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음악과 한국성, 예술과 정치 사이의 줄타기
1956년 6월 2일, 마흔의 작곡가 윤이상이 뒤늦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친구, 선후배, 친지들이 공항에 나와서 그의 앞길을 축복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글ㆍ사진 김성현
201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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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클래식
김성현 저 | 아트북스
스트라빈스키부터 진은숙까지 현대 작곡가 40인 열전
우리 시대에 태어난,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정녕 없는 것일까? 이 책은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세기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긴 작곡가 가운데 40명을 소개한다.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로 활동해온 저자는 현대음악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에 대한 좌표를 스스로 세운 후, 거기에 이르는 길을 독자에게 친절히 안내한다.
현대음악과 한국성, 예술과 정치 사이의 줄타기 - 윤이상(尹伊桑, 1917~1995)


1956년 6월 2일, 마흔의 작곡가 윤이상이 뒤늦은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친구, 선후배, 친지들이 공항에 나와서 그의 앞길을 축복하고 덕담을 나누었다.

윤이상은 열세 살 때 고향 통영의 영화관에서 무성영화의 배경음악을 썼다. 그 뒤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서 음악이론과 작곡, 첼로 등을 배우고 통영여고와 부산사범학교, 부산고와 양정고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재직하던 학교의 교가를 작곡하고, 부인의 도움으로 초기 가곡집을 자비 출판했으며, 6?25전쟁 당시에는 전시 작곡가 협회의 사무국장도 맡았던 그는 여느 음악인과 다름없이 척박했던 한국 음악계에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유학은 한국이라는 삶의 터전이나, 한국 음악계라는 직업적 울타리와의 ‘단절’을 뜻했다.

“꽃의 종자는 한번 땅에 떨어지면 아무리 가물거나 비바람이 쳐도, 또는 발에 짓밟혀도 늦가을에나마 끝내 한 번은 피고야 마는 법”이라는 당시 그의 글에는 만학도의 결연한 의지가 가득했다.

불혹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음악원으로 건너갔지만, 연령 초과로 보통 학생으로 인정되지 않아 학비를 더 지불했고 이 때문에 생활고를 겪기도 했다. 작곡가는 한국에 머물면서 남편의 유학 비용을 송금해주던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과연 나는 파리에 잘 왔다 싶소. 서양음악의 전통을 한국에 이식할 중대한 책임을 느끼면서 하루빨리 나의 길을 개척하려 하오”라고 벅찬 기대를 나타냈다. 반면 같은 편지에서 윤이상은 “작곡학보다는 사실 나에게는 기초 이론이 더 필요하오”라며 초조함도 나타냈다.

이듬해인 1957년 7월 윤이상은 독일 서베를린 음대로 옮겨갔다. 당시 슈토크하우젠과 노노, 불레즈가 다름슈타트에서 새로운 깃발을 올리고 있었고, 현대음잾의 변방에서 중심으로 건너간 윤이상 역시 거센 격랑과 온몸으로 맞부딪쳤다. 1958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에 참가한 윤이상은 격렬한 문화 충돌로 인한 충격을 그대로 부인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

“당신은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나조차도 아연실색할 신작들이 연일 계속되오. 쇤베르크나 알반 베르크는 우리가 생각하는 베토벤처럼이나 구식 음악이 되어버렸소.” 당시 전위 예술가로 막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백남준을 만난 곳도 다름슈타트였다. 윤이상은 그곳에서 이방인이었지만, 오히려 이방인이었기에 차분하고 정확한 시선으로 당시 상황을 분석하기도 했다.

지금 다름슈타트에서 연주되는 작품들은 호평만 받으면 곧 국제악단(음악계)에 등장할 수 있으니까 빠른 길이오. 그런데 연일 각 작품을 검토해보니 월등히 뛰어난 작품이 있는 반면에 타작도 많았소. 이를테면 모두 수법에나 매달리는 유행병에 걸려 있다고 할까.

