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만의 장편소설 『꽃피는 고래』로 돌아온 소설가 김형경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 나면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데, 그것을 잘 처리해서 상실에 붙들리지 않아야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삶의 곳곳에서 경험하는 상실을 배치해 그 상실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200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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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이 2년 만에 장편소설 『꽃피는 고래』로 독자에게 돌아왔다. 니은이라는 열일곱 살 소녀의 성장소설인 『꽃피는 고래』는 소중한 것을 상실한 후 그 상실에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뭔가를 잃었다. 공업화가 되면서 환경을 잃었고, 공동체를 잃었고, 가족과 직업, 사랑하는 개를 잃었다. 소중한 것을 상실하고 나면 마음속에 온갖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는데, 그것을 잘 처리해서 상실에 붙들리지 않아야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삶의 곳곳에서 경험하는 상실을 배치해 그 상실을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꽃피는 고래』는 슬프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이야기다. 소설이 전하는 위로와 공감,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김형경의 이전 소설 작품들보다 『사람 풍경』이나 『천 개의 공감』과 같은 심리치료 에세이 쪽에 더 가깝다. 직접 정신분석을 받고, 심리학 공부를 한 경험, 그리고 소설가로의 연륜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던 심리적 고민들을 해결해 준 김형경의 언어가 소설로 옮겨온 것 같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멘토들의 목소리에서 김형경이 느껴진다.
이번 소설은 상실과 애도의 이야기면서 동시에 성장 이야기다.
인간은 소중한 것과 관계 맺으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며, 동시에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면서 산다. 나는 어떤 사람의 자식, 누군가의 연인,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실하면 나는 딸이 아니고,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고, 고래잡이 포수도 아니다. 이미 떠나간, 무효화된 정체성을 붙잡고 있으면 우울증이나 심리적 병리현상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짧은 논문에서 애도가 제대로 안 돼서 우울증이 된다고 썼는데, 그는 애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심리학계에서 애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70~80년대부터다. 대부분의 정서문제는 애착에서 비롯되는데, 애착이 잘못되었어도, 애착이 박탈되었어도 애도만 잘하면 성장할 수 있다.
상실 이후에는 이런 정체성을 해체시켜야 한다. 빨리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 니은이는 부모를 사고로 잃고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마비되는 감각, 우울, 분노, 후회, 신과 타협하는 마음, 죄책감.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해 내야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애도다.
삶은 애착과 상실, 애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착은 인간을 형성하는 전부고, 인간을 키우는 인큐베이터다. 애착이 박탈되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 근대 사회까지는 모든 사회에 애도 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병원에서 죽고, 가족들은 3일 만에 장례를 치르고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심리적 문제는 공동체를 잃고, 애도를 제대로 하기 힘든 데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
애착관계에 의한 상실도 있지만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상실감도 클 듯한데.
돈에 의한 상실은 그리 크지 않다. 돈이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실이 우리 삶에 타격을 주는 것은 애착 때문이다. ‘나’의 일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상실도 큰 타격을 준다. 동구권이 무너졌을 때 내 세대의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은 허망함을 느꼈다. 나는 ‘어떡하나.’ 정도였는데, 그 운동에 뛰어들어 20대를 다 보낸 사람들이 느낀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이후 일종의 애도 상태에서 어리벙벙하면서 슬퍼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주인공 니은이를 열일곱 살로 설정한 이유가 있나?
열일곱은 애매한 나이다. 열일곱은 주민등록증이 나오지만 아직 사회가 인정해주는 성인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경계에 있는 나이다.
니은이는 (죽은) 부모에게 벗어나 독립된 인간으로 자립한 선배 여성들을 보면서 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성장이다. 내적 변혁이 일어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 공감력도 자란다. 예를 들어, 니은이가 소설 초반에 ‘고래사냥’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복고적’이라는 것밖에 느끼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스무 가지 이상의 느낌을 받는다.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런 성장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을 열일곱 살로 설정했다.
어린 독자들도 읽을 것이라는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그렇다기보단 그 또래들이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성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통용되는 법, 질서, 언어, 상징을 받아들여 그 사회의 적합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니은이는 처음에 처용포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이상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다 소설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그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 이야기의 전승자가 되고, 이야기를 쓸 것 같다고 느낀다. 소설 초반에 니은이가 이해하지 못했던 처용포를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용하는 과정도 니은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포수 할아버지와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나들은 왕고래집 할머니를 등장시킨 특별한 의도가 있나?
