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짓는 사람] 정혜지 생각의힘 편집자 “어렵게 책을 만들고 싶다”
<월간 채널예스> 2021년 10월호
최근 들어서는 자기만족에서 그치지 말자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가 성격 자체가 자기만족을 잘하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책은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작업인 만큼 혼자서만 흡족하게 여기는 일은 경계하려고 해요. (2021.09.29)
사람을 좋아해야만 책을 잘 만드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좋아하면 더 즐겁게 책을 만들 수 있다. 정혜지 생각의힘 편집자는 함께 책을 만든 저자를 무척 각별히 여기는데, 저자들로부터 “같이 만들어서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 올해로 9년차 편집자가 된 그에게 “어떤 책을 만들 때 가장 좋았냐?”고 물었다. 망설임 없이 나온 답은 “매번 좋았다”였다.
“제가 기획한 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책도 있었지만 모두 좋았어요. 조금씩 다른 의미가 있겠지만요. 실은 지금 느끼는 만족도가 가장 높아요. 9년차라고 하면 아주 낮은 연차는 아니지만 또 대단한 연차도 아니잖아요. 연차치고는 늦게 후배 편집자가 생긴 편인데요. 예전 선배들이 ‘제발 더 많이 물어봐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나요. 저도 그런 선배가 되고 싶다,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요즘이에요.”
정혜지 편집자는 대학에서 정치외교학을 전공하고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스타트업 언론사에 취직했다. 1년 정도 일하다 북이십일과 일본의 에이지출판이 함께 만든 한일 합작 출판사 에이지21에서 편집자 생활을 시작했고 3년 후 가디언으로 이직해 허영만 만화가의 책을 비롯한 일서를 만들었다. 사회과학 도서를 주로 만드는 생각의힘은 세 번째로 일하게 된 출판사다.
“생각의힘을 알게 된 건 2016년 김재수 교수님이 쓰신 『99%를 위한 경제학』을 읽고 나서예요. 이 책을 무척 좋게 읽었는데 출판사가 생각의힘이었어요. 한번 각인이 되니까 이후에 나온 책들도 괜히 한 번씩 눈길이 가더라고요. 우리가 사는 사회를 고민하면서 책을 만드는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1년 정도 쉬다가 다시 출판사 입사를 준비하던 터라 독자로서 좋아하던 곳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다들 현실과 이상은 다르다고, 좋은 책 만드는 곳이 꼭 좋은 출판사는 아니라는 말들을 왕왕 하잖아요? 그래도 내가 직접 부딪쳐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니까요. 좋은 책을 만들면서 좋은 출판사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들어왔어요.”
올해 정혜지 편집자가 만든 책은 『신냉전 한일전』, 『트릭 미러』 등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신냉전 한일전』은 길윤형 <한겨레> 기자가 동아시아 신냉전 시대에 마주한 결정과 갈등과 대립의 순간들을 기록한 책. 평소 한일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정 편집자가 저자의 제안을 덥석 물고 만든 책이다.
“길윤형 기자님과 책을 만들면서 정말 많이 배웠어요. 기자님은 어떤 질문도 허투루 대답하는 경우가 없으시더라고요. 전문가 입장에서 보면 너무 작은 질문일 수도 있는데 언제나 진심으로 화답해주셨어요. 『신냉전 한일전』은 한일관계 전문가이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어요.”
지아 톨렌티노의 『트릭 미러』는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좋았던 책이다. 1988년생 <뉴요커> 기자의 뜨거운 글을 어떻게 알릴까 고민하다가 국내 여성 작가 8인의 추천사를 받기로 했고 강화길, 김금희, 김하나, 이길보라, 이다혜, 이슬아, 장혜영, 황선우 등의 작가가 찬사에 가까운 글을 보내줬다.
“지아 톨렌티노의 글이 너무 좋았거든요. <워싱턴포스트>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수전 손택’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알려진 저자가 아니기 때문에 좀더 주목을 받을 만한 장치가 필요했어요. 그래서 이 책을 좋아할 만한 작가 분들께 추천사를 의뢰했는데 너무나 흔쾌하게 좋은 글을 보내 주셨어요. 혹자는 추천사를 너무 많이 깐 책이 아니냐고 이야기하는데, 이것도 하나의 구조된 세계 안의 장치라고 생각해요.”
지금 정혜지 편집자가 만들고 있는 책은 선거철에만 호출되는 지역, ‘호남’을 이야기하는 사회과학서다. 지역차별, 불평등, 산업 및 경제구조, 취약한 지역정치구조 등 다양한 각도와 층위에서 특정 지역의 문제를 다루는 책이다.
“사람과 세상, 이 두 가지가 책을 만들면서 품게 된 저의 키워드예요. 세상의 어떤 새로운 현상을 깊게 알고 싶을 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 중 하나가 책이잖아요. 만약 제가 다른 직업을 가졌다면 일하는 시간 외에 애를 써서 알아내야 했겠지만, 편집자이기 때문에 일하면서 알게 되는 것들이 너무 많아요.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을까, 종종 생각해요.”
정혜지 편집자는 자신이 만든 책을 SNS로 적극 홍보하는 스타일이다. 포스팅을 읽어 보면 책에 관한 애정이 뚝뚝 떨어진다. 진심이 아니라면 쓸 수 없는 문장들, 모두 기꺼이 자발적으로 쓰는 글이다.
