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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당신은 나의 당신보다 크다 - <클레오의 세계>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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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 관해 인생 초입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대개 비슷하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나와의 시간으로 오롯이 지탱되는 인간일 것이란 기대에서 한번쯤은 깨어나야 한다. (2024.01.08)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클레오의 세계> 포스터


아파트의 관리원과 사랑에 빠진 소녀가 있었다. 모녀처럼 보이지만 실은 남남인 두 여자가 함께 보낸 시간들이 한 아이를 키웠다. 훗날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이 유년 시절을 떠올려 9년 만에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를 만들기로 했을 때, 포르투갈 출신의 경제 이민자 로린다와 프랑스 소녀 마리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료들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그거 보모 영화(nanny movie)네!” 암으로 세상을 떠난 엄마 대신 보모 글로리아에게 의지해 온 여섯 살 클레오가 글로리아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그리는 <클레오의 세계>는 얼핏 <메리 포핀스>(1975), 혹은 시계를 좀더 현대로 당겨 <미세스 다웃파이어>(1994), <내니 다이어리>(2007) 같은 보모 영화의 계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보모의 존재를 장르화할 만큼의 문화적 양분은 없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현대 관객들, 특히 비서구권 관객에게 <클레오의 세계>는 내 것으로 접촉할 도리가 희박한 영화로 보이기까지 한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여성들에게 간절한 ‘베이비시터’의 역할이 직업 너머의 풍경을 갖지 못하는 까닭에는 모성 신화를 침범하지 말라는 요구도 있다.

이러한 몇 가지 장벽에도 불구하고 <클레오의 세계>는 사랑법의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모든 유년의 경험에 가닿을 만한 영화가 된다. 그 시선의 결이 아름다운 덕분이기도 하지만 생긴 것과는 딴판으로 서늘한 시선을 품은 대목이 훌륭하다. 캐스팅 디렉터가 놀이터에서 뻔뻔히 군림하는 모습에 반해 오디션을 제안했다는 여섯 살 배우 루이스 모루아-팡자니는 투명하다 못해 감정이 시시각각 비치는 살갗의 소유자다. 나는 그를 따라 영화와 접속하는 도중에 일련의 보모 영화들이 서사 위에 쳐둔 안온함의 장막이 <클레오의 세계>에서는 태연히 걷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은 클레오를 사랑으로 돌본 글로리아가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돈 봉투를 받는 장면들을 구태여 감추지 않는다. 이 세계에서 진실한 유대 이전에 선행되는 것은 돌봄의 노동이다. 값을 지불하고 받는 경제 행위가 있고 떳떳한 노동이 있다. 다만 클레오가 잠든 밤에 빨래를 개키는 글로리아에게 이 사랑은 인생의 전부가 되지 못한다. 우아한 듯 실은 통렬한 어조로 여성들의 삶에 감춰진 진실을 찔러내는 셀린 시아마 영화와 긴 시간 함께한 제작자 베네딕트 쿠브뢰르의 릴리스 필름이 만든 영화답다.

어머니의 부고를 접한 글로리아가 고향으로 떠나자 한 철을 내내 그리움에 앓던 클레오는 여름방학에 글로리아가 있는 카보베르데 섬으로 향한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클레오가 전혀 모르는 글로리아의 삶이 있다. 글로리아만의 집. 딸과 아들. 바닷가에서 구워 먹는 생선 요리. 진행 중인 사업. 그녀만의 옷차림. 숨겨둔 로맨스. 글로리아의 집과 숲과 절벽에서 클레오는 이런 것들을 본다. 여행은 상상 밖을 기적을 허락하는 행위지만, 온갖 기적에도 불구하고 틈새에 스며드는 여전한 외로움을 완전히 막아주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찬란하다. 여섯 살 클레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글로리아의 손주가 태어나자 클레오의 세계 한 쪽이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글로리아가 돌아올 수 있도록 저 아이가 죽게 해주세요”라고 악마에게 빌거나 종국에는 갓난아이를 공격하게 될 때에 클레오는 인생 처음으로 극심한 자기혐오에 대해서도 배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에 관해 인생 초입에서 겪는 시행착오는 대개 비슷하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나와의 시간으로 오롯이 지탱되는 인간일 것이란 기대에서 한번쯤은 깨어나야 한다. 이 여름에 클레오는 고통스럽게 알게 된다. 당신은 언제나 나의 당신보다 크다는 것을.


