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숭고에 대하여
이날 진중권 작가는 개정판을 다시 내게 된 과정부터 이야기부터 꺼냈다. 10여 년 전 처음 이 내용을 책으로 묶기 전, 잡지에 연재했었다. 2003년, 이것을 묶어 책을 냈으나 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 절판이 됐다. 그렇게 잊혔던 책이 부활한 것은 출판사(아트북스)의 요청이었다. 그렇다고 요청을 받고 즉각 개정판을 내진 못했다. 몇 년을 묵힌 끝에 최근 개정판이 나왔다. 죽었다고 생각한 자식을 다시 살아서 만난 작가의 기분은 어땠을까?
“어젯밤에 쓴 편지를 오늘 아침에 다시 보면 그렇잖나. 개정판을 다시 보니 손발이 오글오글하더라. 1판 서문에서도 이미 그 말을 하고 있더라. 시간이 지날수록 옛글을 보면 민망해지는 부분이 있으나 다시 읽어도 썩 나쁘진 않더라.”
"13년 전에 쓴 자기의 글을 다시 읽는 것은, 마치 밤에 쓴 글을 낮에 읽는 것만큼이나 민망한 일이다. 감상적 어조로 쓴 부분은 특히 그러하다. 그 글을 쓰던 청년의 몸속에 지금은 중년의 사내가 들어앉아 있다. 옛글을 다시 읽는 민망함보다 강렬한 것은 그리움이다.”(p.11)
처음 이와 관련한 글을 썼던 것은 1999년이었다. 연재를 시작했던 시기다. 미학이나 철학은 시대마다 패러다임이 달라지는데, 진 작가는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미학사를 다시 썼다. 세계관이 바뀌면 역사는 덧붙이는 게 아니라 다시 써야하기 때문이다. 덧붙여서 끝날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각과 세계관에 따른 기존의 역사를 다시 해석하고 읽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그동안 미학사에서 간과됐던 롱기누스의 ‘숭고’, 데카르트 정념론 등을 재해석하고 역점을 뒀다. 따라서 책을 읽으면 숭고에 대한 느낌이 많다고 느낄 거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현대에 와서 달라지지만 고대부터 예술은 아름다움 자체가 원형이었다. 현대로 들어오면 완전히 달라진다. 현대 예술은 아름답지 않다. 예술의 원리가 달라진 거지. 19세기 전반까지 아름다움과 정서적 쾌감, 감동 등이 고전 예술이었다면 20세기 예술은 기존의 시각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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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불가능의 시도, 즉 가상을 새로운 현실로 만들려는 가당찮은 시도다.… 예술은 가상의 창조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준다. 그로써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삶의 태도를 바꾸어 놓는다. 이게 새로운 사회적 현실의 창조로 이어지면, 이때 예술적 가상은 정말 현실이 된다.”(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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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낯선 것을 보면 ‘나쁘다’고 얘기하는 것이 공식적인 경향이었다면, 20세기는 아름다움 대신 새로움을 추구했다. 즉, 남들과 다르게 보는 것. 옛날에는 모방 자체가 당연한 것이었다면, 현대는 그렇지 않았다. 현대 예술은 사람들에게 처음엔 거부감을 주다가도 나중에 쾌감으로 바뀌는 경험을 가능하게 했다. 정서적 쾌감이 아닌 정신적인 열락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진 작가는 이것이 숭고체험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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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 이후 근대미학은 미와 함께 숭고를 주요한 미적 범주로 다루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그 후 숭고에 관한 논의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리오타르의 에세이 「숭고와 아방가르드」를 통해, 숭고는 후반 현대예술을 특징짓는 주요한 미적 범주로 부활한다.”(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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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숭고는 엄청나게 큰 것이었다. 현대 예술은 미를 확장시켰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하나, 그런 차원보다 현대 예술은 숭고로 설명하는 게 더 어울린다. 모더니즘 예술을 그래서 숭고라고 말한다. 고전적인 미학사에서 숭고는 배제됐다. 그것을 다시 끄집어낸 게 현대 예술이다. 책은 숭고의 역사를 재정리한 것이다. 미보다 숭고의 관점에서 훑은 것이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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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은 숭고의 미학이다. 숭고는 미와 다르다.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 우리는 대상의 조화로움을 조용히 관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근대 미학에서 내세우는 예술 수용의 모델이기도 하다.… 숭고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폭풍우를 일으킨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파토스를 불러일으키고 격렬한 감정의 운동을 야기한다.”(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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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 철학의 흐름에 대하여
진 작가는 탈근대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푸코, 데리다, 들뢰즈, 보드리야르 등을 대표적인 철학자로 소개했다. 그에 의하면, 모더니즘은 진보적인 사상인 한편으로 실천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정치의 소멸, 사회적인 것의 소멸 등을 말하기에 급진적이나 현상을 긍정한다는 면에서 보수적이라는 것.
