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가 전하는 학교에 관한 진실
『학교라는 괴물』 권재원
모두들 '위기의 학교'라 한다. 학교폭력, 왕따, 성적비관 자살과 사교육 문제까지 학교를 말하면서 읊을 수 있는 문제에는 끝이 없어 보인다. 20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쳐 온 현직 교사가 들려주는 학교는 과연 진짜 '정글'일까.
학교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 탓일까. 누구나 학교 문제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든다. 쉽게 '학교가 문제'라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문제고, 왜 그런 문제가 발생했으며,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해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문제를 문제라고 말하기는 쉽지만 문제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것은 어렵다. 주지하건대 교육은 우리 모두의 문제다. 나의 문제기도 했었고, 내 자식의 문제기도 하며, 우리 모두가 만나게 될 사람들에 관한 문제다. 팔짱 끼고 앉아 혀 차면서 학교를 탓하기 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교에 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시민으로서의 책무가 아닐까.
20년째 현직 교사로 학교에 몸담고 있는 저자 권재원은 '이제 진짜 교육을 할 때라'고 말한다. 지금 같은 형태의 학교가 꼭 필요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 남은 것은 무기력함과 불안함이다. 교권은 무너졌고, 교사 스스로도 진짜 교육에 대해 고민하기를 멈춘 듯 보인다. 아이들은 체벌이 사라진 학교에서 시키는 과제 대신 아직 체벌이 있는 학원 과제를 우선순위에 둔다. 어디 과제뿐일까.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은 이미 학원에서 배운 것들이다. 중요하지 않은 과목(이 어디 있겠느냐만)의 수업 시간에 다른 공부를 한다고 나무라면 더 크게 반발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이렇게 만든 것은 어른들이고 사회다.
지난 2월 26일 송파도서관에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현직 교사가 들려주는 교육의 위기와 학교가 가야할 방향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미래는 있다.
교육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학교가 위기에 처했다는 말은 더 이상 새롭지 않다. 현직 교사이자 꾸준히 교육 문제에 관한 칼럼을 써온 저자 권재원은 학교 넘어 진정한 교육의 목적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했다.
"교육이 불가능한 게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교육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불가능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늘 있었어요.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행동에는 노동보다 교육이 먼저 있다고 봐요. 교육이 없었다면 노동도 없었을 거예요."
우리가 그간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무엇인가. 학교? 근대식 학교가 모습을 갖춘 건 길어야 150년이 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에서의 교육은 불과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학교란 특정 시대에 특정 역할에 맞춰 있던 것이지 교육의 원형도 아니고, 본질과도 거리가 먼 것입니다. 특정한 목적과 시대가 바뀌면 그나마 갖고 있었던 장점은 사라지고 인간의 본성과 어긋나는 약점만 두드러지죠. 바로 그것이 요즘 우리가 얘기하는 '교육의 위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대에 더 이상 맞지 않게 된 '학교라는 괴물'. 저자는 대치동 풍경을 사진으로 보여주며 우리가 사는 이 시대 학교의 현주소를 말했다. 대치동은 의외로 물가가 싸다. 화려한 건물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 수준이 부자가 그렇게 많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거든요. 강남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외제차, 저의 월급에 육박하는 가방, 그리고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다 감당하고도 일상생활을 잘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부자가 몇 십만 명 씩 모여살 수 있는 그런 부자나라가 아니란 말이죠. 전부 교육에다 쏟고 힘들게 사는 거죠. 저는 그걸 '백조발'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화려하고 도도한 모습 아래 숨겨진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백조의 발과 같은 모습이라는 의미였다. 그렇게 쏟아 부은 결과가 무엇인가. 오후가 되면 편의점 구석에 서서 허겁지겁 컵라면을 먹는 이른바 '강남형 영양결핍' 아이들이다. 더불어 대치동 학원가에는 각종 클리닉이 성황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연약해진 아이들이 이 교육의 결과다. 어디서부터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이들이 어른이 된 사회 역시, 두렵기는 마찬가지일 터.
아이들이 사교육을 받는 이유가 '부족한 부분을 배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지 모르겠다. 현실을 모르는 안이한 생각이다.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위해 학원에 다닌다. 모두가 달려가니 그들을 이기려면 더 빨리 뛰는 수밖에 없다.
"요즘은 고등학생들이 칸트 원전을 읽어요. 이렇게 고생하면서 공부하는데 예전에 비해 얻는 과실은 훨씬 적죠."