이들은 니은이가 느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고, 아주 혹독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다. 장포수 할아버지는 공업화로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잃었고, 포경 금지로 직업을 잃었다. 왕고래집 할머니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사람이다. 또한 이들은 상실을 극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부모를 갑작스럽게 잃은 니은이가 이 두 사람을 모델 삼아 따라가면서 자기 상실을 극복하고, 어른됨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고 싶었다.
니은이는 소설에서 만나는 여러 어른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건지’, ‘언제 어른이 되었는지’를 묻는다. 니은이가 작가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줄 것인가?
내 대답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다 했는데. (웃음) 나는 자기 삶의 이미지를 갖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 삶을 경영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생도 하나의 기업이다. 역량을 발휘하고, 사회와 관계 맺으면서 이윤-돈이든 성취감이든 책이든-을 내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밑그림 없이 사는 것 같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서른이 넘은 사람들도 자기 인생에 대한 설계도가 없다.
작가의 열일곱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살짝 반항하면서. (웃음) 학교가 워낙 엄격했고 공부만 시켜서 반항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살짝 반항이라고 했는데, 어떤 반항을 했나?
요즘 관점에서는 반항이라고 할 수 없다. 가끔 자율 학습을 빼먹었다. (웃음) 소풍이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걸려서 일주일 동안 반성문을 썼다. 원래는 무기정학감인데, 고3이어서 가볍게 처벌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 큰 억압 속에서 자랐다.
요즘 열일곱들은 자기표현이 솔직하다. 일산에 살아서 호수공원 근처에 가끔 가는데 거기서 니은이 또래들을 많이 본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앉아서 들어보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고, 혼돈 속에 있는 것 같다.
포경이라는 낯선 소재로 소설을 썼다. 어떤 계기로 포경을 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환경 문제에 초점을 둔 소설을 쓰려고 취재를 했다. 그때 소설 속 처용포의 무대가 된 울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고래잡이 포수도 소개받아 인터뷰를 했다. 울산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환경단체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자기 지역 문화에 대한 기록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 포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고 고래잡이와 포경사를 소재로 소설을 쓴 분도 있다. 그런데 1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을 상실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가는가, 하는 문제와 애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 나왔다.
울산 지역은 고래 고기로 유명한데, 취재하면서 고래 고기를 먹어 봤나?
장생포에 가면 고래 고기를 파는 식당이 여럿 있다. 수육하고 회를 먹었는데 맛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 고장 사람들은 ‘소고기하고도 안 바꾼다’고 할 만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 맛에 익숙해져야 먹을 수 있는 고기 같았다. 특유의 향이 있다.
우리는 남해안 일부에서만 고래 고기를 먹는다. 고래를 잡는 주목적은 식용이 아니라 기름이었다. 고래를 잡으면 고래 기름을 드럼통에 넣고 귀항한다. 석유가 개발되기 전 고래 기름이 연료와 공업원료로 쓰였다. 『백경』이라는 소설을 보면 ‘오늘은 몇 드럼통을 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석유가 있으니 이젠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래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본과 노르웨이처럼 고래를 먹는 나라는 포경을 포기 못 한다.
고래는 포경이 기계화되면서 수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는 그 수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울산 앞바다에서는 작은 고래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는 건 볼 수 있다. 그물에 걸리는 고래도 있고. 자연계의 생존법칙이 유지되는 상태라면 포경은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에게 장편은 마라톤과 같다고 들었다. 매번 장편을 끝내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작품 끝날 때마다 ‘다음엔 더 잘 서야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조금 더 갖고 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원고를 넘기게 된다. 『꽃피는 고래』는 두 달 정도 더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는 긴장되고 날카로운 상태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부모를 잃고 시골에 가 있는 열일곱 소녀의 정서 상태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장편을 끝나고 나면 꼭 쉬어야 하는데,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는다. 원고를 끝내고 편안한 자연인 나로 돌아오는 게 내겐 휴식이다. 이렇게 인터뷰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휴식처럼 느껴진다.
작품이 끝나면 나는 안다.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는 괜찮은지.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이만하면 됐다. 이제 더는 힘이 없으니까. 다음에 더 잘 쓰자’고 마음을 접는다. 그것(부족한 부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도 있지만 체력이 안 된다.
