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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용감한 안녕 - <로봇 드림>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31화
<로봇 드림>은 어쩌면 관계에 대한 인간의 양분된 태도를 생물과 사물의 작동 방식으로 나누어 실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2024.03.29)
영화 기자 김소미가 혼자 간 극장에서 마주한 인생의 이야기,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로봇 드림>을 처음 본 것은 지난 가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BIAF)을 앞두고 프로그램 노트를 의뢰받은 무렵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른 뒤에도 다시 한번 핸드폰 번호 인증을 거쳐 일정 재생 횟수가 넘어가면 폭파되고 마는 링크를 열었을 때, 나는 업무를 겸한 영화 감상을 노트북 앞에서 해치워야 하는 순간에 자주 그렇듯 조금 피곤하고 심드렁한 상태였다. 늦은 밤 거실 텔레비전 앞 앉아서 전자레인지에 돌린 맥앤치즈를 퍼먹는 주인공 개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개처럼 마감을 대신해 주는, 아니 그저 옆에 있어 주기라도 하는 로봇을 주문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사는 커녕 결정적인 음악을 제외하고는 침묵에 잠기길 두려워하지 않는 이 애니메이션이 나를 사로잡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시를 살아가는 외로운 개의 클로즈업숏에는 영혼을 흔드는 구석이 있었다. 나는 곧 차가운 양철 로봇의 표정이 이리도 무구해 보일 일인가, 중얼거리면서 둘의 뒤꽁무니를 밟았다. 문화적 절정기를 지나는 센트럴파크에서 이종(異種)의 연인이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에 발맞출 때는 할 수 있다면 함께 꼬리를 흔들고 싶어졌다.
1980년대 뉴욕, 고독한 1인 가구 세대원인 개가 사는 작은 아파트에서 출발한 영화는 해변과 놀이공원이 사이좋게 만난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의 플레이랜드 놀이공원에서 관계의 절정과 추락을 동시에 구현한다. <로봇 드림>의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은 이별의 불가항력을 서사적 당위 안에 녹여냈다. 간단히 말해 어느 여름에 로봇은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자기 존재를 잊을 만큼 사랑의 매혹에 푹 빠져버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낙천성과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로봇이 소금물에 부식되어 그저 작동을 멈춰버린 거대한 고철 덩어리가 되어버리자 개는 무력해진다. 어느새 휴가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의 문은 굳게 닫혀 접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그는 절망한다. 여기서 잠시, 나는 이것이 멜로드라마가 맞는지 질문했다. 움직일 수 없는 사람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갇힌 사람과 자유로운 사람, 다치고 아픈 사람과 건강한 사람... 이 이야기가 그려내는 관계의 양면에는 분명한 격차가 있다. 그러니 내게 <로봇 드림>은 <패스트 라이브즈>이기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고, 병실에 격리된 환자와 보호자였고, 장벽과 철조망 너머로 분리된 모든 사람들이었고, 사랑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결코 동등하지는 않은 모든 사람들이었다.
이어지는 <로봇 드림>의 이야기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이다. 우리가 부재한 상대의 그림자 안을 여전히 서성이고 있을 때 찾아오는 희미한 인연들 ― 오리, 새, 악어, 눈사람 ― 과 만났다 어긋나는 시간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정직하게 흘러간다. 고백하자면 이 무렵 나는 새벽녘 쏟아지는 졸음을 핑계로 노트북을 덮고 말았다.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2D 카툰의 말간 얼굴을 하고 냉혹한 진리를 덤덤히 말하는 이 애니메이션으로부터 잠시 도망치고 싶었다. 어제 내가 버린 뒤 썩지 않고 지구 어딘가에 영영 처박히고 말 플라스틱을 제외하면, 시간과 중력은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다는 사실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영원이란 단어는 도대체 누가 발명한 거지? 어기적거리며 침대로 들어갔다.