명문대 졸업장만 쥐고 나오면 안정적으로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는 끝났다. 많은 대학생들이 스펙 전쟁을 치르고 온갖 입사 전형을 거친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비정규직 또는 수습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이런 마당에 과거처럼 학교 교육을 하는 것이 과연 유효한가? 우리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학교는 무력하다.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가 되었지만 여전히 학교는 기존의 목적과 세상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모양새다. 많은 학부모들이 자녀의 성적에, 미래에 불안감을 갖는 이유는 이런 사회에 대해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여 자녀가 자칫 잘못해서 경쟁에서 밀려나기 십상이라는 불안 때문이다. 더구나 그 불안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아이들이 잘 알고 있다. 저자가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은 실제로 너무나 불안하다. 생활기록부 한 줄에 난리를 친다. 입시에 도움이 되는 활동에 목숨을 건다. 하지만 그들을 탓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대체 왜 가르치는가?'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인간에게는 왜 교육이 필요할까? '왜 가르칠까?'
"사람은 납득할 만한 목적이 없을 때 의미를 갖지 못해요. 의미를 갖지 못하는데 열심히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불행해지는 거죠. 군대 용어로 '삽질'을 하는 건데요. 우리 사회 곳곳에 삽질이 있어요. 회사도 삽질 많아요. 학교도 삽질 많죠. 그중 가장 삽질을 많이 하는 게 아이들이죠. 무엇을 위해서 공부하는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채로 계속해서 많은 걸 시키고 있어요. 아이들이 병들 수밖에 없죠."
교육이라는 것은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함이다. 개인은 성장, 발달하고 사회는 그 덕분에 존속,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개인의 성장이란 얼마나 많은 걸 익혔느냐가 아니라 앞으로 얼마나 새로운 지식을 익힐 태세가 되어 있느냐다. 결과가 아니라 가능성이란 뜻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해를 잘 하실 텐데요. 운전면허 시험을 위해 학원에 가면 자동차 원리나 작동법을 자세히 알려주는 게 아니죠. 왼쪽 사이드미러에 안전제일이란 간판이 보이면 그쯤에서 서세요, 거기에서 간판이 사라질 때까지 왼쪽으로 다 돌린 다음에 가다가 잔디 밟지 말라는 표지판 나오는 곳에서 멈추세요, 그 다음에 일자로 돌려서 천천히 가세요, 하는 식이잖아요. 그게 귀신 같이 맞아요. 뭐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점수는 다 따요. 그 상태에서 면허를 따고 차 끌고 나가면 어떻게 될까요? 사망이죠."
지금 교육은 이와 같다. 내용은 가르치지 않는다. 시험 잘 보는 방법을 알려줄 뿐이다. 문제 유형을 외운다. 이렇게 공부한 아이들이 사회에 나왔을 때? 아찔하다. 사회의 존속, 유지를 기대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미국에서는 문제를 예측하는 시도 자체를 비겁하게 본대요. 심지어 캐나다 어느 주에서는 문제 유형을 알아보기 위해서 문제 은행을 뒤지면 고사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수능은 어떤가? 심지어 EBS와 똑같은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문제 유형을 익히고 답을 '찍는' 방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인기 스타 강사, 훌륭한 선생이다. 문제 유형을 잘 외워서 우직하게 공부한 '우수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에 진출했을 때 겪는 황당한 일들은? 상상할 수 없이 많다.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학교
학교를 비판하는 것이 진보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탈학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이때에 '학교는 원래 진보적인 것이었다'는 저자의 말은 좀 의아하다.
"150년 전만 해도 학교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일이었어요. 1,800년대에 어떤 사람이 나폴레옹을 만나러 가서 학교를 만들 것을 제안했더니 나폴레옹이 답했어요. '그러니까 애들을 데려다 군인으로도 안 만들고, 무기 기술자로도 안 만드는 그런 것을 왜 세우는데?'라고 말하고 쫓아냈죠. 그 쫓겨난 분이 페스탈로치예요."
교육이 특정한 계층만을 위한 것이었던 세상에서 보통 교육을 목적으로 학교를 세운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변화였다. 대부호의 자식이나 빈곤층의 자식이나 모두 받을 수 있는 의무교육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자. 기실 굉장히 진보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학교다.
이와 같은 형태의 학교는 근대의 산물이다. 체계적, 합리적이며 예측 가능해야 하는 근대의 정신에 학교는 가장 적합한 형태였다.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은 내용을 배운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 대규모 산업 현장에 투입되어 각자 부속품 역할을 했다.
"그 순간에는 필요했던 거예요. 산업혁명 터지고 공장은 대규모가 되는데, 부지런히 가르쳐서 적어도 기계 매뉴얼을 읽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 교육은 받아야 했죠. 글을 몰라서 기계 매뉴얼대로 일을 못하면 안 되잖아요. 체계적으로 순서가 잡힌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공장처럼, 군대처럼 가르쳐야 했어요. 학교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했던 거죠. 심지어 예술 교육에도 이러한 방법론이 도입됐어요. 반복적인 동작만 시키죠. 이런 방식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피아노를 칠 수 있었을까요."