작품을 쓰면서 힘들 때는 역시 글이 안 써질 때인가?
그렇다기보다 생각한 것을 글로 제대로 옮길 수 없을 때가 갑갑하다. 어떤 이미지, 아우라, 상황을 묘사할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있다. 그것을 언어로 풀어낼 때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나만이 안다. 그럴 땐 내게 천재성이라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진 않는다.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나.
얼마 전에 고3 조카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자기 소설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객관적으로 자기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지 평가해 달라’고 했다. 무척 망설이다가 ‘글 쓰는 역량을 가진 전문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썼다. 그러면서 최재천이나 한비야 같은 사람 예를 들었다. 자기 전문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작가 못지않은 훌륭한 글을 쓰고 있는 분들 아닌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괜히 미래의 재능 있는 작가의 앞길을 막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보내온 소설을 읽었는데 꽤 잘 썼다. 원고지 100매 되는 글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게 하는 것도 재능이고, 자기검열 없이 글을 쓰는 것도 재능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는 것도 재능이다. 그런데 말리고 싶더라. 하지만 나도 국문과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렸지만 결국 갔다. (웃음) 글을 잘 쓴다고 꼭 소설가가 될 필요는 없다. 요즘 작가들을 보면 이십 대 때부터 죽어라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쓴 작가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좋은 글을 써낸다.
현재, 문학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소설로 생계를 유지하긴 힘든 상황이다. 소설가는 좋은 가장이 될 수 없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예술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회인에 되긴 힘들 것 같다. 예술가는 생에서 뭔가를 항상 감수해야 하는 존재다. 행복하기는 힘들다.
『꽃피는 고래』는 슬프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이야기다. 소설이 전하는 위로와 공감,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김형경의 이전 소설 작품들보다 『사람 풍경』이나 『천 개의 공감』과 같은 심리치료 에세이 쪽에 더 가깝다. 직접 정신분석을 받고, 심리학 공부를 한 경험, 그리고 소설가로의 연륜을 바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안고 있던 심리적 고민들을 해결해 준 김형경의 언어가 소설로 옮겨온 것 같다. 소설 속에서 등장하는 멘토들의 목소리에서 김형경이 느껴진다.
인간은 소중한 것과 관계 맺으며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며, 동시에 소중한 것들을 상실하면서 산다. 나는 어떤 사람의 자식, 누군가의 연인, 어떤 공동체의 구성원이다. 그런데 이것을 상실하면 나는 딸이 아니고, 아내와 어머니가 아니고, 고래잡이 포수도 아니다. 이미 떠나간, 무효화된 정체성을 붙잡고 있으면 우울증이나 심리적 병리현상이 생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짧은 논문에서 애도가 제대로 안 돼서 우울증이 된다고 썼는데, 그는 애도를 긍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심리학계에서 애도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70~80년대부터다. 대부분의 정서문제는 애착에서 비롯되는데, 애착이 잘못되었어도, 애착이 박탈되었어도 애도만 잘하면 성장할 수 있다.
상실 이후에는 이런 정체성을 해체시켜야 한다. 빨리 자신의 상태를 인정해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 니은이는 부모를 사고로 잃고 극심한 고통을 경험한다. 마비되는 감각, 우울, 분노, 후회, 신과 타협하는 마음, 죄책감. 이런 것들을 잘 극복해 내야 삶의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애도다.
삶은 애착과 상실, 애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애착은 인간을 형성하는 전부고, 인간을 키우는 인큐베이터다. 애착이 박탈되는 순간 성장도 멈춘다. 근대 사회까지는 모든 사회에 애도 장치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병원에서 죽고, 가족들은 3일 만에 장례를 치르고 직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심리적 문제는 공동체를 잃고, 애도를 제대로 하기 힘든 데에서 기인할 때가 많다.
애착관계에 의한 상실도 있지만 경제적 격차에서 오는 상실감도 클 듯한데.
