세의료원에서 치료를 받다 이날 오후4시55분경 숨졌다. 인질로 잡혀있던 고씨 가족들은 이날 오전 10시46분경 부인 김씨와 외아들 장선군(11)은 범인들에 의해 풀려나온데 이어 오전11시35분 4녀 민정양(14)이 풀려났으며 상황이 끝날 때까지 붙잡혀있던 장녀 선숙양 등 나머지 가족도 모두 무사히 구출돼 경찰병원에 입원가료중이다. 이에 앞서 탈주범들은 지난 14일 신촌에서 달아난 뒤 김길호씨를 제외한 4명이 저녁8시경 서대문구 창천동 62의47 임석이씨(70)집에 침입, 임씨등 가족4명을 인질로 잡고 25시간반동안 은신하다 15일 밤 9시반경 임씨 집에서 나가 고씨집에 침입했었다. (<동아일보>1988년 10월17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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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서는 ‘발악’이라고 표현했지만, 그것은 ‘피어린 절규’였다. 35세로 탈주범 중 최연장자이자 리더격이었던 지강헌은 인질로 삼은 고선숙씨 옆에서 권총을 들고 말들을 쏟아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
여기서 ‘전경환’은 중요한 키워드다. 지강헌은 5공시절 새마을운동중앙본부 회장을 지녔던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과 자신을 비교했다. 아버지의 스크랩에서 ‘전경환’을 찾아봤다. 그는 1988년 2월25일 취임한 제13대 대통령 노태우가 벌인 5공 비리 청산의 주요 대상으로, 1988년 스크랩에 뻔질나게 나왔다. 1988년3월31일치 <동아일보>는 ‘공금횡령 등 78억 6개 죄목’이라는 제목으로 전경환의 구속수감 뉴스를 전한다. 검찰청사로 들어가다 한 시민에게 뺨을 맞는 사진도 있다. 6개월 뒤 1심 재판에서 전경환은 ‘7년 형’을 선고받는다. 1988년9월6일치 <한국일보>의 제목은 “‘유죄’엔 초조ㆍ‘7년’ 듣고 여유”다. “퇴정 때 방청객에 손을 흔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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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환이 상습횡령범이었다면, 지강헌은 상습절도범이었다.(지강헌을 비롯해 탈주범들은 대부분 절도범이나 폭력범들로 흉악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조세형처럼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소년원을 거쳤던 그가 훔친 액수는 ‘78억원 알파’인 전경환의 횡령액에 비하면 껌값이었다. 600만원도 안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가 받은 형은 전경환보다 훨씬 무거운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조세형의 탈옥동기 중 하나도 이중처벌이었던 이 ‘보호감호’였다) 도합 17년.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
지강헌은 경찰병력 철수와 봉고차를 대기시킬 것을 경찰에 요구한다. 설사 봉고차를 대기시킨다고 안전하게 빠져나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앞에서 나온 조세형의 말처럼 “항만봉쇄가 철통같아” 영원한 도주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지강헌은 탈주범 중 한 명인 강영일을 밖으로 내보내 자수하도록 한다. 강영일이 마당을 서성이다 돌아오려고 하자 발밑에 총을 쏘며 제지한다. “마지막 선물”이라는 말과 함께.(당시 밖에서는 강영일의 어머니가 경찰의 호출을 받고 와 자수를 권유하고 있었다) 여기에 반발하던 한의철이 지강헌의 총을 빼앗아 자살하고, 안광술도 그 총으로 뒤이어 자살한다. 최후의 1인으로 남은 지강헌. 그는 경찰에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틀어줄 것을 요구한다. 경찰의 착오로 스콜피언스의 ‘할리데이’를 틀어줬다는 설도 있지만, 지강헌이 경찰에게 받은 비지스의 ‘할리데이’ 테이프를 집에 있던 카세트로 틀었다는 주장이 유력하다.(2006년 SBS ‘TV박스오피스’)
비지스의 ‘할리데이’ 선율이 흐르는 가운데 지강헌은 창가에서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긋다가 경찰의 저격을 받는다. 오른쪽 무릎과 하복부에 총상을 입은 채 병원으로 옮겨지지만 숨지고 만다.4) 쓰러진 인질범을 안타까워하며 울부짖던 인질 고선숙.(비록 인질극을 벌였지만 그들은 고영서씨 가족에 깎듯한 예의를 갖추고 위해가 되는 행동은 삼갔다고 한다) 나는 탈주범 지강헌의 ‘비참한 말로’를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복기할 때마다 눈물이 날 것 같다. 그들은 ‘죽음의 일요일 한낮’을 보냈다. 조가(弔歌)처럼 흘렀을 비지스의 ‘할리데이’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고…. “오 당신은 휴일 같은 사람/ 정말 그런 사람/(중략) 오 그것은 우스운 게임/ 항상 같을 거라 믿진 마요/ 내가 방금 한 말도 생각나지 않지요/ 내 머리에 부드러운 베개를 얹어줘요/ 많은 사람들이 알지요/ 왜 내가 아직도 눈이 멀었는지를.”
