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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잃어버린 캠코더의 모험 - <이어지는 땅>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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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사건의 타임라인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여자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만났다. (2024.01.29)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이어지는 땅> 포스터


찍어놓고 좀처럼 다시 보지는 못한다. 사진과 영상에 관한 이야기다. 박제된 시간을 재확인하는 일은 왠지 모르게 두렵다. 특히 사적인 사진의 경우에 나를 사로잡는 것은 사각의 프레임 안에 들어있는 거의 모든 것이 지금은 끝났다는 느낌이다. 진작에, 영영, 대체로 끝나버린 것들 투성이. 다만 이렇게 시인하는 것은 너무 우울한 일이다. 이럴 때 추억이란 말이 도움이 된다. 한 때는 누렸다는 데 집중하면 감사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의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사람들의 활기를 잊지 말기로 한다. 사실 기록이라는 말도 조금 서글프다. 셔터를 누르고 싶다는 욕망의 표정은 언뜻 활기차 보이지만 그 심연에는 증발하는 시간을 향한 불안이 감춰져 있다. 롤랑 바르트가 “모든 사진이 존재의 증명”(Every photograph is a certificate of presence, <카메라 루시다>)이라고 한 말을 뒤집으면 모든 사진은 부재의 증명이란 말도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들여다본 사진은 지금 내게 없는 나의 시간이 너무도 선명히 존재했었음을 알려준다. 역시 뒤집으면, 나는 한참 후에서야 내가 정말로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을 치뤄야 한다. <이어지는 땅>에서 누군가 집 앞에 버린 캠코더를 열어본 호림(정회린)에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다만 호림이 보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낯선 여자다. 연인의 시선 안에 담긴 여자는 한가로이 창밖을 보거나 고요히 잠들어 있다. 분명 사랑의 시간이다. 영화의 무대는 런던. <이어지는 땅>은 모종의 일상을 제쳐두고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온 호림이 캠코더의 주인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까? 관음의 흥분이나 미스터리의 긴장이 들어설 법한 장면인데 정작 호림은 치솟는 당혹감을 참을 수 없는 표정으로 캠코더의 화면을 덮어버린다. 곧 호림이 공원 벤치에서 언젠가 알던 남자와 재회하는 우연이 벌어진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이 옛 연인의 그것인데다 동환의 새 애인 경서가 두 사람의 등 뒷편에서 공원의 들판을 천천히 가로질러오자 나는 움찔하고 말았다. 경서의 동선이 Z축의 거리를 점점 좁혀오는 시간이 곧 호림이 상실의 자각과 마주하기까지의 지연처럼 느껴졌다. 이어서 캠코더 속에 존재했던 여자 이원(공민정)이 영화의 화면 안으로 천천히 걸어나온다. 옛 애인과 캠코더 속 여자를 만나는 하루, 어색한 네 남녀의 저녁식사. 이 영화에서 시제를 따져야 한다면 현재로 부를 만한 순간은 이것이 전부다.

희한하게도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동환을 제외한 세 명의 여자들이 한 사람처럼 보였다. 관계를 망친 여자(호림)과 관계를 지속 중인 여자(경서)가 각자의 상념과 상처에 휩싸여 있을 때, 가운데 앉아 아마도 몇해의 시간을 먼저 살아낸 듯한 여자(이원)이 담담히 말한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시의 종행처럼 한 차례 소란스러웠던 내면들의 동요가 가라앉는다. 영화의 카메라가 집이라는 장소에 몰두할 때 실내는 그 자체로 종종 초현실적인 심리극의 무대가 된다. 호림은 타국이라는 하나의 낯선 프레임에서 한 겹 더 들어가 동환의 집이라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장소에 잡입한 인물이다. 이곳에서 경서와 동환은 함께 노래부르고, 호림은 몰래 동환에게 매달려보고, 이원은 그런 호림에게 오늘 밤 내 집에서 재워주겠노라고 한다. 역시 나는 이것이 하나의 장소, 하나의 시간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플래시백과 포워드의 결합처럼 보였다. 사랑이라는 사건의 타임라인에서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는 여자가 우연을 가장한 필연처럼 만났다. 언젠가 모질게 먼저 버려진 적 있었던 게 분명한 동환이 아직 오래된 땅에 발 딛고 선 호림을 시간 바깥으로 밀쳐낸다. “너도 앞으로 가.” 실내 장면이 마무리될 무렵, 나는 두 대사를 하나로 이어지는 말처럼 곱씹게 됐다. 많은 일이 있었구나, 너도 앞으로 가.


영화 <이어지는 땅> 스틸컷


타임루프 장르나 시간여행을 사건화하는 영화에서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를 만난다는 설정은 (비록 일시적이나마) 행운으로 간주된다. 미래의 나는 선인으로서 지혜를 알려주고 과거의 나는 바로잡을 기회를 주므로, 현재의 나는 어떤 식으로든 절박하게 액션의 주체가 되어야만 한다. <이어지는 땅>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쪼개진 나 ― 지금 내 곁에 존재하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나 ― 는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따라서 나 역시 아무것도 바로잡을 필요가 없다. 다만 롤랑 바르트의 말로 돌아가면, 그들은 증명해준다. 첫번째는 당연하게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증명한다. 캠코더 속 이원과 동환 곁의 경서를 보면서 호림은 자신이 진작에 건너온 한 세계를 뒤늦게 받아들인다. 서울에서 런던까지, 8880km를 날아가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는 뼈저린 진실까지도. 하지만 이 영화의 홀연한 지각변동이 이어붙인 땅 위에는 또다른 만남도 있다. 갈 곳이 없으면 내 집에 와서 자도 좋다고 대뜸 제안하는 여자가, 어두운 밤길에 함께 돌아가자고 구태여 붙잡는 이원이 호림을 지켜본다. 제안대로 호림은 이원과 함께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간다. 여기서 문득 캠코더의 시점이 한번 더 끼어든다. 두 사람이 지하보도를 통과할 때 마치 시간의 긴 터널처럼 보이는 원경을 배경삼아 이안이 혼자서 춤추듯 씩씩하게 걸어간다. 도입부의 캠코더 속 사랑에 빠진 여인은 이제 연인의 시점이 아니라 호림 자신의 시점으로 다시 쓰여진다. 터널 끝에는 분명 이어지는 땅이, 새로운 땅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드라마이기도 캠코더의 모험이기도 한 <이어지는 땅>의 침착한 낙관대로라면 나 또한 외면했던 사진첩의 시간들을 좀더 너그러이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계속 찍고 들여다보는 사이에 언젠가는,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나를 구성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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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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