돈에 의한 상실은 그리 크지 않다. 돈이 우리 정체성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상실이 우리 삶에 타격을 주는 것은 애착 때문이다. ‘나’의 일부를 이루는 이데올로기의 상실도 큰 타격을 준다. 동구권이 무너졌을 때 내 세대의 사람들-나를 포함해서-은 허망함을 느꼈다. 나는 ‘어떡하나.’ 정도였는데, 그 운동에 뛰어들어 20대를 다 보낸 사람들이 느낀 상실감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그들은 그 이후 일종의 애도 상태에서 어리벙벙하면서 슬퍼하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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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은 애매한 나이다. 열일곱은 주민등록증이 나오지만 아직 사회가 인정해주는 성인은 아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 경계에 있는 나이다.
니은이는 (죽은) 부모에게 벗어나 독립된 인간으로 자립한 선배 여성들을 보면서 성인이 되려고 노력한다.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성장이다. 내적 변혁이 일어나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다. 공감력도 자란다. 예를 들어, 니은이가 소설 초반에 ‘고래사냥’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 ‘복고적’이라는 것밖에 느끼지 못하지만 나중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스무 가지 이상의 느낌을 받는다. 공감의 폭이 넓어진 것이다. 그런 성장을 보여주기 위해 주인공을 열일곱 살로 설정했다.
어린 독자들도 읽을 것이라는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그렇다기보단 그 또래들이 공감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생각하는 ‘성장’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성인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에 통용되는 법, 질서, 언어, 상징을 받아들여 그 사회의 적합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니은이는 처음에 처용포에 떠다니는 이야기들을 이상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다 소설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 그 이야기를 이해하게 된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공감하면서, 자신도 그 이야기의 전승자가 되고, 이야기를 쓸 것 같다고 느낀다. 소설 초반에 니은이가 이해하지 못했던 처용포를 떠도는 이야기들을 수용하는 과정도 니은이가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다.
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장포수 할아버지와 죽음의 문턱을 여러 번 넘나들은 왕고래집 할머니를 등장시킨 특별한 의도가 있나?
이들은 니은이가 느낄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이고, 아주 혹독한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다. 장포수 할아버지는 공업화로 자신이 살아온 환경을 잃었고, 포경 금지로 직업을 잃었다. 왕고래집 할머니는 남편과 아이를 잃은 사람이다. 또한 이들은 상실을 극복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부모를 갑작스럽게 잃은 니은이가 이 두 사람을 모델 삼아 따라가면서 자기 상실을 극복하고, 어른됨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하고 싶었다.
니은이는 소설에서 만나는 여러 어른들에게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건지’, ‘언제 어른이 되었는지’를 묻는다. 니은이가 작가에게 이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해줄 것인가?
내 대답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다 했는데. (웃음) 나는 자기 삶의 이미지를 갖고 거기에 맞추어 자기 삶을 경영할 수 있을 때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생도 하나의 기업이다. 역량을 발휘하고, 사회와 관계 맺으면서 이윤-돈이든 성취감이든 책이든-을 내면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삶에 대한 밑그림 없이 사는 것 같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서른이 넘은 사람들도 자기 인생에 대한 설계도가 없다.
작가의 열일곱은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입시공부에 시달리는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살짝 반항하면서. (웃음) 학교가 워낙 엄격했고 공부만 시켜서 반항할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살짝 반항이라고 했는데, 어떤 반항을 했나?
요즘 관점에서는 반항이라고 할 수 없다. 가끔 자율 학습을 빼먹었다. (웃음) 소풍이 끝나고 영화를 보러 갔다가 걸려서 일주일 동안 반성문을 썼다. 원래는 무기정학감인데, 고3이어서 가볍게 처벌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였다. 그런 큰 억압 속에서 자랐다.
요즘 열일곱들은 자기표현이 솔직하다. 일산에 살아서 호수공원 근처에 가끔 가는데 거기서 니은이 또래들을 많이 본다. 아이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앉아서 들어보면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고, 혼돈 속에 있는 것 같다.
포경이라는 낯선 소재로 소설을 썼다. 어떤 계기로 포경을 접하게 됐는지 궁금하다.
환경 문제에 초점을 둔 소설을 쓰려고 취재를 했다. 그때 소설 속 처용포의 무대가 된 울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고래잡이 포수도 소개받아 인터뷰를 했다. 울산 사람들은 자기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환경단체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자기 지역 문화에 대한 기록들을 잘 정리해 두었다. 포경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고 고래잡이와 포경사를 소재로 소설을 쓴 분도 있다. 그런데 1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환경을 상실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가야 가는가, 하는 문제와 애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설이 나왔다.
