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두희의 『조광조』를 읽다
조선 중기에 속하는 중종 시절,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던 조광조는 훈구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1519)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고 난 뒤 유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로 조선왕조의 유교 문화를 발전시킨 ‘초석’으로 추앙받지만 당대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이이는 ‘학문이 채 대성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요로에 올라, 자신도 죽고 나라도 어지러워졌다’고 혹평한 반면, 이황은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와 정치의 근본이 드러났다’고 고평한다.
글ㆍ사진 채널예스
200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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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7. 정두희의 『조광조: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아카넷, 2001, 증보신장판)를 읽다.

조선 중기에 속하는 중종 시절, 3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왔던 조광조는 훈구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1519)로 목숨을 잃었다. 그는 죽고 난 뒤 유교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로 조선왕조의 유교 문화를 발전시킨 ‘초석’으로 추앙받지만 당대의 평가는 상반되었다. 이이는 ‘학문이 채 대성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요로에 올라, 자신도 죽고 나라도 어지러워졌다’고 혹평한 반면, 이황은 ‘그로 말미암아 선비들의 학문이 지향해야 할 바와 정치의 근본이 드러났다’고 고평한다.

조광조가 ‘공자로 되돌아가자!’는 취지의 개혁 정치를 벌인 까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수학하던 청년 시절에는 연산군이 벌인 두 차례의 사화(무오?갑자)가 있었고, 중종반정이 꼬리를 물었다. 게다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 찬탈을 한 것도 겨우 50여 년 전의 일에 지나지 않았다. 유교가 국시國是인 조선에서 이런 파천황의 일들이 벌어지게 된 까닭은 왕과 신하가 성리학적 이념을 옳게 터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그는, 유교 근본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조광조는 ‘공자 말씀’을 무기로 사사건건 왕과 훈구 세력을 함께 압박했다. 중종은 조광조를 이기지 못해 조선왕조 건국 때부터 있어 왔던 소격서(昭格暑: 기우제를 지내는 도교 관련 사당)를 폐지할 수밖에 없었고, 중종반정으로 조정의 주류가 된 훈구 세력은 위훈삭제僞勳削除 공세를 받고 전전긍긍했다.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이 된 117명 가운데는 아무런 공도 없으면서 서로를 추천하거나 뇌물에 의해 공신에 봉해진 자가 많았다.

하지만 조광조가 정국공신의 65퍼센트에 달하는 96명의 녹훈을 박탈하고자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과거사 청산’과 관련된 도덕성 회복 문제였기 때문이다. 중종반정에 참가했던 대부분의 정국공신들은 연산군에게 올바른 간언은커녕 비굴하게 아첨을 했던 “개나 돼지”들이었다. 세력을 불리기 위해 마구잡이로 정국공신을 참칭한 이 무리는 “자신들의 군주가 올바른 정치를 하도록 이끌었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채 자신들이 섬기던 군주를 스스로 몰아낸 사람들”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도덕적인 자책을 온 나라에 보여 주는 성숙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50결結 이상의 토지 소유를 금했던 조선시대의 토지 공개념인 한전법(限田法=均田制)은 민생을 위한 개혁이었으나 주장에만 그쳤다. 조광조가 남긴 유일무이한 제도적 개혁은 시험이 아닌 추천에 의해 관리를 뽑아 쓰는 현량과賢良科. 수험자의 학식 여부만 가릴 뿐인 과거로는 덕행의 유무를 알 수 없고, 덕행이 없는 관리로는 수신修身?수양修養이 바탕 된 유교적 지치정치至治政治를 펼칠 수 없다는 게 조광조식 인재 등용의 요체였다. 조광조의 현량과 설치는, 그러나 조정의 대다수를 차지한 훈구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인위적 ‘물갈이’의 목적도 컸다.

