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은 대통령이 안 되면 좋겠다” :『지금 여기의 진보』 홍세화 · 심보선
‘홍세화 · 심보선과의 만남-다시, 진보정치는 가능할 것인가’
“정의에 대한 정의, 어려운데, 인간다움을 지키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권력이나 금력에는 힘 력(力)자가 있는데 정의에는 힘 력(力)이 없다. 단선적이지 않지만, 역사의 방향 자체가 힘없는 정의가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평함과 인간다움, 이런 것이 확장돼 가려면 정의가 힘을 얻어가야 하지 않을까.”
샹송을 불러주는 당 대표라니, 근사하지 않은가. 물론 오해 마시라. 샹송에 방점을 찍지 말 것. 그것은 열띤 대담의 끝물, 초가을 밤을 무르익게 만든 선율이었다. 그것, 얼마간 낭만이었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짜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홍세화 진보신당 창당준비위원회 상임대표가 샹송을 부르던 초가을밤, 생각의 좌표도 촘촘히 아로새겨졌다. 샹송은 그러니까, <매트릭스>에서 ‘레알’ 현실을 깨닫게 하는, 매트릭스에서 탈출하게 만드는 빨간약과 같은 것.
생각해보라. 지금-여기, ‘현실’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맥락을. ‘넌 현실을 몰라’, 이 말로 모든 것, 종결된다. 매트릭스에 갇힌 우리, 진짜 현실을 외면한 채 파란약을 꿀꺽 삼켰다. 그것이 현실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도 없다. 화폐가 모든 가치를 집어삼킨 때문이다. 화폐를 통하지 않는 어떤 생각ㆍ상상도 멈췄다. 그러니, 현실이라는 말은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지극히 억압적인 말이 됐다. 종결자. 현실이라는 언어의 맥락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이유, 『지금 여기의 진보』(홍세화 외 지음|이음 펴냄)는 말하고 있다.
홍 대표는 아웃사이더 척탄병으로 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진보신당 창당준비위 대표이고 사회연대 후보에 몸 던질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언론인에서 짧은 시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년이 어떤 시기였나?
나도 정리가 안 된다. (웃음) 올해로 귀국 10년이 됐다. 한겨레 기획위원, 르몽드 편집위원으로 진보신당 평당원이었는데, 당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진보신당이 소멸되는 것 아닌가 하는 위기의식이 있어서 결단을 하게 됐다. 한 번 하니, 쉽게 벗어나기 어렵고, ‘통합진보당 사태’라 불리는 파국과 절멸 때문에 진보정치가 이리 지리멸렬하게 될 수 있나, 하는 고민 속에 있다. 작은 것이라도 뭔가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게 지금의 심정인데, 사실 어렵다. 인간의 본성은 자유를 지향하는데, 돈에 대한 자발적 복종이 내면화된 자본주의 사회에 저항하는 것이 진보적 이념의 핵심인데, 그런 점에서 지금 참 어려운 시기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그래서 가장 많이 공부할 것이 자본주의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 역사와 같은 것을 공부해야 한다. 유럽에선 파업은 어떻게 하는지 사회 수업 중 배우는데, 우리는 그런 것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우리 사회를 덮치면서 노동을 수직위계화 했다. 배제의 문제에 대해 진보정치나 노동조직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궁극적인 진보정치의 방향은 주체와 주체와의 만남이 삶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는데, 암튼 정치판에 들어와서 힘들다. 지금도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고, 헷갈릴 때도 있다. 처음에 대표님 하고 부르면 귀에도 안 들어오더라. 두서없이 마구잡이로 말했는데, 그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심 시인은 용산 작가선언부터 두리반, 희망버스, 예술가 총파업까지 사회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사회적 활동의 장소에 참여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의미를 두고 있나?