“탈근대 철학은 독선, 아집 등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은 좋은데, 그 다음으로 뭘 내세웠는지 보면, 없다. 우리는 80년대까지 폭력적으로 교육을 받았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났다고 말할 정도로, 민족과 개인, 국가와 개인을 동일시했다. 그런 것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주체 형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탈근대는 이론만 급진적이고 실천에선 보수적이다. 문제는 대안이 무엇인가에 있다.”
그래서 그가 주목한 것은 미셸 푸코의 ‘자아의 테크놀로지’였다.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형성하는, 자기의 테크놀로지. 그러나 푸코는 주체라는 말을 싫어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포섭되고 종속돼 있는데,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것, 그게 주체라고 본 것이 푸코였다. 폭력적인 방식이 아닌 덜 폭력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구축하는 방법을 푸코는 찾았다는 것. 그는 실존의 이야기 측면을 강조하면서 이 책을 썼다.
진 작가가 주목한 또 한 가지는 탈근대의 생태 미학적 측면이었다.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서 이상한 점이 있는데 그것이 생태 미학과 관련돼 있다는 것. 그는 헤겔을 다시 읽었다. 헤겔의 미학은 근대를 자연지배 이데올로기, 자연정복 이데올로기의 최고봉으로 해석했다. 헤겔은 그것을 통해 근대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유럽에는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이 있다. 헤겔은 자연에 결함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예술을 한다고 봤다. 그게 고전주의적 미학의 핵심이다. 프랑스식 정원은 자연에 대한 인공의 우위, 영국식 정원은 인공에 대한 자연의 우위를 드러낸다. 고전주의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고, 낭만주의는 자연이 인간을 압도한다. 고전주의에 의하면 예술가는 달인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라 배우고 익히면 가능하다. 이에 반해 칸트에 따르면 예술가는 천재다. 천재는 배울 수가 없다. 천재는 자연의 총아이며 천재가 하는 것은 설명이 안 된다. 천재가 만든 예술작품은 그래서 자연처럼 느낀다. 지금은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 것을 지나 파괴하고 있다.”
그는 미학에 있어 한국과 일본의 차이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일본의 정원은 한국과 달리 완벽한 인공미를 지닌다. 자연을 재현한 인공미. 반면 그에 의하면, 한국의 정원은 ‘미메시스’다. 즉, 자연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자연 되기’다. 한국과 일본의 정원은 다르다. 한국은 일본처럼 할 의사가 없었다. 인공미보다 자연미를 택했다. 그래서 한국의 과거 사람들은 인공과 만나면 자연에 먼저 양보하고, 자연에 적응하고 수긍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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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그리스어에서 ‘미메시스’란 존재하는 대상의 ‘모방’을 넘어, 일체의 ‘감각적 대상화’, 즉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했다.… 그것은 현실에 없는 새로운 존재의 ‘감각적 대상화’였다. 이런 게 미메시스였다. 하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미메시스’를 라틴어 번역어인 ‘이미타티오’로 해석했다. 그 결과 미메시스는 대상의 복사로 의미가 축소되고 만다.”(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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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A
광고를 전공하고 있다. 두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는 우리 사회에선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사회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을 통해 해결했었는데, 최근엔 미학적ㆍ문학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는데 결론은 논의가 안 된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미학적 접근 등으로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둘째, 광고는 경제와 결합하는데, 미학과 광고를 결합하는 것이 가능할까?
인문학이 현실에서의 솔루션을 제시하진 못한다. 문제를 제기할 순 있어도. 21세기 산업은 판타지를 제공한다. 그래서 콘텐츠를 어떻게 채울 것이냐가 중요해졌는데, 콘텐츠 학과? 그게 뭐하는 곳인지는 사실 모르겠다. 문사철(문학ㆍ역사ㆍ철학) 외에 또 다른 콘텐츠는 없다고 본다. 응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대학에서 해줄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
일본과 우리나라를 비교했을 때 일본은 서사의 힘이 있다. 스토리텔링의 힘이 엄청 나다. 한편으로 과장도 세다. 그런데 우리는 서사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드라마를 봐도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유행이고, 출생의 비밀, 기억상실증 등이 얼마나 넘쳐나나. 우리는 일본만큼 디테일에 강하지 못한 것 같다. 일본 만화를 보면 문학적인 서사의 힘이 느껴진다. 그게 인문학의 힘이고, 인문학은 질문을 제기하면서 문제를 다시 보게 해 준다.
