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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헤어질 결심과 사랑 이야기 - <3000년의 기다림>

김소미의 혼자 영화관에 갔어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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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밀러와 박찬욱의 영화에서 사랑은 어떻게 원형의 예술이 되었나. 나는 이 두 개의 영화가 헤어질 결심을 이별이 아닌 사랑의 구성 요소로 본다는 사실에서 이야기의 위대함을 느낀다. (2023.01.13)


영화 평론가 김소미가 극장에서 만난 일상의 기술을 소개합니다.
서울을 살아가는 30대로서 체감한 영화 속 삶의 지혜, 격주 금요일 연재됩니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 포스터

*<3000년의 기다림>의 줄거리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랑, 갈망, 그리고 이야기에 관한 우화인 <3000년의 기다림>은 조지 밀러 영화의 배열표에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보다는 차라리 <꼬마 돼지 베이브> 쪽에 가까운 영화다. 어느 쪽도 정확한 짝은 아니나,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처럼 매끈한 CGI로 풍속도를 그린다는 점에서 후자와 어울린다. 이 영화의 주제를 사랑으로 좁힌다면, 사실 영혼의 쌍둥이는 따로 있다. 자부심을 버린 형사와 목숨을 내놓은 여자의 사랑법을 서술하는 <헤어질 결심>이다. <헤어질 결심>의 언어적 아름다움, 디지털 영화의 숙명을 외형만이 아닌 영화 내재적 요인으로도 합치해 낸 고도의 스타일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생략한기로 한다. 말하고 싶은 것은,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사이에 담겨 있는 사랑의 원형(原型)이다.

시끌벅적한 기숙사에서 고독한 섬처럼 유년을 보낸 어린 '알리테아(틸다 스윈튼)'는 외로울 때마다 이야기를 지었다. 그는 상상의 친구 '엔조'를 사랑했다. 엔조는 '두통이 있을 때면 사라졌지만 천식으로 꼼짝 못할 때면 언제나 곁에 있는' 충실한 동반자였다. 엔조를 잃고 싶지 않은 두려움은 곧 기록의 갈망으로 변모해서 소녀가 치열하게 일기를 쓰도록 했다. 엔조를 진짜처럼 묘사할수록, 더 잘 쓰려 할수록 일기는 실패했다.

"사실성을 강조하자 이야기는 더 의심스러워졌고 더 유치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어느 날, 빼곡히 적힌 자신의 우스꽝스러움을 견딜 수 없어진 소녀는 학교 난로에 노트를 통째로 태워버린다. 알리테아는 그렇게 엔조를 영영 잃어버렸다.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수십 년 후, 알리테아는 이야기에의 재능을 살려 서사학자(narratologist)로 살아간다. <3000년의 기다림>은 그가 강연 차 찾은 이스탄불의 고물상에서 얻은 유리병을 문지르다말고 병 속의 '지니(이드리스 엘바)'와 만나는 데서 본론을 시작한다. 병 안에 갇힌 지 3000년만에 해방의 기회를 얻었건만, 하필 세 개의 소원을 빌어야 할 인물이 서사의 전문가란 사실에서 정령의 고난도 함께 시작되는 지점이다. 유능한 서사학자는 인간이 자기 탐욕에 집착하게 만드는 소원 성취 모티프의 서사가 대개 실패로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안다. 게다가 알리테아는 지성을 동원해, 자기만의 작고 독립된 행복을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자족적 인간이다. 대답해야만 하는 쪽은 이내 인간에서 정령으로 바뀌어, 3000년의 존재는 고백하고 만다. 지난 시간을 통틀어 가장 사랑했던 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헤어져야만 했는지.

전말은 이렇다. 알리테아를 만나기 직전 정령은 19세기의 한 여성 '제피르'에게 가닿는다. 강렬한 지적 욕구의 소유자인 제피르의 소원대로 세상의 모든 이치를 가르치는 사이,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 초월적 지성을 갖게 된 제피르는 세상 밖으로 나가 이로운 존재가 되길 원했지만 정령은 여자의 마지막 소원을 유예하고 조금만 더 함께 있자고 한다. 그것은 실수였다. 다락방에서 정령과 머무르기에 여자는 이미 너무 큰 꿈을 가졌다. 그는 이내 정령의 구속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정령은 제피르가 폭발할 때면 스스로를 유리병에 가둬 제피르 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형벌을 반복한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이어지던 중, "당신을 만난 사실을 잊어버리고 싶다!"고 외친 제피르의 소원이 불쑥 이루어져버린다. 유리병에 갇힌 채 정령은 영영 잊혀진다. 알리테아의 엔조가 그랬던 것처럼. 

