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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의 더 페이보릿] 읽어내기를 유혹하는 영화 – 김초희 감독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만든 김초희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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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독해는 감독의 의도를 찾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해석에 반대한다’는 타투 앞에서도, 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을 계속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평가에겐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2020. 07. 01)

김초희 감독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격주 수요일마다,

지금 이 시대의 여성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손희정의 더 페이보릿'에서 펼칩니다.


“해석은 예술작품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잔인한 호전 행위로 보인다. 해석자는 예술작품을 그 내용으로 환원시키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길들인다. 해석은 예술을 다루기 쉽고 안락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팔에 타투가 있다. 김초희 감독(이하 김초희)도 그랬다. 내 타투를 본 그는 소매를 걷어 자신의 타투를 보여주었다. Against Interpretation(해석에 반대한다). 좋아하는 책 제목이라고 했다. 나는 A4 한 면 가득 적어온 <찬실이는 복도 많지>(2020)에 대한 온갖 해석과 그에 관련된 질문들을 떠올리곤,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 해석”이라 말하며 웃었다. 그렇게 “영화에 자신을 던진” 감독과 해석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는 비평가가 마주 앉았다.


(왼쪽부터) 강말금 배우와 김초희 감독

개인의 역사 속에서 등장한 독창적인 영화

김초희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찬실이는 복도 많지>(이하 <찬실이>)는 마흔에 직장을 잃은 영화 프로듀서(PD) 이찬실(강말금 분)에 대한 영화다. 영화는 찬실이가 함께 일하던 지감독이 술자리에서 급사하면서 시작된다. 오랫동안 지감독과 ‘예술영화’ 작업을 해 온 탓에, 그가 죽자 찬실이는 일이 끊겨버린다. 월세가 저렴한 산동네로 이사를 가고, 가사도우미로 일하면서 하루 하루를 버티는 찬실이. 장편 시나리오 작업 중인 남자 김영(배유람 분)을 만나면서 조금씩 활기를 되찾지만, 김초희의 말대로 삶이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물론 창작이고 허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상수 감독의 PD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그의 이력 덕분에 영화의 시작과 함께 죽어버리는 지감독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홍상수가 떠오른다. 그 장면에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고 고백하며 물었다. “지감독은 왜 죽였나?” 김초희의 답은 명쾌했다.

“이 영화는 실직한 찬실이가 다시 희망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어떻게 일이 끊겼냐는 영화의 전사(前史)인데, 그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설득력이 있어야 했다. 예술영화에서 PD가 일을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다. 같이 일하는 감독이 후지거나, 사라져버리거나. 내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영화를 만드는 건 물론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관객이 홍감독을 떠올릴까 아닐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고민했던 건 오히려 죽음을 희화화하는 것은 아닌지였다.”

죽음을 대상화할 수도 있다고 고민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감독의 죽음은 일종의 메타포로서, 과거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김초희의 ‘선언’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지감독이 죽는 순간은 두 번 반복된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한 번, 그리고 찬실이가 영을 만난 뒤 그에게 끌리면서 한 번. 이 두 번째 시퀀스는 좀 재미있다.

처음 만난 날 “왜 영화를 그만두었냐”고 영이 묻자, 찬실이는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자리를 황급히 피한다. 컷이 바뀌고 지감독이 죽던 날을 묘사하는 회상 장면이 이어진다. 질문에 대한 답인 셈이다. 그리고 다시 영과 길을 걷는 찬실이의 모습. 영은 찬실이를 쫓아오며 그의 집에 가서 옆에 누워 잠만 잘 것이라 말한다. 그 말을 듣고 영에게 안아달라고 말하는 찬실이. 하지만 이 장면은 찬실이의 꿈이었음이 곧 밝혀진다. 

<찬실이>는 홍상수 영화와 많이 다른 작품이지만, 이 꿈 장면만큼은 그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했던 남녀의 밀당을 떠올리게 한다. 김초희는 지감독의 죽음 뒤에 붙는 이 영화적 순간을 일장춘몽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홍상수 영화에 대한 비평을 시도했던 건 아닐까.

“그렇진 않다. 그보다는 ‘현실-회상-환상(꿈)-현실’로 이어지는 독특한 시간대가 홍감독의 영화적 시간대에서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역시 의식적으로 의도한 건 아니다. 홍감독 작품 PD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고, 그것을 부정한다면 나 자신에 대한 부정이 될 것이다.”