광고와 미학은 얼마든지 연계 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한 것도 오래됐다. 카피를 보라. 얼마나 시적인가. 찌라시를 보면 예술이 많이 들어왔다. 앤디 워홀의 팝 아트를 보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만화가, 삽화가, 광고전단 만드는 사람을 보면 광고와 미학은 이미 연결돼 있다. 다만 너무 아방가르드해서는 안 된다. 대중적이어야 하니까. 대중들이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 질문한 분은 스스로 광고와 미학을 연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도 광고에서 영감을 받기도 하고.
한국에서 지금 인문학적 트렌드가 미학으로 넘어가는 것이 가능할까? 또 진 작가는 대학에서 미학을 전공했고, 지금까지 이어진 것 같은데, 미학 전공은 본인의 의사였는지 궁금하다.
맑스의 예언이 맞는 것 같다. 이렇게 말했다. “미학이 미래의 윤리학이 될 것이다.” 더 나아가면 미학이 미래의 경제학이 될 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스마트 폰을 둘러싼) 삼성과 애플 싸움을 보면 패러다임 2개가 싸우고 있다. 애플은 디자인(예술), 삼성은 기술이다. 미래는 기술과 예술의 결합이라고 본다. 기술과 예술이 결합할 수밖에 없으니, 애플과 삼성은 싸우다가 화해할 것 같다.
점점 더 (예술과 기술이 결합되는) 그런 경향이 심해질 것이다. 예술이 기술을 이끈 경우도 이미 나오고 있다. 10여년 전, 아이리버 디자인을 하고 기술진이 모든 기능이 안 들어가니 디자인을 수정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경영진이 안 된다고 디자인에 맞추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과거에는 기술이 우위였는데, 디자인이 기술을 넘어서는 움직임이 이미 10여년 전에 있었고, 점점 더 심화될 것이다. 경제가 예술로 점점 다가가는 경향이 있다.
미학, 나는 사실 생각지도 못했다. 별 생각 없이 정했는데, 미학과 수석을 했다. (일동 탄성) 그런데 학점이 2.49였다(웃음). 당시 미학은 철학 계열이었는데, 절반이 철학과를 갔다. 위에서부터 2.5까지가 철학과로 갔다. 2.2 이하가 종교학과로 가고. 1명 예외가 있었다. 철학과로 갈 수 있었는데, 종교학과를 갔다. 그래서 내가 미학과 수석을 한 거다. 가니 선배가 없었다. 남들 안 하는 걸 하면 좋다(웃음).
미학적 관점에서 윤리학이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가능성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복잡한 논의다. 고대에서 미학과 윤리학은 결합돼 있었다. ‘무엇이 선한 삶인가’를 놓고 봤을 때, 지금 우리는 선하다고 하면 착하다는 것과 좋다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는 그것이 결합된 형태였다. 칸트가 그것을 나눴다. 착하다가 윤리의 영역이고, 좋다는 것을 실용성의 영역으로 뒀다. 푸코가 이것을 다시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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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구애 대상은 바로 이 칼로카가티아, 즉 선미(善美)였다. 이는 또한 그리스인들 삶의 이상이었고, 에로스는 그들을 이 이상으로 이끌어주는 생의 추동력이었다. 따라서 에로스라는 아이는 아름다운 삶을 통해 불멸에 오르려는 그리스인들의 욕망을 의인화한 것이었다.”(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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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루스 노부스 진중권 저 | 아트북스
2003년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후 많은 독자들이 복간을 바라왔던 『앙겔루스 노부스』 가 도판을 보강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재발간되었다. 미학에 관한 ‘에세이’로서, 진중권 특유의 재기 넘치는 문체로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미학사를 탈근대의 관점에서 재검토하며, 그 과정에서 근대미학이 간과했던 해석의 지평을 열어, 미학이 단지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살아나가는 태도이자 방법이 될 수 있는 존재미학으로 나아가는 바탕을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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