<3000년의 기다림> 속 액자형 천일야화는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영화의 러닝 타임은 중반을 훌쩍 지났는데, 인물들은 여전히 샤워 가운을 입은 채 호텔 방에서 대치중이다. 그러니까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해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가 못하다. 알리테아는 서사학자이기에 정령에게 쉽사리 소원을 빌지 않았지만, 동시에 서사학자이기에 그가 들려준 이야기의 마력에 완전히 빠지고 말았다. 정령을, 아니 정령이 제피르에게 바쳤던 사랑을 사랑하게 된 알리테아는 지금이 자신의 첫 소원을 빌 적절한 서사적 구성점임을 알아차린다. 제피르만큼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알리테아의 소원에 따라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애거사 크리스티가 『나일 강의 죽음』을 쓴 이스탄불의 고즈넉한 호텔방에서 알리테아의 본거지인 런던 대도심 한가운데로 이사한 정령은 현대 문명을 이루는 복잡한 전자기장 속에서 이내 병든다. 한때 정령이 제피르에게 그랬듯, 알리테아는 얼마간 예정된 비극을 모른 채 하면서 미련하게도 그 사랑을 붙든다. 고통받는 정령이 기다리는 집에서 '알리테아'가 홀로 외출과 귀가를 반복하는 후반부의 쓸쓸한 시퀀스엔 애수가 가득하다. 소원성취 서사는 주로 실패한다는 전통, 상상의 친구를 진짜처럼 묘사하려다 자기를 경멸하게 된 소녀의 경험, 사랑하는 이 곁에 영원히 머무르려다 오히려 영원히 잊히고 만 정령의 실수가 알리테아에게 다시 반복되려는 것일까. 나는 어쩐지 이 비극의 덫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나의 정령. 이 세계가 버겁다면 소원컨대 당신이 있을 자리로 돌아가세요."


영화 <3000년의 기다림> 스틸컷

그러나 결정적으로 <3000년의 기다림>의 주도자 알리테아는 현명한 인간이다. 그는 이야기로부터 삶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알리테아는 마지막 소원으로 정령이 자신을 떠나도록 하는 것이 둘의 사랑을 지키는 일임을 금방 깨달았다. 영화 말미에 알리테아는 공원의 행복한 연인들, 가족들 속에서 혼자 있다. 나는 비로소, 자발적 선택으로 홀로 살기를 자처하며 행복감을 느끼는 주인공이 서술된 오프닝 신이 엔딩을 위한 대구적 장치임을 알아차린다. 단독자일 때 그는 적당히 충만해 보였으나, 누군가를 사랑하는 지금엔 상대적으로 외롭다. 감정과 시간의 장작을 태워 겨우 슬픔의 재를 얻는다는 점에서 <3000년의 기다림>은 비효율의 극치다. 그러나 성공 신화가 아닌 사랑의 신화 속에서 알리테아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이제 스스로 유치하다거나 어리석다는 이유로 태워버릴 일 없는 일기를 새로 쓴다. '사랑은 증기나 꿈에 가까우며 사랑하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 속 마법'이라고 받아들인다. 누군가에게 납득받기라도 해야할 것처럼 상상 친구의 사실성을 갈망한 어린 날은 무색해졌다. 각자의 생리적 조건부터 다른 두 명의 개체가 만나 사랑한다는 일은 비밀과 광기를 동반한다. 사랑에 있어 설명하기 어렵다는 감각은 축복이다. 훌륭한 사랑 이야기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에선 인류가 차마 실천하기 어려운 일들도 해낸다. 조지 밀러와 박찬욱의 영화에서 사랑은 어떻게 원형의 예술이 되었나. 나는 이 두 개의 영화가 헤어질 결심을 이별이 아닌 사랑의 구성 요소로 본다는 사실에서 이야기의 위대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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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소미 <씨네21> 기자

보는 사람. 영화를 쓰고 말하는 기자. <씨네21>에서 매주 한 권의 잡지를 엮는 일에 가담 중이다.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독립 영화잡지 <아노>의 창간 에디터,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 등으로 일했다. 영화의 내면과 형식이 만나는 자리를 오래 서성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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