주범 박-신 차례로 “탕”…“탕” 탈옥수 자살 대청호서 경찰과 대치 끝에 택시뺏어 이리→대전 도주 검문경관 찌르고 총 탈취 소년범 김군 검거 【전주ㆍ대전=임시취재반】 27일 새벽 전주교도소에서 발생한 살인범 무기수 등 3명 탈주사건은 2명의 자살과 1명의 검거로 32시간만에 끝났다. 박봉선(30ㆍ무기수) 신광재 (21ㆍ징역15년) 김모군(17) 등은 경찰에 쫓기다 28일 낮12시20분께 충북 청원군 문의면 대청호 야산기슭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박이 먼저 경관으로부터 탈취한 권총을 쏘아 자살했으며 신도 이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들은 자살극을 벌이기 직전 먹을 것을 달라며 김군을 경찰에 보냈다. 검찰은 김군을 상대로 탈주경위, 교도관 매수 및 방조 여부 등을 조사중이다. 〔자살ㆍ검거〕 이날 상오 11시20분께 순찰 중이던 신탄진파출소 소속 이종헌 경장(42)등 경찰관4명이 대덕구 미호동 국도에서 도주하는 범인들을 망원경으로 발견, 접근해 검문하려 했으나 이들은 대청호 쪽으로 달아나 갈전동 선착장에서 고기잡이 2인승 목선을 타고 8백여m 떨어진 맞은편 호안으로 건너갔다. 경찰은 공수단소속 고무보트를 빌려 타고 뒤쫓아가 20여m 거리를 두고 대치, 자수를 권유했다. 박은 권총을 겨누며 “먹을 것을 보내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는데 이 경장등이 “한명을 보내주면 갈전으로 함께나가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하자 김군을 보냈다. 경찰은 김군을 곧바로 고무보트에 태워 연행했다. 이때 경찰 지원병력 10여명이 고무보트 2대에 분승, 호안으로 건너갔으며 경찰헬기에서는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리지 않으면 사살하겠다”고 잇달아 방송했다. 낮12시20분께 검거조가 권총을 겨누며 낮은 포복으로 접근하는 순간 박이 머리에 권총1발을 발사, 자살했으며 신도 권총을 주워 왼쪽가슴에 총을 쏘았다. 경찰도 신을 향해 동시에 3발을 발사, 한때 사살설이 있었으나 먼저 자살한 것으로 밝혀졌다. 신은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숨졌다. 〔택시탈취〕 탈주범 3명은 27일 하오8시5분께 전북 이리시 갈산동 원창목욕탕 앞길에서 동광택시소속 전북1바 8201호 택시(운전사 최정석ㆍ28) 를 세워 탔다. 박과 신은 김군에게 수갑을 채워 형사를 가장, 운전사 최씨에게 “공범을 급히 잡으러 가니 완주군 봉동읍까지 가자” 고 요구했다. 이들은 익산군 춘포면 대장촌리 철길건널목을 지날 때 1명이 운전사 최씨의 목에 흉기를 들이대고 위협, 현금3만7천원과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을 뺏은 뒤 최씨를 뒷좌석에 태우고 박이 운전을 했다. 이들은 삼례를 거쳐 봉동읍 부근에 이르러 택시를 세우고 운전사 최씨를 야산으로 끌고갔다. 박이 최씨를 죽이려했으나 신등이 말려 다시 최씨를 택시에 태워 대전 쪽으로 향했다. 박 등은 서대전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대전 부사동 보문5거리에 도착해 차를 버리고 달아났다. (<한국일보> 1990년 12월2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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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형처럼 구치감의 환풍기 구멍을 뜯지 않았다. 지강헌처럼 이감 도중 호송버스를 탈취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아예 감옥 쇠창살을 자르고 교도소 담벼락을 넘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종합하면, 전주교도소를 탈출한 박봉선 신광재 김아무개 3명은 감방 창문에 설치된 철책 2개를 쇠톱으로 자르고 사물함으로 쓰이는 선반으로 2.7m짜리 사다리를 만들어 4.5m 높이의 교도소 담을 넘었다. 그리고 이틀도 되지 않아 ‘비참한 말로’를 맞았다.