(왼쪽부터)윤여정 배우와 강말금 배우 

다정한 할머니의 아카이브

방황 끝에, 찬실이는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 김초희가 “절박한 마음”으로 <찬실이>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찬실이의 영화를 향한 사랑은 장국영(김영민 분)이라는 이상한 인물을 통해서 현현한다. 그는 찬실이네 주인집 할머니(윤여정 분)가 보존하고 있는 ‘죽은 딸의 방’에서 등장한다. 이 방은 1990년대 시네필의 영화 아카이브다. 아직 디지털이 대중적으로 도래하기 전, 영화가 필름이나 비디오, 카세트테이프, 잡지 등을 통해 신체를 입고 물성(物性)을 띠고 있던 시기의 자료들이 그 방에 한가득 쌓여 있다.

몸에 축적되어 있는 경험 속에서 언어를 넘어서는 지혜를 갖춘 여성으로서, 존재 자체가 삶의 아카이브와도 같은 할머니가 영화의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바로 그 때문에 장국영은 ‘찬실이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영화 그 자체로 읽히기도 했다. 할머니가 영화 아카이브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왜였을까. 김초희는 이렇게 답했다. 

“예산 때문이었다. 원래는 할머니의 집, 장국영의 집, 찬실이의 집이 다 다른 공간이었다. 제작비 때문에 로케이션을 줄여 한 공간에 넣어야 했다. 운이 좋아 독특한 구조의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의 독해는 감독의 의도를 찾는 데 번번이 실패했다. 하지만 ‘해석에 반대한다’는 타투 앞에서도, 나는 이 매혹적인 작품을 계속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평가에겐 그것이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촬영 현장에서 김초희 감독

돌보는 일 없이, 영화도 없다

코로나19의 상황 속에서 2만이 넘은 관객이 <찬실이>를 찾았다. “여자 프로듀서 이야기를 누가 보고 싶어하겠느냐”는 영화 관계자들의 편견과는 다른 결과였다. 김초희는 <찬실이>가 2020년에 개봉한 것이 “대운(大運)”이라고 했다. 프로듀서로 일할 때 만났던 관객과는 완전히 다른 관객들, 그러니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등장한 여성관객들이 극장을 찾았고, <찬실이>의 성공은 그 덕분이라는 것이다.

그 ‘다른’ 관객들이 눈여겨보았던 것 중 하나는 돌봄노동이 다뤄지는 방식이었다. 사실 ‘돌봄’은 김초희의 작품세계에서 꾸준히 관철되어 온 주제다. 

단편 <우리 순이>(2013)의 주인공은 순이(예지원 분)의 전기밥통이다. 밥통은 실연을 당하고 밥 한 끼 제대로 챙겨먹을 기운도 없는 삼십대 중반의 순이에게 밥을 먹이고 싶다. 영화의 끝, 순이는 기운을 차리고 밥통에 밥을 해서 친구와 피크닉을 간다. <산나물 처녀>(2016)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간다. 자신의 별에서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없었던 순심(윤여정 분)은 남자를 찾아 지구까지 내려온다. 그러나 지구라고 해서 좋은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순심은 지구에서 만난 ‘좋은 여자’ 달래(정유미 분)와 함께 산나물을 캐며 좋은 남자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관객을 염두에 둔 작품들은 아니었다. 남녀관계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해보고 싶었고,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찾아가고 싶었다.”

김초희에게 ‘인간의 본질’이란 어쩌면 ‘돌봄’일지도 모르겠다. 찬실이, 소피, 할머니, 그리고 영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돌본다. 그의 영화들은 이렇게 돌보는 마음을 이야기의 바탕에 깔고 있다.

한편으로 찬실이가 프로듀서로 해야만 했던 온갖 노동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예술영화’ 하는 작가랍시고 (남성) 감독이 예산을 비롯한 현실적인 조건들은 나 몰라라 할 때, 그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건 작은 예산 안에서 스태프를 꾸리고, 현장진행을 지휘하며, 감정노동까지 감당해야 했던 프로듀서였을 터다. 지감독의 영화에 투자했던 박대표(최화정 분)는 “지감독의 영화는 막말로 찬실이 같은 PD가 없어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그 관리노동 없이, 그러니까 돌보는 역할을 하는 사람 없이는, 영화도 없다.

수전 손택은 “우리의 임무는 작품 속에 있는 것 이상의 내용을 더 이상 짜내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든 ‘해석’이 이미,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가로지르는 김초희의 영화세계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께서는 어떤가.




해석에 반대한다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 저 | 이민아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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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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