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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후유증 - <파묘>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30화
나는 1000만 관객을 향해 가는 <파묘>를 다시 보면서 가장 노골적인 감흥의 차원에서 <파묘>의 오락성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됐다. (2024.03.19)
영화 기자 김소미가 혼자 간 극장에서 마주한 인생의 이야기,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
오컬트 영화에서 미지(未知)는 악보다 중요한 개념이다. 초자연의 불가해함을 원천으로 삼으며 금기를 시험하는 이 장르는 과격할지언정 깨끗해지긴 어렵다. 그러나 파묘에서 첩장, 혼령에서 정령, 도굴꾼에서 독립 투사들을 횡보하는 영화 <파묘>는 귀신의 물리적 실체를 재현하고 잠정적으로 해치운 뒤 ‘기념사진’까지 남기는 영화다. <검은 사제들>과 <사바하>를 넘어 <파묘> 앞에 선 장재현 감독은 문득 신비 탐구보다는 역사적 자각의 순간에 붙들린 것처럼 보인다. 민속 신앙으로서의 무속이라는 동앗줄을 따라 올라가다가 식민통치의 잔재에 가 닿게 된 것은 어쩌면 꽤나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재현 감독이 설정한 네 사람 - 상덕, 화림, 영근, 봉길 - 이 일상과 오컬트의 괴리만큼이나 역사적 사건에 거리를 둔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덕분에 <파묘>는 당사자의 오컬트가 아니라 해결사들의 활약상으로, 흥미로운 직업 드라마로 완성된다. 신부와 목사와 스님을 거쳐 무당과 지관에 이르는 게 된 감독은 오컬트 세계의 전문가들을 애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덕분에 <파묘>를 보는 동안 우리는 무속을 미신이라 치부할 수는 있어도 그에 헌신하는 인물들을 사기꾼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숙달과 전문성이라는 자질에 대한 우리의 동경을 <파묘>는 뜻밖에 증명하는 셈이다. 귀신의 영화를 좋아하거나 괴수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제각기 반쪽짜리 영화일 뿐이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1000만 관객을 향해 가는 <파묘>를 다시 보면서 가장 노골적인 감흥의 차원에서 <파묘>의 오락성이 어디에 있는지 질문하게 됐다. 음침한 산중에서 무덤 발굴에 여념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장르 팬을 넘어 이토록 보편적인 매력을 소구하게 된 이유를.
두 주인공이 차례로 자신을 소개하는 도입부의 보이스 오버는 결코 세련된 선택이 아니거니와 다소 어색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내레이션들은 쓰임새에 부응한다는 느낌을 주는데, 자기 직업을 천명하는(“나는 무당이다, 나는 지관이다”) 이가 풍기는 고색창연한 비장함만큼은 확실히 각인되기 때문이다. <파묘>는 분명히 경력과 자질, 그리고 생계가 결부된 노동에 관한 이야기다. 르메르 코트가 필요한 젊은 무당과 딸의 결혼을 앞둔 중년의 지관에게 떳떳하게 일한 만큼의 경제적 대가는 그들이 믿는 비가시적 세계만큼이나 숭고하다. 어째서 “젖은 나무는 쇠보다 질긴”지 여전히 오행의 이치를 납득하기 어려운 관객에게도 직업인으로서의 ‘묘벤져스’는 핍진하며 호감 가는 이유다.
전문가 영화의 쾌감은 할리우드 직업 드라마의 전통을 따라 주인공이 자신의 헌신과 야심, 그리고 우수성 추구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 있다. 언론과 법조계, 요리사의 무대가 얼마나 많은 시나리오 작가를 구원했는지 의심할 여지는 없다. <파묘>의 인물들은 능력주의의 전통과 반동,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무당, 지관, 장의사는 세간이 칭송하지 않는 직업이며 문자 그대로 죽음의 세계를 다루는 가려진 전문가이나 때로 좌중의 정신을 빼놓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로 스펙터클을 책임진다. 김고은의 대살굿을 보는 쾌감이 오컬트 영화의 그것인지 Hulu 오리지널 <더 베어>의 주방을 지켜볼 때의 그것인지 적어도 나는 분간하기 힘들었다(고 여기서 고백한다). 공방이 절정으로 치닫는 법정 신이나 월스트리스 증권 거래소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접전을 비출 때 그러하듯, <파묘>에서 동시에 굴러가는 4대의 카메라는 무속업의 상징과 영광을 시각적으로 아낌없이 표출하는 장면의 긴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접신해 불에 그을리지 않고 칼에도 찔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배우 김고은이 보여주는 찰나의 미소는 귀기일 수도, 자신이 원하는 경지에 비로소 도달한 베테랑의 만족스러움일 수도 있다.
영화가 오컬트에서 괴수물로 전환할 때 <파묘>의 직업인들에게도 변신이 요구된다. 독립군이 도굴꾼의 모습을 하고 싸웠듯 도깨비 괴물은 지관의 모습을 한 전사를 필요로 한다. 이야기의 차원에서 이것은 어떤 깨달음에 가까워서, 상덕이 오래된 짐더미 속에서 “도굴꾼치고는 지나치게 비장한 얼굴들”의 사진과 대면하는 순간에 이미 소명은 기지개를 켠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부할 수 없는 부름 속에서 상덕은 어떤 불가항력에 휩싸이기라도 한 것처럼 충동적으로 행동한다. 조셉 캠벨을 위시한 오래된 작법서들이 영웅의 소명이라 부른 이것을 <파묘>의 제작진은 병실 장면에서 동료애와 역사의식이라는 현실 논리로 치환해 낸다. 제작진의 불안이 낳은 산물이기에 유독 덜그덕거리는 장면이다.
묘벤져스는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내러티브의 차원에서 완성되어 간다. 현실에서 나는 여전히 소명의 형체와 표정을 묘연히 여기지만 <파묘>는 직업 드라마와 영웅 서사의 요건으로서 소명이 작동하는 방식을 아주 간단히 알려준다. 그것은 두려워서 거절하거나 쫄아서 실패한 뒤에도 기어코 다시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 말자”고 일을 물리려 하고 겁에 질려 뒷걸음질 쳐 놓고서도 현장으로 돌아가는 일을 포함한다. 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때로 억지를 부리게 한다. 그리고 만약 운이 좋다면, 세상에 기여한다.
다이묘와 몸주신을 가시화하는 영화인 <파묘>는 인간의 문제에 한해 일말의 미스터리를 남긴다. 이 영화에서 끝내 흐릿하게 장막이 드리워진 영역은 지난하고 치열했던 무속적 사투가 네 명의 숙달된 직업인들에게 남긴 상흔이다. 불시에 옷자락을 적시는 피, 스치듯 보이는 헛것이 말하길 이들의 직업적 역량은 일부가 영영 손상되었을 가망도 배제할 수 없다. 영웅의 자리는 일시적이나 직업은 지속된다. 충격 이후에도 일은 이어진다. <파묘>에서는 그 세부만이 영영 미지로 남는다. 오컬트에서 괴수물로 척추를 꺾은 영화에 한 번 더 비틀어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펼쳐질 세계가 이 고집 센 전문가들의 후유증에 바쳐지길 바란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결혼식의 단체 사진에 뒤섞여 있는 사람들에게 오랜 시간 따라붙을 후유증. 그것이 내게는 가장 무섭고 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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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