2006년 귀국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진보정치를 이야기할 사람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나도 어색하다. (웃음) 정치에 대해 홍세화 선생과 대화를 나누는 게 놀랍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시인인데 왜 그런 활동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처음에 모였던 건, ‘작가선언 69’라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 시국선언을 했다. 진은영 시인이 전화를 했고, 친구가 불러서 의당 나갔다. 그때부터 이른바 ‘활동’이란 걸 시작했다. 현장 활동가의 활동은 아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서 친구들과 함께 일을 도모했다. 그 과정에서 친구들을 더 만났고, 송경동 시인도 만났다. 송경동 시인에게 어느 날 전화가 왔고, 희망버스 탔다. 또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시낭송을 해 달라고 하더라. 2차 희망버스였다. 1만 명 군중 앞에서 시 낭송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찌나 떨리고 긴장되는지. 내겐 그저, 애쓰고 노력하고 좋아하는 친구들의 부름에 부응하는 과정이었다.
말하고 행동하고 시를 쓰는 것,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그런 활동을 할 때 비판당했던 경험도 중요하다. 용산 참사나 희망버스 등을 놓고 시민들이 종종 하는 말이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잖아’이다. 자본주의 사회, 그 말이 질문의 시작이고 토론의 시작이어야 한다. 자본주의라는 말이 주체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출발점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그 말이 모든 대화를 종결짓는다. 그러니, 그런 것을 하면 안 되지, 의미 없지, 틀리지 등의 의미를 담는다. 정작 자본주의 사회가 뭐냐고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말은 궁색하다. 그만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은 거지. 개인의 지적인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 온 것이다.
진보정치가 지금, 왜 이런 상황에 오게 됐다고 보나?
(홍세화, 이하 홍)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 기본적 인식이 낮은 사회에 결국 신자유주의가 덮친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이윤 확장이 목적이다. 자본이윤을 확장하려면 두 가지를 뺏어야 한다. 복지, 의료 등 자본이 침투하지 못한 부분을 사기업화 한다. 그래서 국가를 줄이고 국가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KTX나 한전의 분할 매각이나 인천공항 매각 시도 등으로 표현된다.
그래도 그것은 첫 번째에 비해 큰 문제는 아니다. 자본은 노동을 위계화하고, 분할한다. 그것은 비정규직화로 나타난다. 진보정치라면 그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의 적대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보의 핵심문제이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의 이익을 대변할 뿐이다. 비정규직 철폐를 말로만 하고, 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을 배제한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이중의 배제를 당하는 셈이다. 자본과 국가에 의해, 또 한 번은 대기업 노동조합에 의해 배제 당한다.
배제된 노동이나 빼앗긴 자들을 주체화, 조직화, 정치화 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정파싸움 등이 주였고, 정당 안에서도 의회주의에 갇혔다. 의식기반이 취약한 사회에 신자유주의가 덮치면서 넋 놓고 당했다. 나는 2013년, 외환위기보다 더 심각한 경제파국이 올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는데, 그런 상황이 오면 노동민중이 큰 고통을 당해야 한다. 진보정치는 응당 해야 할 일을, 진단도 못했고,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현상적으로 통합진보당 사태로 드러났다. 쌍용차, 한진중공업 등은 결국 배제의 문제다. 쫓겨난 사람들을 민주주의 주체로 드러나게끔 하는 게 진보정치 몫인데, 그걸 방기했다. 그것이 책에서 내가 말한 파국과 절멸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심보선, 이하 심) 동의한다, 진보의 죽음. 진보만의 죽음이 아닌 정치의 죽음과 연관돼 있다고 본다. 진보라는 단어를 빼면, 한국 정치에서 무수히 반복된 일이다. 선거 전에 뭉쳤다가 깨지고 멱살잡이 하고. 어느 정당에서나 반복돼 왔다. 다만 충격이라면 진보에 대한 기대가 깨진 거지. 따지고 보면, 우리 정당 역사상 가장 솔직하고 진실 된 이름은 ‘친박연대’였다. 박근혜와 친한 사람들의 연대. 정말 솔직한 말이고, 정확하게는 ‘친박패’지. (웃음) 생존의 몸짓이 비장한 수사로 둔갑해 버린 것이 통합진보당이 보여준 결과다. 진보의 죽음일뿐 아니라 정치의 죽음이다. 통진당이 그 죽음의 대열에 동참한 거지.
