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미술 감상은 인간관계와 비슷해요”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관계도 있고요. 미술과 나의 관계도 비슷해요. (2021.02.24)
처음 만난다. 눈길이 간다. 잘 모르지만 계속 보고 싶다. 보면 볼수록 알 수 없는 감정이 느껴진다. 흡사 연애의 시작과 같은 이 흐름은 미술 감상에 그대로 적용된다. 미술을 감상한다는 건 미술과 관계를 맺는 일. 시간이 쌓이며 가까워지기도, 멀어지기도 하는 인간관계처럼 미술과 나의 관계도 변화한다.
코로나19로 편히 미술관을 갈 수 없는 요즘, 우리는 어떻게 미술과 관계를 맺고 이어갈 수 있을까. 『미술 경험치를 쌓는 중입니다』는 ‘비대면 시대’에 미술을 가까이하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다. 좋아하는 작가 SNS 팔로우하기, 미술 영화로 취향 찾기, 예술 책 모임 만들기, 나에게 맞는 미술책 고르기, 유튜브로 그림 감상하기 등 평범한 사람이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구체적인 팁을 제공한다. 미술 교사로 일하며 『그림은 마음에 남아』, 『그림의 눈빛』을 쓰고 그림이 주는 위로의 메시지를 전해온 김수정 저자는 삭막한 시대에 미술이 주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도록 일상에서 미술과의 접점을 만들어 보라고 권한다.
비대면 시대에 미술을 즐기는 방법을 소개한 책이에요. 전작보다 실용적인 면이 강한데요. 어떻게 쓰게 됐나요?
그동안 내 안에 들어온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면 이번에는 아름다움이 들어오는 통로를 소개하고 싶었어요. 교사로 일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미술을 소개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방법’을 말하게 되더라고요. 강연에서 그림을 만나는 방법이나 우리 주변에 있는 미술을 소개하면 반응이 좋기도 했고요.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통로’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 건가요?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해요.
많죠. 일단 저조차도 설명하기 어려웠어요. 단계별로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있잖아요. 이를테면 공학처럼요. 미술도 이렇게 단계별로 배울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걸 설명하기 어렵더라고요. 미술이라는 게 머리를 써야 하지만, 몸으로 하는 활동이기도 해서 체화해야 하거든요. 수학에서 ‘한 단계’를 넘어야 다음 단계를 갈 수 있는 것처럼, 미술도 그래요. 그래서 한 장을 끝까지 그려보는 것, 한 장을 깊이 있게 읽어 보는 일이 중요하죠.
‘프리다 칼로가 인스타그램을 한다면?’ 이라는 가정이 재미있었어요. 만약 과거의 예술가들이 살아 있다면 SNS를 활발히 할 것 같은 예술가는 누굴까요?
블로그를 활발히 할 것 같은 사람으로는 글을 많이 쓴 사람이 떠오르는데요. 블로그에 매일 글을 쓰는데 ‘전체 공개’가 아닌 ‘이웃 공개’로 소극적으로 하는 사람 있잖아요. 영국 화가 ‘그웬 존’이 그러지 않을까 싶어요. 로댕의 숨겨진 여자 중 하나인데 짝사랑하는 사람한테 편지를 수백 통 썼지만, 보내지 못하고 서랍에 넣어 놓은 사람이거든요. (웃음) 인스타그램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활발히 했을 것 같고요.
왜 초현실주의 작가들이에요?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치장을 많이 하거든요. 사진으로 실험을 많이 하기도 했고요. 한 명을 꼽자면 일명 '관종' 사진을 많이 남긴 ‘살바도르 달리’가 생각나요. 희한한 사진을 많이 남겼거든요. 요즘 말로 ‘인싸’에 ‘관종’이었어요.
재밌네요. 유튜브는요?
피카소가 영상을 하루에 2~3개씩 올리면서 아주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마티스와 피카소가 경쟁 구도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마티스보다는 피카소 방송이 더 인기 있을 것 같아요. 자연을 사랑했던 ‘훈데르트바서’는 산, 강, 호수를 찍어서 보여줄 것 같고요. <나는 자연인이다> 콘셉트로요.
평범한 사람에게 미술 감상의 벽은 유독 높게 느껴져요.
구체적인 대상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에요. 시험지와 유사한 구도죠. 그러다 보니 답을 찾아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답을 안 찾아도 된다는 것만 확인해도 충분해요. 느낌만 있으면 돼요.
미술은 ‘관람자의 몫’이 큰 예술이라고 했어요. 실제로 그림을 감상하는 시간은 저마다 다르잖아요. 그래서 왠지 짧게 감상하면 미술에 대한 나의 깊이 없음이 탄로 날 것 같은 부담을 느끼곤 했는데 음악과 비교해 설명해 주니 그 부담감이 이해되더라고요.