이때부터 현대음악이라는 난해한 기호 속에서 한국적 음악이라는 정체성을 찾기 위한 윤이상의 질문은 계속됐다.

나는 독일의 슈토크하우젠이나 프랑스의 피에르 불레즈처럼 그런 교묘한 현대식 고층건물과 같은 작품을 쓸 생각은 없소. 다행히 지금 최전선에서는 동양의 수묵화처럼 연한 허무감과 침묵이 흐르는,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미학적으로 교묘히 구축된 그런 작품이 유행하고 있소.

현대음악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자기 색깔을 내기 위한 ‘이중의 줄타기’가 시작된 것이다. 작곡가는 서양음악이 펜으로 그은 직선이라면 동양음악은 붓으로 쓴 곡선이라고 비유했다. 서양음악의 직선적 음이 주위의 음을 끌어 붙이고 쌓아 올리며 건축적으로 발전할 때, 동양음악은 음 하나하나에 고유한 의미가 담겨 있으며 모든 음은 변화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양과 서양, 급진적 언어와 고전적인 미학이 서로 결합하고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윤이상 음악의 특징이자 미덕이 됐다. 이 같은 작곡가의 고민은 당시 비유럽권의 음악가들이 짊어진 공통의 숙제이기도 했다.


윤이상이 작곡가로서 유럽 음악계에 처음 이름을 알린 곳 역시 1959년 다름슈타트 현대음악제였다. 출품작인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이 프랜시스 트래비스의 지휘로 초연됐다. 작곡가는 “나의 작품이 세 번 불려나갔으니 어떻게 생각되오? 다름슈타트는 동양인의 작품이라 해서 동정해서 박수쳐주는 데는 절대로 아니오”라며 감격을 그대로 드러냈다.

작곡가는 같은 해 네덜란드의 가우데아무스 음악제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을, 1960년 쾰른 국제현대음악제에서 현악 4중주 3번을 발표하며 유럽 음악계에 점차 이름을 알려갔다. 1960~61년에는 베를린 방송국의 위촉으로「바라」를, 함부르크 방송국의 위촉으로「교착적 음향」을, 헤센 방송국의 위촉으로「교향악적 정경」을 각각 쓰면서 전업 작곡가로서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1966년 도나우에싱겐 음악제에서 초연된 「예악」은 이듬해 바르샤바와 1968년 함부르크, 쾰른, 베를린 등에서 잇달아 연주되면서 작곡가 스스로 “후일 나의 작곡 노선에 튼튼한 토대가 되었다”고 밝힐 정도로 이정표 같은 작품이 됐다.

희망에 부풀어 있던 작곡가의 삶이 또 한 번의 거센 단절을 맞은 계기가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었다. 1963년 겨울, 윤이상은 동베를린 북한대사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월북한 음악가 친구 최상한을 만날 겸 평양을 다녀가라는 내용이었다. 작곡가 부부는 실제 방북해서 “평양 근처의 자그마한 가옥에 거주하면서 매일 전쟁박물관, 혁명박물관 등 여러 가지 새로 세운 기념관을 관람하였으며, 도처에서 새로 지은 공장과 고층건물을 보았다. 전후 10년 동안에 무에서 쌓아 올린 거대한 성과에 우리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분단 상황에서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6?25전쟁이 1953년 휴전으로 끝난 지 불과 10년 뒤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대담한 결정이었음에 틀림없다. 20여 일간의 북한 체류 등이 4년 뒤에 문제가 되면서, 1967년 한국의 중앙정보부는 윤이상을 독일에서 서울로 연행했다.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지휘자 미하엘 길렌, 오보이스트 하인츠 홀리거 등이 구명에 나서 연주회를 열었고, 작곡가 슈토크하우젠과 한스 베르너 헨체, 스트라빈스키와 엘리엇 카터, 지휘자 카라얀, 오토 클렘페러 등은 윤이상의 자유를 탄원하는 호소문에 서명했다. 연행의 적법성 여부와 수사 과정에서의 고문이 국제적 문제로 번진 것이었다.


