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특집] 자신의 ‘감정 알기’에서부터 - 정용실 아나운서
<월간 채널예스> 2018년 7월호
감정의 진실을 보고 나니 문제 해결이 조금 쉬워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았다. (2018. 07. 05)
감정이 쌓이면 우리는 말이 하고 싶어진다. “할 말 있어.” 이 말은 우리가 가까운 이들에게 듣게 되는 가장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그동안 서운했던 일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예감. 감정의 홍수가 곧 덮칠 것만 같은 순간이다. 하지만 이렇게 억눌린 감정은 과연 진실한 걸까?
나는 방송에 흐르는 ‘논리’보다 그 아래로 흐르는 ‘감정’에 주목해왔다. 수년간 해온 주부 대상 토크 프로그램이나 명사 인터뷰 프로그램을 끝낸 후 남는 것은 방송 내용이 아니라 말 한 마디에 담긴 강력한 감정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정이란 참으로 묘하다. 내가 느낀 감정이면서도 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니 말이다. 자신의 감정만이라도 제대로 안다면, 우리는 즐겁게 제대로 소통할 수 있을 텐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남편이 친구나 지인들과의 술자리 때문에 자주 집에 늦게 들어오는 게 아닌가. 화가 났다. 이렇게 자유롭게 지낼 거면 결혼은 왜 했나 싶었다. 처음이니 일단 참자 싶었다. 너무 옹졸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서. 시간이 지나 감정이 가라앉나 싶었는데 다시 그가 늦게 오자 지난 감정이 되살아났다. 감정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물을 휘저으면 가라앉은 부유물이 떠오르듯 감정은 그렇게 잠시 내려가 있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남편이 또 늦는다면, 화는 차곡차곡 쌓여 어느 날 폭발하고 말 것이 뻔했다. 으르렁거리는 ‘감정이란 맹수’를 들여다보기가 두려웠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화'라는 감정 아래에 흐르는 내 깊은 정서, 진짜 감정을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화가 나는 거니? 무엇 때문에?’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편의 안전이 걱정돼서?, 남편이 누구랑 있는지 불안해서?, 나란 존재를 무시하는 것 같아서? 차분히 내 자신의 분노를 자극하는 진짜 원인에 대해 짚어보기 시작했다.
그의 안전에 대한 불안이라기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거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두 사람의 사랑이 동량이 아닐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확인 받으려는 행동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 무엇보다 내가 화를 내는 행위는 그에 대한 나의 진심을 가리고 도리어 오해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감정의 진실을 보고 나니 문제 해결이 조금은 쉬워졌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내가 방송국에서 일한다고 하니 자유직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하지만 팀장, 부장을 거치면서 이곳이야말로 녹록치 않은 직장임을 실감한다. 직장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도 감정을 알고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그동안 선후배들의 고민을 들어오면서 더욱 그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 내 관계란 긴 호흡으로 견디며 끌고 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와 함께 업무라는 중요한 변수가 작동하고 있기에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입사 3년차인 A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에겐 입사 동기 B가 있다. 둘은 협업을 하는 부서에 있다. 그렇다 보니 가끔 회의를 해야 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A가 맡아서 해 나가고 있기에 발표를 하고 토론을 이끌었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을 받을 때마다 입사 동기 B가 손을 들고 여러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을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니 A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넘어가선 안 되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기서 잠깐! 화가 나는 A의 감정을 면밀히 들여다보자. 단순히 허점이나 문제점을 지적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 조금 더 깊이 감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잘못된 소통을 피할 수 있다.
A는 왜 다른 의견이나 지적에 편안하게 넘어가지 못했을까? A 자신이 완벽주의나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를 받고 자라서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특별히 B의 지적이 거슬리는 이유가 있었는가? 다른 사람도 지적을 했건만. B가 늘 주목받고 관심받는 동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화가 났을까? (사실 입사 동기 B는 외모, 집안, 성격까지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B라서 더 화가 났다면, A의 B에 대한 그 감정은 단순히 질타에 대한 분노가 아니지 않을까. B에 대한 질투의 감정 내지는 A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끼는 감정일 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라면 A가 B에게 자신의 발표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해도 A의 감정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한 번의 통쾌한 감정은 들 수도 들겠지만 B와의 불편함은 마음속 깊이 잠복되어 있다 불시에 크게 터질 수밖에 없다. A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마주해봐야 한다. 자신의 질투심, 질투의 감정을 마주해야 한다. 감정은 우리에게 주는 하나의 신호다.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더 이상 상대를 질투하거나 미워하는 데 에너지를 소모하지 말고, 내 자신을 더 사랑하고 더 아름답게 가꾸라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감정 읽기요, 여기서 진실한 말하기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상대에게, 내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얘기를 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소통으로 가는 길이다.
공감의 언어정용실 저 | 한겨레출판
언어가 점점 차가운 설득의 도구나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한 논쟁의 수단으로 치달아가는 현상을 지적하며, 상처와 아픔, 눈물이라는 ‘공감’을 통해 더 깊은 소통과 관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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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언어』는 아나운서 정용실이 오랜 방송 경험과 커뮤니케이션 이론을 바탕으로 공감을 이끌어내는 깊은 대화와 진정한 소통, 그리고 관계에 대해 써내려간 자기계발 에세이다. 언어가 점점 차가운 설득의 도구나 주도권을 가져가기 위한 논쟁의 수단으로 치달아가는 현상을 지적하며, 상처와 아픔, 눈물이라는 ‘공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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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로 진심을 전해야 할지 몰라머뭇거리는 당신에게공감을 이끌어내는 대화, 태도, 듣기, 진정한 소통에 관하여‘공감empathy’은 공명(共鳴)하는 것이다. 함께 울리는 것이다. 같은 톤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루키의 글처럼 상처는 상처로, 아픔은 아픔으로, 나약함은 나약함으로 말이다. 이는 상처를 얘기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