음악은 감상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얼마나 잘 감상하는지 비교적 티가 안 나요. 시간이 지나면 음악도 끝나니까요. 그런데 미술은 그렇지 않죠. 계속 내 앞에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렵게 느껴지고 해석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는 거예요. 이미지도 결국 정보이기 때문에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한데요. 저절로 생기지는 않고,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서 해석의 틀이 생기고 그림과의 접점이 만들어져요.
좋은 작품을 보고 감명받아도 왜 좋은지 설명하려면 어려울 때가 많아요. 내가 받은 감동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요?
상담 활동 중에 감정을 기록하는 훈련이 있어요. ‘감정 단어장’에 내 감정을 써보는 거예요. 이런 것처럼 명사, 형용사, 동사 상관없이 한 단어만 있으면 그게 나의 감상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른바 ‘원 포인트 그림 감상’인데요. 『원 포인트 감상』이라는 책도 있어요. 이 책의 서문을 보면 ‘난 딱 한 놈만 판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딱 하나만 보셔야 해요. 예를 들어 여러 색깔 중에 내 눈에 들어온 색이 겨자색이라면 이거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해요.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하나로 시작해도 좋고요.
꼭 감정일 필요도 없고요?
그럼요. ‘흔들린다’ 같은 움직임을 표현하는 말도 괜찮고, 명사도 좋아요. 그게 무엇이든 작품과 교류가 있으면 되는 거예요. 하나의 지점만 있으면 나와의 연결고리가 생기고, 거기서 출발하면 나중에는 또 다른 연결고리가 생겨요. 우리가 말을 배우고, 관계 맺기를 훈련하는 것과 똑같아요.
‘미술이 우리를 구원하는 순간’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9p)고요. 어떤 작품에서 처음 구원을 경험했나요? 첫 순간을 떠올린다면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동아갤러리에서 하는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전시회를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원화를 보고 거장의 터치를 실감했어요. 특히 일리야 레핀이 자기 아들을 그린 『유리 레핀의 초상』이 가슴에 박히더라고요.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같은 대표작보다 인상적이었어요. 그림 속 인물의 선명한 눈동자가 잊히지 않았고, ‘너는 앞으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될 거야’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고요.
사실적인 그림을 보면 ‘사진 같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데 이런 표현이 작가한테 어떻게 들릴지 궁금해요. 실례일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한테는 칭찬이에요. 제 그림을 보고 '사진인 줄 알았어'라고 하면 기분 좋더라고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도 좋아하신다고요. 왜 좋은가요?
일리야 레핀의 그림을 봤을 때와 비슷해요. 어느 순간 마음에 들어와 박힌 것 같아요. 대학교 실기실에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처음 봤는데요. 그림이 영롱하고 인물의 눈빛이 강렬해서 잊히지 않았어요.
역시 좋아하는 그림을 처음 본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시네요.
그렇죠. 그런데 처음에 좋았던 그림이라고 해서 끝까지 좋은 건 아니에요. 처음에 받았던 감동이 오래 계속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해요. 없어졌다가 다시 살아나기도 하고요.
어떤 경우에 처음에 받았던 감동이 사라지나요?
그림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것 같아요. 처음보다 더 많이 알게 되니까요. 예를 들어 제가 색보다는 형태를 더 잘 표현하는 사람이라 컬러리스트 화가들을 흠모하거든요. 그래서 강렬한 색이 특징인 고갱의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고갱이 아주 무책임한 사람이었고, 타히티에서 어린 원주민을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고갱의 그림이 더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더라고요.
아, 공감하는 분들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도 고갱의 그림을 보면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긴 했어요. ‘왜 그릇에 가슴을 얹어 놓지?’, ‘왜 저렇게 여자들을 벗기지?’ 싶어서 기분이 묘하게 나빴죠. 그런데 그때는 이유를 몰랐던 거예요. 미술을 깊이 공부하기 전이었으니까요. 이런 면에서 미술 감상은 결국 그림과 관계 맺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림과 관계 맺기’라는 표현이 참 좋네요.
처음에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멀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알면 알수록 좋아지는 사람이 있잖아요. 호불호와 관계없이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기도 하고요. 그림과 나의 관계도 그렇지 않나 싶어요.
작품과 사생활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지 않는 사람도 물론 있고요. 작가님은 후자에 가까운 편인가요?
그렇죠. 시대 상황과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상황을 고려할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 거슬리는 건 내가 다스려야 하니까 사생활로 인해 예술가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조금 거칠게 말하면, 좋은 작품은 얼마든지 많아요. (웃음)
가볍게 시작해서 깊이 있는 감상으로 옮겨갈 것을 권했는데요. 미술 감상에 깊이가 있다면 무엇으로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요?