영화 <클레오의 세계> 스틸컷


카보베르데에 도착한 첫날에 파리 소녀는 해맑게 단평한다. “집이 좁네요.” 어느 날은 아무렇지 않게 아빠가 전달한 돈봉투를 내민다. 긴장한 성인 관객들을 뒤로하고 카메라는 유유히 다른 각도로 나아가지만 서구의 양심에 민감한 백인 평자들은 한층 신랄한 코멘트를 보탠다. 이 영화의 한 과정이 글로리아를 독차지하려는 클레오의 여정임을 고려할 때, 그 과정에서 이 철없는 소녀가 지극히 그 나이다운 악랄함도 잠시 구사한다는 점까지 감안하여, <클레오의 세계>를 후기 식민주의에 대한 우화로 읽는 것이다. 도식적이긴 하나 결코 틀린 말도 아니다. “유럽의 제국주의적 사고는 아프리카 식민지에 대한 소유권뿐만 아니라 그 관계의 선의에 대한 믿음에 빠져 왔으며,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요구할 때 당황과 분노, 그리고 종종 폭력을 유발했다”는 역사적 서술과 <클레오의 세계>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 식민주의의 후손들에게 작동하는 양심의 문제와 그 알레고리를 완전히 감추지 않으면서도 <클레오의 세계>가 사랑의 가능성을 담보하는 것이 제법 신기하다.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은 머리보다 심장에 밀착한 자세를 취하며 어느 비혈연 관계의 진정한 우정을 더 큰 진실로 택한다. 이쯤 되면 영화의 의도보다 방법을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어떻게 그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걸까. 붓으로 직접 그린 뒤 프로크리에이트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배경은 디지털 작업한 <클레오의 세계> 속 애니메이션 푸티지는 거칠고 추상적인 몇몇 풍경을 보여준다. 오프닝에서 처음 등장해 클레오의 여름 여행이 전개되는 동안 종종 틈입하는 이 애니메이션이 담아내는 것은 사실의 재현이 아니다. 거친 풍랑을 헤치고 바다를 건너오는 구릿빛 피부의 여자를, 누군가의 관에 꽃을 던지는 손길을, 피부를 감싸오는 또다른 피부를, 그리고 어느 섬마을의 화산이 폭발하는 상상 속 풍경이 누구의 것인지 어렵지 않게 떠올려본다. 클레오가 애써 그려낸 글로리아의 삶이 거기에 있다. 딱 클레오의 인지만큼 그려진 이 세계가 뭉클한 것은 어린이의 정서적 충격을 고려해 어른이 말해주지 않는 것들에 대해 작은 인간들 ― 우리들 ― 이 실은 얼마나 맹렬히 생각해내고 있었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내가 아닌 타인의 상태를 있는 힘껏 상상하는 이 무구한 시도로부터 세상의 그럴싸한 이치는 종종 무용해진다.

방학이 끝나고 둘은 세자리아 에보라 공항에서 헤어진다. 이번에 카메라가 먼저 따라가는 것은 클레오가 아니라 혼자 돌아 나오며 울음을 터뜨리는 글로리아다. 활주로를 배경으로 뒤늦게 치솟아 오른 여자의 눈물은 전에 한번 클레오의 것이었던 적 있다. 클레오는 글로리아가 떠나던 날 밤 창밖을 내려다보며 방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서로를 위해 몰래 운다. 뒤늦게 우는 두 여자에 대한 대구법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이 곧 그를 해방시키는 것임을 전하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짓다 만 호텔과 새로 키워야 할 아이, 유예된 수많은 관계들을 향해 돌아가는 글로리아의 눈물에 서린 복잡한 회한을 보면서, 나는 이 이별을 슬퍼하기보다 혼자 걷는 글로리아를 사무치게 축하하고 싶어진다. 영화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잠시 뒤돌아보는 클레오의 몸짓으로 문닫는다. 아이 앞에 남은 날들이 글로리아의 것보다 훨씬 길 테지만, 이 헤어짐의 대목에서 카메라는 울며 걸어가는 나이 든 여자의 길 위에 훨씬 더 오래 머무른다. 만약 이것이 마리 아마추켈리 감독 같은 수많은 클레오들의 기억법이라면, <클레오의 세계>는 한 가지 확실하게 희망적인 진술을 남긴다. 아이는 끝내 자라서, 나로부터 돌아섰던 타인의 표정을 볼 수 있게 되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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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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