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플레이리스트] 애써도 잠이 오지 않을 때
이설빈 「베개는 불능의 거푸집」 X Christian Löffler – ‘The Great White Open’
잠은 죽음의 아류이자 연습장입니다. 베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관이죠. 습하고 더운 날씨가 우리를 더욱 잠 못 들게 하는 밤, 모쪼록 평안하시기를. (2024.07.23)
눈 비벼보아도
내 눈이 내 몸에 섞여들지 않는 나날들
눈 비벼보아도
벽에는 못자국 하나 없이 철회된 풍경들
피곤한 기왓장들이 아지랑이에 길들여질 때쯤
여름은 그해의 가장 둔중한 필치로
내 한 세기의 묘비명을 암송했다
절정보다 빠르게
나는 지붕에 올라
기왓장을 벗겨냈다 내 손발톱으로
벽지를 벗겨내고 장판을 들어냈다 그리고
칠했다, 층마다 놀랍게 변모하는 곰팡이벽화와
개미탐험가들의 은신처와 햇빛도둑의 신발장 등등
그 모두를 내 송곳니로 내 혀를 깨물어서 칠했다
그리고 피뢰침을 핥으며 내 죽음을
여름 밖으로 송신했다
*
초상화 도미노 세우기
선인장 면도하기도 신물이 날 무렵
흙먼지 덮인 장화에서는 솜털 달린 싹이 돋았다
담뱃재 쌓인 깡통에서는 부러진 열쇠
둥근 손잡이가 밤마다 굴러 들어와 내 눈두덩 위로
차갑게 올라탔다
핏기 가신 단풍 몇 장이
내 조그만 배수로를 막아서며 되묻길,
차라리 우물 속에 사자를 들이지그래?
그래, 언제나 베개는 베개를 베개에……
참담해진 대가리가
마침내 녹슨 칼날을 빼물고
품 안의 불능과 입 맞추려 할 때
대가리 가득한 진열장이 건들건들
내 머리 위로 쓰러지며 말하길,
딸꾹질 나면 우선 허리를 굽혀
그리고 배꼽을 누른 다음 침을 삼켜봐
양말에 구멍 나면?
발톱을 깎아!
그러나 그러나 베개는 베개에 베개를……
베갯속을 내 불능의 씨앗들로 채워넣어도
새벽은 또다시
내 머리를 허옇게 분갈이하고 떠났다
- 이설빈 「베개는 불능의 거푸집」 (『울타리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억지로 감았던 눈꺼풀이 자꾸 말려 올라갑니다. 심장 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자야 하는데, 자야 하는데. 읊조릴수록 잠이 달아나는 경험, 다들 있죠? 그럴 때면 베개가 내 귓속에 대고 속삭이는 느낌이에요. '너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거야.' 소리는 점점 커지죠. 다양하게 변주되기도 합니다. ‘내 불능의 씨앗들’이 늘어납니다.
잠은 죽음의 아류이자 연습장입니다. 베개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관이죠. 습하고 더운 날씨가 우리를 더욱 잠 못 들게 하는 밤, 모쪼록 평안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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