매뉴얼대로 하는 능력이 중요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걸 암기하고 그대로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은 얼마 전까지도 꼭 필요한 능력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한다. 펀드매니저 대신 컴퓨터가 빅데이터를 수집하여 얻은 결과로 투자하는 사례도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기업은 이러한 사실을 일찍 알았다. 전에는 학벌만 봐도 업무수행능력을 가늠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컴퓨터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게 무엇을 시킬지 생각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상황에 과거 방식을 고수하는 학교는 이제 시대의 낯선 존재, 즉 괴물이 되어 버렸다.
"아이들은 다 알아요. 자기 입장에서 쓸데없는 것들을 학교에서 하라고 하는데 그것을 고맙다고 따라갈 아이는 별로 없죠. 학교가 열심히 하면 할수록 아이들에게는 의미 없는 것을 하라고 하는 꼴이니 강압이 되고 충돌이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학교가 억압의 도구로 전락한 지금, 다시 학교를 생각해야 할 때다. 학교는 원인이 아니라 무언가의 결과일 테니 말이다.
앎은 함과 구별되지 않는다.
바뀐 세상에서 교육은 어디로 가야 할까. 다시 진짜 교육을 할 때다.
"이성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요. 일상을 생각해 보세요. 문제를 인식하는 건 이성이 아니라 예술적 생각이죠.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것은 감각이에요. 문제에 대안을 만들 때 다시 이성이 나와요. 이성과 감성이 상호작용 하면서 대안을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굉장한 앎에 도달해요. 우리가 아는 것들은 다 그렇게 해서 얻은 거예요."
그간 학교에서 배제되었던 교육, 이른바 '감성적 앎'이 다시 중요하다. 공동체 안에서 다른 것을 배우며 성장해야 한다. 머리뿐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공부하고, 혼자 남들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서 공부해야 진짜 교육이 된다. 특목고, 자사고, 자율형 사립고처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을 따로 모아 하는 교육은 효과가 없음이 증명됐다.
"10년간의 방대한 자료를 분석한 결과 교육자원의 평등한 분배와 할당이 학생들의 성취도에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여러 계층에게 교육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 만큼 학업성취도가 올라갔다." (168쪽)
"비슷한 수준끼리 모여 있으면 그것은 집단이 아니죠. 개인이죠. 집단이라고 느끼려면 차이가 있어야 해요. 이질집단으로 편성된 학급의 경우에 학습효과가 더욱 높다는 거죠. 저는 그래서 요즘 교직사회가 불안해져요. 갈수록 동질집단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러면 선생님들도 배우지 않아요. 배움과 가르침은 하나예요.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려고 하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공부를 안 하기 때문이에요. 독서를 하지 않으면서 독서 교육을 어떻게 해요?"
학교를 배우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학교는 배움이라고 하는 것에서 너무 멀리 위치해있었다. 아직도 머리만 쓰고 있다.
"책상 의자가 근대적 도구예요. 얼마나 잔인한 도구인지 몰라요. 이게 형틀이에요. 공부는 머리가 하는 거니까 다른 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죠. 저는 수업할 때 책상, 의자를 밀어버리고 수업하기도 해요. '죽은 시인의 사회' 선생님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선구적이죠. 아이들을 일으켜 세웠잖아요. 시를 읽으면서 망망대해를 떠올려야 하는데 책상에 앉아 있으면 안 되잖아요. 바다를 느끼기 위해 책상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 '신체'입니다. 앉아있는 학교가 학교의 원형이 아니에요.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공자의 학당 모두 앉아서 수업하지 않았어요. 걸으면서 교육했죠. 독일의 인문계 고등학교를 김나지움이라고 하죠? 체육관과 어원이 똑같아요. 짐(GYM)이라고 하잖아요. 기본적으로 음악과 체육을 하면서 다른 것들을 가르쳤어요."
지식을 변형시키고, 사물과 상호작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교육의 목표는 그것이 되어야 한다. 결국 교육 당사자(학생)의 주인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 스스로의 인생을 자신이 설계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앎은 곧 함이기 때문이다.
"배움은 계획에 따라 정해진 학습량을 달성해 나가는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다. 배움은 삶을 공유하는 것이며, 경험을 확장하는 것이다. 훌륭한 교사란 자신이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공유와 경험의 확장 과정에 함께 동참하여 학생과 더불어 성장해 나가는 존재다. 이것은 태도의 문제이지 기능과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19쪽)
학교라는 괴물 : 다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권재원 저 | 북멘토
교육칼럼니스트이자 현직교사인 권재원의 교육에세이집 『학교라는 괴물』이 출간되었다. 대한민국 교육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비판하는 것을 넘어 그 해법과 대안 제시까지 저자 특유의 날카롭고 분석적이면서 유려한 글은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불편한 공감을 이끌어 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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