영화 기자로서의 불성실함은 차치하고 영화를 거기서 끊어낸 것이 얼마나 잔인한 일이었는지, 원고 마감이 얼마 남지 않은 며칠 후의 어느 아침에 불현듯 깨달았다. 3분의 2지점에서 끊겨버린 내 버전의 <로봇 드림>에서 사는 애석한 ‘양철 나무꾼’은 아직도 하염없이 해변에 누워있기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지고지순한 개가, 파블로 헤르베르 감독이, 로봇을 구해줄 장면을 보아야만 했다. 돌아간 옛 뉴욕에서 로봇은 구출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해 개를 잃은 로봇은 죽는다. 산산이 분해된다. 그러다 기적적으로 구원된다. 일부는 남고 또 일부는 결코 전과 같을 수 없는 상태로 개조되어 부활한다. <로봇 드림>은 어쩌면 관계에 대한 인간의 양분된 태도를 생물과 사물의 작동 방식으로 나누어 실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상대를 먼저 선택하는 사람과 다가오는 상대를 맞이하는 사람, 떠나야 하는 사람과 제자리에 있는 사람, ‘둘’의 관계는 이 잔인한 대칭 속에서 언제나 아름다워진다.
이 무렵 영화는 새 동반자인 너구리를 만나 일상을 영위하게 된 로봇으로 시점을 이동해 결말까지 달려 나간다. 그토록 고대했던 재회의 순간도 로봇에게 시선의 주권이 주어진다. 어느 날 창밖에서 거리를 지나가는 개와 그의 새 로봇을 만난 로봇은 한달음에 뛰어가 옛 연인을 붙잡는데, 두 사람이 와락 끌어안자마자 프레이밍은 훅 넓어져 듀오가 아닌 콰르텟의 복잡함을 담아낸다. 핫도그를 굽다가 따라 나온 너구리의 그 영문도 모르는 표정이란! <로봇 드림>이 효과적으로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유는 따져보면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오늘날 영화 문법에서 거의 저어되는 방식들 ― 대표적으로는 ‘상상 신’ ― 이 애니메이션이기에 시도 가능한 구도와 편집점, 캐릭터의 사랑스러움을 빌려 새 효용을 입고 장점을 극대화한 데 있다. 우리는 둘의 재회 장면이 로봇의 짧은 상상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토록 고대하던 조우의 기쁨이 곧 너구리의 서운함으로 연결됨을 우리의 로봇은 ‘본다’. 유리창에 비친 상상 속에서 로봇은 이미 그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로봇의 꿈은 지금의 상대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에 머무른다. 갈망해 온 극적 재회 앞에서 현재의 상대에 충실하기 위해 결국 욕망을 물리친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전통 중 가장 애처로운 모티프다. 파블로 베르헤르 감독이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말에 빗대면 이것은 “도시의 규칙”이기도 하다.
로봇은 결심한다. 그를 보내주자. 그러나 어떻게? 여기서 <로봇 드림>이 우리를 울리는 두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이유가 나온다. 너구리에 의해 카세트 몸체를 가지게 된 로봇이 자기 심장으로부터 음악이 흘러나오도록 하는 설정은 근래 내가 본 최고의 최루성 장면이다. <September>의 선율이 만든 진공 속에서 이제 둘은 함께 춤춘다. 음악이 끝나면 개는 계속 거리를 걸어가고 로봇은 자신의 옥상에서 핫도그를 먹을 것이다.
가장된 우연에 즉각 반응하는 개의 꼬리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었다. 만약 이 멜로디가 잊었던 로봇을 떠올리게 한다면 개는 오히려 슬퍼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별 이후의 시간을 이기지 못하고 한번 이탈했다 돌아온 비겁한 관객까지 넉넉히 포옹해 준 <로봇 드림>은, 아픈 이별이 찬란한 추억마저 부식시킬 수는 없다고 가장 용감한 연인처럼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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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