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연의 트위터처럼 시 읽기] 강은교 「사랑법」
『풀잎』
사실, 사랑은 침묵하기 힘들다. 사랑이 떠나가는 걸, 사랑이 잠드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갈등이 벌어진다.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 ‘사랑법’ 中 69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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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고 버스 정류장 근처 서점에 들어갔었다. 스물 한 살이었고,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있었다. 『풀잎』이라는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월트 휘트먼 시집인가? 아니네. 우리나라 여자 시인이네.”
무심결에 시집을 집어들었고 몇 편의 시를 읽었다. 그 중 ‘사랑법’이라는 시가 있었다.
“뭐야. 사랑하는 데 무슨 법이 있어.”
의구심으로 가득찬 눈으로 시를 읽었고 나는 서점 매대 앞에 얼어붙었다. 강렬했다. 침묵하는 것이 사랑법이라니...꽃과 하늘과 무덤에 대해 침묵하라는 계시 앞에서 난 얼어붙었다. 바로 시집을 샀고, 버스에 올라타서 읽기 시작했다.
사실, 사랑은 침묵하기 힘들다. 사랑이 떠나가는 걸, 사랑이 잠드는 걸. 어떻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갈등이 벌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다시 생각해보자. 사랑은 ‘상대’라는 존재를 오롯이 인정하는 것이다. 그가 떠나든 말든, 잠들 든 말든 상대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법칙일지도 모른다.
시집에는 ‘자전(自轉)1’이라는 비장한 제목의 시가 첫 장에 있었다.
“일평생이 낙과처럼 흔들린다 /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 광야에 쌓이는 / 아, 아름다운 모래의 여자들 // 부서지면서 우리는 /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직관적으로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 ‘허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의 시에는 ‘생(生)’을 수긍하는 허무가 짙게 깔려 있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윤회’ 같은 것이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것은 다시 돌아온다는 그래서 서둘지 말고 침묵해야 한다는 강은교식 허무는 매우 중독성이 있었다. 시집에 담긴 절제된 허무는 놀랍도록 아름답고 눈부셨다. 깊숙하게 가라앉은 잠언들 틈에서 시집은 반짝이고 있었다.
시집에는 ‘우리가 물이 되어’라는 윤회적인 시도 있었다.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 저 불 지난 뒤에 / 흐르는 물로 만나자 //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 올 때는 인적 그친 /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랑을 있는 그대로 내려놓을 수 있을까. 내게 사랑은 불에 타버릴 것처럼 절절한데. 청춘의 나는 머리를 쥐어 뜯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알게 되었다. 불같은 날들이 지나고 나서야 사랑은 어른의 모습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그해 여름 나는 이 시집을 읽으며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풀잎 강은교 저 | 민음사
강은교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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