투옥 당시 윤이상이 작곡한 역작이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이었다. 이 작품은 집행유예로 먼저 풀려난 부인 이수자가 독일로 총보(總譜)를 가지고 돌아가 1969년 뉘른베르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됐다. 윤이상과의 대담집 『상처 입은 용』을 펴낸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는 오페라에서 왕자의 시종이 장자의 두개골을 열기 위해 도끼로 관을 여는 대목에서 작곡가의 자살 기도 징후를 읽어내고 있었다. 실제 초연 당일 윤이상은 한국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훗날 윤이상은 『상처 입은 용』에서 “나는 보통의 음악가이지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음악가로서는 정치와 직접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위기에 처했을 때는 예술가도 또 다른 사람과 같이 인간이며, 만인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며, 그에 따라 정치에 도움 되는 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동백림 사건’ 이전의 음악가 윤이상이 전자에 해당한다면, 이후의 사회인 윤이상은 바로 후자에 해당했다.

1969년 2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뒤 독일로 돌아간 윤이상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마다 사회적 발언이나 행동, 작품을 통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에는 한국 민주민족통일 해외연합(한민련) 결성에 참여해서 유럽 본부 의장으로 추대됐고,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에는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다.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나의 잠자는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들이 누구인가 여실히 목격하였다”는 글은 작곡가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 시기는 작곡가의 터전이 한국에서 북한으로 급격하게 이동한 때와도 일치한다.

윤이상은 1979년 비공식 방북에 이어 1982년 다시 평양을 찾기에 이르렀다. 김일성 당시 북한 주석은 「광주여 영원히」를 세 차례 되풀이해서 듣고 “민족의 재간둥이 윤이상 선생”이라고 불렀다. 윤이상 역시 “나는 김 주석을 대할 때마다 머리가 숙여진다. 그리고 나의 쓰라린 아픔을 쓰다듬어주는 크고 더운 가슴을 느낀다”고 말했다. 1984년에는 김정일 당 비서의 지시로 윤이상 음악연구소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관했고, 1990년에는 실내관현악단 창설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그의 음악 역시 한편에서는 ‘체제 음악’이, 다른 한편에서는 ‘반체제 음악’이 되고 말았다. 정치가 음악을 과잉 규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복잡한 실타래는 1995년 작곡가의 영면 때까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윤이상은 반세기 전인 1959년 편지에서 “나의 작품은 한국에서는 연주할 사람도 없고 연주한다고 해도 전혀 모를 것이 사실이오. 다만 나의 작품이 극히 일부의 젊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은 사실이고, 그 사람들이 후일 한국의 작곡계를 이끌고 나갈 것을 바랄 수는 있을 것이오”라고 썼다. 8년간 윤이상을 사사했던 작곡가 강석희에 이어, 다시 강석희의 제자로 현재 유럽에서 활동 중인 진은숙까지, ‘음악가 윤이상’의 바람은 뒤늦게 천천히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 하지만 분단의 순교자부터 친북 인사까지 ‘동백림의 윤이상’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극과 극으로 나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음악을 현재의 정치적 입장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적 시선에서 탈정치화하고 온전하게 재평가할 날은 언제쯤일까.





 
#클래식 #윤이상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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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ㅋ

2012.03.09

음악과 인생 그리고 사상이 확연히 다른가요. 온전히 음악으로만 평가하면 위대한 현대 음악가,통영이 배출한 세계적인 음악가이고... 예술의 기준과 판단은 누가 하고 그판단이 정확하다고 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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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현

조선일보 문화부, 음악 담당 기자다. 예술의 전당 월간지에 현대 음악 작곡가 시리즈를 기고하고 있으며, 매주 월요일 EBS FM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서 음악계 소식을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