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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여성의 날] 과학하는 여자들은 함께 흐른다 - 임소연 과학기술학자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 임소연 과학기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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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두 명 그들을 만나가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 아니 우리는 흩어져 사라져 버리지 않고 함께 흐르며 점점 큰 물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2024.03.05)


채널예스 여성의 날 특집 기획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세상’ 

욕망을 숨기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들은 선입견을 벗어나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소설, 영화, 과학,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전형성을 부수고 다채로운 욕망을 보여주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과학기술 분야 여성인력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유리천장’만큼 흔히 쓰이는 비유가 ‘파이프라인(pipeline)’이다. 수돗물 파이프라인을 떠올려 보자. 수도꼭지에서 물이 잘 나오려면 수원지에서 보낸 물이 수도관을 통해 잘 전달되어야 한다. 수도관의 이음새가 좋지 않거나 관에 문제가 있어서 틈새나 구멍이 생긴다면 물은 그곳으로 빠져나가고 최종적으로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양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다. 100만큼의 물이 들어갔는데 파이프라인 끝에서 나오는 물이 40 정도라면 중간 어디선가 물이 줄줄 새고 있다는 뜻이다. 여성과학자 파이프라인이 딱 이렇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여성과학기술인육성재단이 함께 펴낸 보고서를 보자. 2020년 국내 이공계 대학 입학생 중 여학생 비율은 29.6%이다.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신규 채용될 시점에서의 여성 비율은 28.1%로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관리자 및 책임자급이 되는 파이프라인을 쭉 따라가다 보면 수치가 뚝뚝 떨어진다. 재직자 중 여성 비율은 21.5%, 보직자나 관리직 중 여성 비율은 12.0%, 연구과제책임자 중 여성 비율은 11.4%이다. 학위소지자 중 여성 비율을 봐도 그렇다. 2021년 기준 자연계열 전공에서 학석사 소지자 중 여성은 절반 정도인데 비해 박사급의 여성 비율은 38.1%다. 공학계열은 사정이 더 안 좋다. 학석사 졸업생 중 여성 비율은 20%대인데 박사 졸업생 중 여성은 14.8%이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경력을 유지하는 여성도 현저히 적어진다. 2019년의 대학 및 연구소 정규직 연구 인력을 기준으로 20대 여성이 동일 연령대 재직자 중 31.9%를 차지하는 데 비해 50대 이상의 여성 연구자 재직 비율은 9.9%로 줄어있다. 심지어 이들 중 절반이 넘는 54.9%는 5년도 되지 않아 연구소를 떠난다.

그런데 도대체 파이프라인을 빠져나간 그 많은 여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다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찌감치 파이프라인에서 빠져나온 내 이야기부터 하자면 난 결국 멀리 가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과학자가 되겠다고 과학고에 들어가고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했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대신 과학전시를 만들고 연구하는 일을 거쳐서 지금은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과학교양수업을 가르치고 더 가치 있는 과학, 여성을 배제하지 않는 과학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처음엔 이 파이프라인에서 가능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나마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과학뿐임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과학학’ 분야에 발을 들이면서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이유인 과학에 대한 오해와 환상을 깨고 나니 과학을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더 놀라운 사실은 나와 비슷한 여자들, 그러니까 과학자는 아니지만 ‘과학하는’ 여자들이 주변에 많다는 것이었다!

과학하는 여자들, 그들은 과학 안팎의 여성 전문가들을 연결하고 여성과학자의 일과 삶을 드러내는 글을 씀으로서 여성과학자의 존재감과 연대를 단단하게 한다. 그들은 과학자로 불리지는 못하지만 과학에 중요한 기여를 하는 다른 여자들의 일을 기록하기도 한다. 여성과학자를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행정가나 더 평등하고 정의로운 과학을 만드는 정치인이 되기를 택한 이들도 있다. 아무도 파이프라인 밖으로 나와 가야 할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학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한 명 두 명 그들을 만나가며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 아니 우리는 흩어져 사라져 버리지 않고 함께 흐르며 점점 큰 물결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최근 ‘이과여자’라는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혼자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와는 달리 파이프라인을 거침없이(!) 통과해서 과학자가 된 진리하라님의 제안과 수고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문과남자’도 과학책을 쓰는데 ‘이과여자’가 과학 이야기를 못 할 게 뭐 있냐는 그의 기개에 반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오케이를 외쳤다. 뇌과학자로서 자신이 하는 연구만큼이나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삶과 다른 여자들의 삶에 관심과 애정, 책임감을 가지고 있는 여성과학자라니 떠올리기만 해도 힘이 난다. 당당한 이과여자로서 지금도 실험실에서 열심히 연구에 전념하고 있을 여성과학자들에게 이제 더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이프라인 끝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여성과학자 롤모델처럼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을 믿고 응원하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여자들이 있으니 언제고 실험실 벽 너머로 손을 내밀어 달라고 말이다.



*필자 | 임소연

과학기술학 연구자.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에 재직 중이다. 과학 기술과 젠더, 몸과 테크놀로지, 신유물론 페미니즘 등에 관심이 있으며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와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겸손한 목격자들: 철새·경락·자폐증·성형의 현장에 연루되다』(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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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임소연

과학기술학 연구자. 동아대학교 기초교양대학에 재직 중이다. 과학 기술과 젠더, 몸과 테크놀로지, 신유물론 페미니즘 등에 관심이 있으며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와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겸손한 목격자들: 철새·경락·자폐증·성형의 현장에 연루되다』(공저)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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