울산 지역은 고래 고기로 유명한데, 취재하면서 고래 고기를 먹어 봤나?
장생포에 가면 고래 고기를 파는 식당이 여럿 있다. 수육하고 회를 먹었는데 맛이 굉장히 낯설었다. 그 고장 사람들은 ‘소고기하고도 안 바꾼다’고 할 만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 맛에 익숙해져야 먹을 수 있는 고기 같았다. 특유의 향이 있다.
우리는 남해안 일부에서만 고래 고기를 먹는다. 고래를 잡는 주목적은 식용이 아니라 기름이었다. 고래를 잡으면 고래 기름을 드럼통에 넣고 귀항한다. 석유가 개발되기 전 고래 기름이 연료와 공업원료로 쓰였다. 『백경』이라는 소설을 보면 ‘오늘은 몇 드럼통을 했다’는 식으로 나온다. 석유가 있으니 이젠 대부분의 나라에서 고래를 잡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일본과 노르웨이처럼 고래를 먹는 나라는 포경을 포기 못 한다.
고래는 포경이 기계화되면서 수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는 그 수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울산 앞바다에서는 작은 고래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는 건 볼 수 있다. 그물에 걸리는 고래도 있고. 자연계의 생존법칙이 유지되는 상태라면 포경은 허용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가에게 장편은 마라톤과 같다고 들었다. 매번 장편을 끝내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작품 끝날 때마다 ‘다음엔 더 잘 서야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조금 더 갖고 있으면 좋겠다, 싶을 때 원고를 넘기게 된다. 『꽃피는 고래』는 두 달 정도 더 갖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글을 쓸 때는 긴장되고 날카로운 상태다. 이번 작품을 쓰면서 부모를 잃고 시골에 가 있는 열일곱 소녀의 정서 상태를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장편을 끝나고 나면 꼭 쉬어야 하는데,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는다. 원고를 끝내고 편안한 자연인 나로 돌아오는 게 내겐 휴식이다. 이렇게 인터뷰하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휴식처럼 느껴진다.
작품이 끝나면 나는 안다. 어디가 부족하고, 어디는 괜찮은지. 부족하다는 건 알지만 ‘이만하면 됐다. 이제 더는 힘이 없으니까. 다음에 더 잘 쓰자’고 마음을 접는다. 그것(부족한 부분)을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도 있지만 체력이 안 된다.
작품을 쓰면서 힘들 때는 역시 글이 안 써질 때인가?
그렇다기보다 생각한 것을 글로 제대로 옮길 수 없을 때가 갑갑하다. 어떤 이미지, 아우라, 상황을 묘사할 때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이 있다. 그것을 언어로 풀어낼 때 머릿속에서 그렸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나만이 안다. 그럴 땐 내게 천재성이라는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진 않는다.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어떤 충고를 해주고 싶나.
얼마 전에 고3 조카가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자기 소설을 이메일로 보내면서 ‘객관적으로 자기가 소설가가 될 수 있는지 평가해 달라’고 했다. 무척 망설이다가 ‘글 쓰는 역량을 가진 전문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답장을 썼다. 그러면서 최재천이나 한비야 같은 사람 예를 들었다. 자기 전문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작가 못지않은 훌륭한 글을 쓰고 있는 분들 아닌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괜히 미래의 재능 있는 작가의 앞길을 막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보내온 소설을 읽었는데 꽤 잘 썼다. 원고지 100매 되는 글을 끝까지 재미있게 읽게 하는 것도 재능이고, 자기검열 없이 글을 쓰는 것도 재능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아는 것도 재능이다. 그런데 말리고 싶더라. 하지만 나도 국문과에 간다고 했을 때 엄마가 말렸지만 결국 갔다. (웃음) 글을 잘 쓴다고 꼭 소설가가 될 필요는 없다. 요즘 작가들을 보면 이십 대 때부터 죽어라 방에 틀어박혀 글만 쓴 작가들보다 다양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좋은 글을 써낸다.
현재, 문학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소설로 생계를 유지하긴 힘든 상황이다. 소설가는 좋은 가장이 될 수 없다.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예술을 하는 사람은 좋은 사회인에 되긴 힘들 것 같다. 예술가는 생에서 뭔가를 항상 감수해야 하는 존재다. 행복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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