“저는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아요. 한때는 딱딱 필요한 말만 건네고 용건만 재깍재깍 처리하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는데, 저한테는 너무 어렵더라고요. 많은 분이 공통으로 해주시는 이야기 중에 ‘업무 메일을 넘어, 어떤 마음을 주고받는 느낌’이라는 표현이 정말 많거든요. 그런데 또 이분들 역시 저에게 그런 마음을 주세요.. 서로 맞으니까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어요. 단어에서, 행간에서 다정함을 건져 올릴 때 이 일을 해서 다행이라고 많이 느껴요.”
좋은 편집자는 협업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일을 하면 할수록 사람을 믿는 일의 대단함을 느끼는 중이다. 편집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모르는 채로 넘어가지 않는 일’. 저자의 원고를 읽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지점에 관해 질문해야 할 때, 확실히 납득할 때까지 끈질기게 물어본다.
“일차적으로는 지식의 유무와 관계된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찾아볼 수 있는 선까지 찾아보다가 제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에게 묻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이 맞는 해석인지를 몇 번이고 물어봐요. 그 다음으로는 이해의 영역에서 어딘가 의구심이 들고 쉽게 납득되지 않는 논리 구조와 만날 때 또 물어봅니다. 당연히 그 분야의 전문가인 저자에 비하면 저는 본 것도 들은 것도 적은 사람이지만, 저 같은 사람을 위해 책이 필요한 거잖아요. 처음에는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모르고 넘어가는 게 더 부끄러운 거니까요. 그리고 더 나아가 타협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저도 저자도 질문이 반복되다 보면 지칠 수가 있잖아요.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타협하지 않으려고 해요. 참, 최근 들어서는 자기만족에서 그치지 말자는 생각을 자주 해요. 제가 성격 자체가 자기만족을 잘하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책은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작업인 만큼 혼자서만 흡족하게 여기는 일은 경계하려고 해요.”
정혜지 편집자는 책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오랜 시간 책을 만들다 보면 연륜이 쌓여 기술이 많아지고 실력이 늘겠지만, 사고와 마음가짐만은 매번 처음 책을 만드는 사람의 태도를 갖고 싶다. 그는 “10만 부 20만 부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편집자들도 당연히 부럽지만 작은 것 놓치지 않는 살뜰한 편집자들을 더 좋아하고 존경한다”고 말했다.
“앞으로 동세대 여성 작가들의 이야기를 많이 접하고 잘 전달하고 싶어요. 203040 여성이 책을 많이 사는 독자군인만큼,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카테고리가 좀 더 넓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같은 세대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공론의 장으로 더 끌어오고 싶어요. 우리 삶에 여러 접점이 존재하고 그것이 완벽하게 동일한 경험은 아닐지라도 하나의 큰 카테고리 안에서 내가 한 고민을 당신도 해왔고, 당신이 해온 치열한 싸움을 어쩐지 알 것 같다는 마음이 들거든요. 안심도 하고 자극도 받고 위로도 받고, 무엇보다 강력한 힘을 받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많이 하고 싶어요.”
정 편집자가 바이블처럼 삼고 있는 문장이 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사람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릴 줄 모릅니다. 이런 사람들만 사는 땅은 죽은 땅입니다.” 소설가 조세희의 글이다. 언젠가 조세희 작가가 다시 펜을 든다면 독자로서도 편집자로서도 기쁠 것이라는 그. “사랑 없는 욕망만 가득한 시대에 사람과 세상에 관심 많은 편집자”가 만들 책들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조귀동 지음 / 생각의힘
‘청년(90년대생)’, ‘불평등’에 관한 책은 아주 많다. 그러나 내게는 명쾌하지 않았다. 현실을, 문제를 더 선명하고 적확하게 보고 싶다는 갈증이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어느 날, 이 원고와 만났다. 그리고 그간 보지 못했던 많은 숫자와 마주할 수 있었다. 아주 슬프고 또 아픈 숫자들이었다.
이재갑, 강양구 지음 / 생각의힘
코로나19에 관한 책 또한 쏟아져 나왔다. 이 책이 남다르게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던 어느 날, 본문 속 문장들과 마주하다가 한 가지 확신을 얻었다. 이분들과 함께라면 혹독하고 뼈아픈 이야기 속에서도 뜨겁고 물컹한 무언가를 건져낼 수 있겠구나. 책은 어쩔 수 없이 바이러스와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당신과 함께 지금 우리가 선 자리를 점검한다.
지아 톨렌티노 지음 / 노지양 옮김 / 생각의힘
이 환상적인 에세이는 크게 세 가지 키워드를 말한다. 인터넷, 페미니즘 그리고 정체성. 학창 시절 싸이월드에 일기를 적고 ‘공개’로 둘까 ‘비공개’로 둘까 고민한 적이 있는 여성이라면 이 책을 손에 들어주시기를. 끔찍한 세상 - 지금 이곳 - 이 우리를 갉아먹고 있는데 더는 피할 곳이 없을 때, 대관절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 함께 고찰합시다.
길윤형 지음 / 생각의힘
2019년 뜨거웠던 여름을 다들 기억하시는지. “사지 않고, 가지 않겠다는 약속”은 많은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2년이 흘렀다. 한일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지난 몇 년간의 갈등은 이전과 분명 달랐다. 무어가 어떻게 달랐는지, 왜 달랐는지 치밀하고 찬찬하게 복기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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