훈구파의 반격이 시작된 지점이 여기이다. 정치의 바깥에 있을 때는 도덕적 정당성을 앞세워 기득 세력을 공박할 수 있었으나, 중종의 총애로 사간원의 장長이 되자 그도 ‘힘’ 싸움을 동반한 현실 정치를 감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광조가 지닌 힘은 그의 도덕적 순수성이었으며, 당시 조선왕조의 핵심적 지배 세력은 이러한 도덕적 비평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들이 보기에 조광조도 자기 세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면 적어도 조광조를 그렇게 몰고 갈 충분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광조에겐 훈구 세력이 무진장으로 가지고 있는 그 힘, 권력 기반이 없었다. 위훈삭제로 정치적 승리를 맛본 나흘 만에 훈구 세력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중종은 쫓겨난 연산군의 운명을 떠올리며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2000년 대우학술총서로 일찌감치 출간되었으나 이제야 도서관에서 찾아 읽은 정두희의 『조광조: 실천적 지식인의 삶,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는, 이 책이 꼭 필요한 현재에는 절판되고 없다. 재간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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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 7
장정일 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07월
‘독서일기’라는 제목으로 1993년부터 꾸준히 출간되어온 『장정일의 독서일기』 그 일곱 번째 권. 이번에는 2003년 4월부터 2007년 3월까지 87편의 독서일기를 추려 담았다. 일곱 번째 독서일기에서 장정일은 에세이를 포함한 문학 분야 40권과, 사회 비평을 비롯해 예술과 동서양의 역사,정치,인물을 포함한 인문 분 44권, 과학과 실용 분야로 분류되는 3권 등 총 87권의 도서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 운영자가 알립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랜덤하우스 코리아와의 제휴에 의해 연재되는 것이며, 매주 수요일 총 2개월 간(총 8편)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정두희 #조광조
1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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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gnose

2012.05.12

어쩐지 막 해방되었을 때의 우리나라가 생각나네요. 일제 잔재를 창산하자며 여러 혁신적인 제안을 내세웠다가 결국 힘에 밀려 흐지부지 되었던. 정의니 도덕이니 해도 역시 권력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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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어린 시절의 꿈은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여 다섯 시면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는 것'이었다 한다. 책읽기는 그가 그토록 무서워하고 미워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학교를 싫어했던 그는 삼중당문고를 교과서 삼아 열심히 외국 소설을 독파했고, 군입대와 교련을 거부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핑계로 드디어 1977년 성서중학을 끝으로 학교와의 인연을 끊는다. 그러나 1979년 폭력범으로 소년원에 수감되면서 그는 학교와 군대의 나쁜 점만 모아놓은, 세상에서 가장 몹쓸 지옥인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하얀몸」을 비롯한 그의 시의 바탕이 된다. 오랜 정신적 방황을 겪은 그는 박기영을 스승으로 삼아 시를 배우기 시작하여 마침내 1984년 무크지 『언어의 세계』에 「강정 간다」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시운동』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시작 활동을 하였고, 1987년에는 희곡 「실내극」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극작활동도 시작한다. 그리고 같은 해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발표하면서, 지금껏 문단에서 경험해본 적이 없던 '장정일'이라는 '불온한 문학'이 드디어 '중앙'에 입성했음을 알린다.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펠리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를 겸업하기 시작한 그는 소설집 『아담이 눈뜰 때』(1990), 장편 『너에게 나를 보낸다』(1992),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1994)를 연이어 발표하고 이 소설들이 모두 같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며 '장정일'은 드디어 우리 문화의 뚜렷한 코드 상징으로 자리잡는다. 그러나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발간한 후 그가 파리에 있는 그의 아내인 소설가 신이현을 만나러 출국한 사이, 한국에서는 외설시비가 일어나고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과는 상관없이 포르노로 규정받고 있던 그해의 마지막날, 장정일은 파리에서 자진 귀국하여 당당히 자신의 작품에 대해 변론한다. 그러나 영화 <거짓말>이 무죄판결을 받은 것과 대조적으로, 법원의 최종판결은 유죄. 그리고 또 한번의 구속으로 이어진다. 당시 그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 강금실은 후에, 『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라는 책에서 당시의 장정일과 재판에 대한 글 <장정일을 위한 변명>을 썼다. 그 사이 한국에서의 평가와는 달리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일본에서 발간되는 등 해외에서 더 호평을 받고, 그는 스스로 대표작으로 꼽는 『중국에서 온 편지』(1999)와 자전적 소설 『보트하우스』(2000)를 펴낸다. 그의 '독자 후기'를 모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도 5권까지 펴내며 그는 지금 대구에서 평생 소원인 책읽기와 재즈듣기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머리같이 쓸데 없는 데서는 한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노모가 바리깡으로 직접 깎아주는 빡빡 머리와 헐렁한 골덴 바지 그리고 청색 면 티 차림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