때는 바야흐로 1990년대였다. 서슬퍼런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 지 두 달 밖에 되지 않았다. 노태우 대통령이 “헌법상의 모든 권한을 동원”하겠다며 범죄척결 의지를 밝힌 게 10월13일. 아버지의 스크랩에 있는 1990년 10월14일치 <한국일보>기사를 읽어본다. “정부는 모든 외근경찰관을 무장시키는 등 검찰과 경찰력을 총동원해 범죄와 폭력에 정면대응할 것…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은 일과성조치로 끝나지 않고 국민이 불안에서 벗아날 때까지 지속될 것…이러한 노력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게 미흡하다면 (특별법 제정 등)특단의 대책도 강구할 것.” 한편으로는 날로 흉악해지는 범죄자들을, 또 한편으로는 문익환, 임수경, 서경원으로 이어지던 남북 민간교류 움직임과 학생ㆍ노동자들의 시위를 겨냥한 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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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선과 신광재는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탈옥을 감행했다. 그 뒤 경찰의 검문을 받다가 실탄 6발이 장전된 권총까지 빼앗았다. 이틀 만에 대전에서 경찰 감시망에 걸린 이들은 충북 청원군 문의면 대청호 안으로 숨어든다.
◇최후의 순간 28일 낮12시20분께 경찰이 접근해오자 박봉선이 권총으로 머리를 쏘아 자살하려 하고 있다.(왼쪽사진). 박이 쓰러지자 이어 신광재가 가슴에 권총을 쏘아 그 충격으로 넘어지고 있다. 박은 현장에서 숨지고 신은 병원 호송도중 숨졌다. 【대전일보 제공】 (<한국일보> 1990년 12월29일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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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유명하다. 대전일보 기자가 찍었다. 다음날 모든 일간지가 1면에 받아 실었다.(이 사진은 <대전일보>을 대표하는 사진이 되었다. 사진을 찍은 전재홍 기자는 얼마 뒤 <조선일보>로 스카웃되었다) 경찰이 포위망을 좁혀오자 차례대로 권총을 이용해 목숨을 끊는 모습이다. 박봉선은 앉은 채로 자신의 머리를 쏘았고, 신광재는 선 채로 자신의 가슴에 방아쇠를 당겼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살인범이었다. 피를 묻히지 않았던 1983년의 조세형이나 1988년의 지강헌을 비롯한 영등포교도소 탈주범들과 다른 점이다. 박봉선은 무기징역을, 신광재는 징역15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비해 함께 탈주했던 열일곱 살 김아무개 군은 폭력 초범이었다. 1년만 형을 살면 나오게 돼 있었다. 박봉선과 신광재는 김 아무개군의 이런 처지를 참작했는지, “먹을 것을 구해오라”는 임무를 주어 사실상 경찰에 잡히도록 한다. 마치 지강헌이 최후의 순간을 앞두고 어린 강영일을 경찰에 보낸 상황과 비슷하다.
자수를 할 수는 없었을까? 그들은 “먹을 것을 주면 자수하겠다”고 말했다. 탈옥 뒤 굶주림에 시달렸으리라. 경찰은 먹을 것을 줄 수 없었을까? 여유를 주고 배를 채우게 했다면, 그들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을 악과 독기가 조금은 완화되지는 않았을까? 경찰은 토끼사냥을 하듯 탈주범들을 호수 끝으로 내몰았다. 먹을 것 대신 경찰 검거조는 조준사격을 준비했다. 서부활극을 연상케 하는 대청호 야산기슭에서의 살인게임.