미술 감상에 정해진 방법은 없어요. 제가 생각하는 감상법만 말씀드릴 수 있을 텐데요. 한 마디로 ‘곱씹음’ 아닐까 싶어요. 열정으로 시작해서 성심으로 이어지는 건데요. 연애와 비슷한 것 같아요. 처음에는 감정에 이끌려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장단점을 발견하고 함께 시간을 쌓아가면서 관계가 깊어지잖아요. 물론 멀어지기도 하고요.
저마다 감상법이 다르지만, ‘명작’으로 인정받는 그림이 있잖아요. 좋은 그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미술사적으로 의미 있는 그림과 나에게 의미 있는 그림은 달라요. 평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고, 특히 수상작은 심사위원 기준에 좋은 그림이기도 하고요. 영국 화가 ‘프레드릭 레이튼’의 그림 중에 <타오르는 6월>이라는 작품이 있는데요. 한때는 그 작품이 일명 쓰레기 취급을 받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재평가받으면서 아주 값비싼 그림이 됐죠.
‘좋은 그림’의 객관적 기준을 말하기 어렵다는 건가요?
개인적인 측면에서는요. 다만 제가 생각하는 좋은 그림은 ‘사고 싶은 그림’이에요. ‘좋다’, ‘나쁘다’는 욕망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돈을 주고 사서 독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그림이 본능적인 욕망을 깨운다고 생각해요. ‘좋은 그림’에 대해 그보다 더 정확한 사인은 없지 않나 싶고요. 그리고 다른 의미로 ‘첫 만남’ 이후에도 내 곁에 오래 남아있다면 좋은 그림이에요.
20년 가까이 미술 교육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요. ‘교육자’와 ‘작가’로서 미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것 같은데 어떤가요?
완전히 달라요. 첫 미술 시간에 아이들한테 하는 말이 있는데요. “내 수업의 목표는 너희들이 미술을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고, 이 시간을 지나서 성인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에요. 제 미술 수업을 듣고 아이들이 나중에 대학에 가면 미술 교양 강의를 선택해 듣고, 데이트하면 미술관에 한 번이라도 더 갔으면 좋겠어요.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보다 미술을 즐기는 게 중요하거든요.
작가로서는 어떤가요?
별을 보듯 미술을 봐요. 미술은 저한테 잡지 못한 별 같은 느낌인데요. 잡지 못하고, 담지 못해도 별을 한 번 보면 오래 기억에 남잖아요. 그 기억을 평생 가지고 살면서 같이 그 별을 보자고 말하는 게 작가로서 미술을 대하는 태도예요.
‘오마주’를 과거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존경하는 방식(150쪽)이라고 표현한 것이 좋았어요. 독자들에게 오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냐고 묻기도 했는데요. 작가님은 오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김환기 선생님의 파트너였던 예술 CEO김향안 여사요. 일명 ‘배운 여자’이셨는데 굴곡이 많은 인생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셨거든요. 삶을 주체적으로 끌고 나갔고요. 본인의 자원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만든 사람이라 인생 CEO라고 생각하고, 제 인생의 목표예요.
비대면 시대가 되면서 정보 격차가 더 심해질 거라는 우려가 있어요. 여러 이유로 정보 접근성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비대면으로 미술을 감상하고 싶어도 한계가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다른 방법이나 보완책이 있을까요?
‘한 책 깊이 감상하기’나 특정 그림과 내가 통할 때까지 관계 맺는 방식을 추천하고 싶어요. 인쇄된 작품을 보고 또 보는 거예요. 요즘에는 명화나 좋은 일러스트로 표지를 만드는 책도 많고, 굿즈도 많거든요. 이런 것들을 활용하셨으면 좋겠어요.
*김수정 퇴근 후에 그림 읽고 책 그리는 사람. 좋아하는 것을 늘 곁에 두고 자주 보려고 한다.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페르메이르의 눈빛이 영롱한 소녀가, 마우스패드에는 에곤 실레의 영민한 소년이 있으며, 웹브라우저의 홈 화면은 매일 새로운 그림을 보여주는 ‘위키아트’다. 존 싱어 사전트의 「카네이션, 릴리, 릴리, 로즈」가 담긴 휴대폰케이스를 늘 손에 쥐고, 조선 민화 「책가도」를 섬세히 수놓은 비단 가방을 고이 들고 다닌다. 현재 교육 현장에서 르네상스 인간형 미술교육에 힘쓰면서, 다수의 영재교육 기관에 출강하며 페인팅 이외에도 영재성과 창의성, 미술사 및 미술 감상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그림 같은 일상을 이야기한 미술 산문집 『그림은 마음에 남아』 『그림의 눈빛』 및 예술교육 교양서를 펴냈다. 경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문학창작집 및 수필 분야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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