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탈옥극의 전모는 영구 미스터리로 남았다. 경찰에 잡힌 김아무개군은 단순공범이라 아는 게 없었다. 직경 2cm나 되는 쇠창살을 어떻게 잘랐는가 하는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수시로 감방 복도를 오가는 교도관의 눈을 피해 이 작업을 완성하려면 20여일 이상 걸린다는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한다. 지강헌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탈옥수와 교도관의 내통 의혹이 이는 건 당연했다. 교도소 쪽은 검찰수사를 받은 김아무개군을 기자들에게 딱 3분만 공개하고 전주교도소에 바로 수감했다. 기자들은 한 개의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박봉선과 신광재. 사람을 죽였고, 모범수의 길 대신 감옥을 뛰쳐나와 야수처럼 날뛴 두 사람. 그들에 관한 기사를 보며 가장 마음이 아팠다. 조세형은 인생 절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노년엔 ‘좀도둑’이라는 험담을 들었을망정 끝내 자유를 얻었다. 아마 현재 집필 중인 자서전에서 원 없이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내리라. 지강헌은 죽기 전 생중계 카메라에 대고 마음껏 소리 질렀다. 단말마적 저항이었지만, 그가 남긴 말들은 그 어떤 저널리즘보다 시대의 모순을 후벼 판 명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지강헌 이름 석 자를 기억하지 않는가. 더구나 그가 사랑한 음악은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년)에 스며들었고, 마지막 몸부림은 영화 <할리데이>(2006년)로 부활했다.
박봉선 신광재는 어떠한가. 대특종 사진으로 길이 남을 비극적 최후의 순간은, 그것을 포착해낸 사진기자만을 빛나게 했을 뿐이다. 박봉선 신광재는 누구냐! 이름을 기억하는 이 별로 없다. 그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어쩌다가 사람을 죽였는지, 교도소에서 어떤 처지였는지, 왜 탈옥했는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들은 긴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마음껏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독 안에 갇혀 먹을 것 좀 달라고 하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탈옥수들의 비참한 말로’에도 등급이 있는지 모르겠다. 두 사람은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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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보호법에 의거해, 수감된 피고인에 대해 재범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수감생활을 마친 뒤 별도로 일정기간 감호소에 머물도록 하는 조치. 5공 때 만들어진 이 제도는 이중처벌과 인권침해논란으로 결국 2005년 7월 폐지됐다.
2) 1997년 1월20일, 부산교도소 화장실 환기구 철창을 잘라내고 달아난 탈옥수(당시 30세). 그는 무려 2년6개월간 도피행각을 벌였다. 이 글에 나오는 세 건의 탈옥과는 도피의 능력(?)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다. 탈옥 뒤에도 여러 차례 경찰과 맞닥뜨렸으나 격투 끝에 도주했다. 1999년 7월에야 경찰에 잡혔다. 조세형이 ‘대도’였다면 신창원은 ‘슈퍼맨’이었다. 홍길동에 빗대 ‘신길동’이라는 별명까지 나왔고 <깜빵 탈옥수 신창원>이라는 실명 만화도 등장했다. 신드롬 현상이 일 정도였다.
3) 검찰이 탈주범 중 검거된 손동완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강헌은 호송버스에 타기 전 교도관으로부터 수갑열쇠를 건네받아 입속에 감추고 있었다. 다른 탈주범들도 쇠꼬챙이 등을 지니고 있었는데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은 채 버스에 올랐다. 이 쇠꼬챙이는 교도소 내 의무실의 철제침대 받침살을 뽑아 만든 것이었다. 교도관이 탈주범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정해창 법무부장관과 이춘구 내무부장관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동아일보>1988년 10월15일치)
4) 탈주범 12명 중 유일하게 잡히지 않았던 김길호는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는 실크인쇄공장에 취직해 일하다가 탈주사건 발생 21개월만인 1990년 7월1일 경찰에 검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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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댓글
필자
고경태
「한겨레」 토요판 에디터. 「한겨레21」「씨네21」편집장과 한겨레 esc 팀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 홈스쿨』(2011)과 『유혹하는 에디터』(2009), 『직설』(공저, 2011)이 있다. 가족을 사골국물처럼 글감으로 우려먹는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yerim49
2012.08.26
gs20wow
2012.08.25
kth27zz
2012.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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