책에서 두 사람의 단어가 다르다. 파국과 절멸(홍), 행복(심).
(심) 대학 때, 노동계의 당파성을 하루에 한 번씩은 들었던 것 같다. 당파성이 그때는 좋은 말이었다. 서구에선 68혁명을 기점으로 노동자뿐 아니라 배제된 자들, 즉 여성 소수인종, 성적소수자, 청년, 이민자 등이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조직화했다. 배제된 자들을 통해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 이젠 정체성 자체가 소수자의 이익과 권리를 대변하는데 유용한 수단이다. 미국의 시민단체를 보면 여성단체, 흑인단체 등 정체성 범주별로 조직화돼 있다. 60~70년대 등장한 정체성 기반 단체들은 풀뿌리였지만, 80~90년대 이들이 지역에서 워싱턴D.C로 가서 로비를 하고 정치인들과 소통하면서 신좌파의 위기가 도래했다. 이 과정에서 되레 보수 우파가 풀뿌리가 됐고, 그 결과가 부시정권이었다.
그것이 한국에도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다. 단체로 조직화된 생존과 표를 확보하기 위한 이익단체가 탄생했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이들은 99%와 연대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신좌파’라는 움직임은 진보신당이 표방하는 맥과 같이 한다. 몫을 빼앗긴 자들, 목소리를 빼앗긴 자들의 자발적 연대다. 희망버스, 쌍용차 투쟁 등 거리의 정치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기존의 조직화와는 다른, 기존의 리더십과는 다른 리더십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까? 나는 이것을 신신좌파로 명명했는데, 다르게 써도 될 것 같다. 배제된 자들이 모여서 행복해하는 그것을 ‘행복의 정치’라고 말하고 싶다. 희망버스 등에서 나는 ‘행복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다. 긍정심리학이나 행복하기 위해 명상이나 요가 등을 권하는 자기계발서나 행복담론과는 다른 맥락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고 본다.
(홍) 희망버스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그건 무엇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맺는,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관계, 끌림, 새로운 공동체 같은 것을 함께 느끼는 데서 오는 행복감이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갖지 못했던 관계의 느낌. 맑스가 말했듯, 사람의 삶은 그가 맺는 사회적 관계의 총화라고 했다. 우리가 지금 맺는 사회적 관계는 물질에 너무 찌들었다. 내가 이기기 위해 상대방이 져야 하는 팽팽함에서 해방됨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게, 행복감 아닐까?
(심) 파국, 절멸은 곧 ‘관계망의 파국’이라고 본다. 신자유주의에선 개인으로 연명하고 생존하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됐다. 그런 관계의 파국에서 진보신당이 출발하는 것처럼, 행복의 정치도 그런 파국에서 출발한다.
(홍) 지난 총선에서 진보신당 전략은 배제된 사람들의 서사였다. 기호 1번(김순자)도 그랬고. 지금까지의 진보정치는 조직화가 필요했다. 내팽개쳐진 부분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봤다. 그것이 배제된 자들의 민주주의 침투라고 얘기한 것이고. 물론 그것은 대단히 어렵다. 아직 거기에 관심조차 가질 수 없는 경우가 절대다수다.
폭력 용역 현장에서 등록금에 내몰린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가 있었고, 배제된 노동이라는 이유만으로 급진성을 담보하는 게 아니다. 계급 통합이 필요한 게 아니냐는 의견에 대해선.
(홍) 용역도 배제된 노동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자본과 노동의 모순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으면, 용역을 보편적인 의미의 자본과 노동 사이, 모순 관계에 있는 노동으로 볼 순 없다. 그야말로 한국적인 상황인데, 마치 지주사회에서 마름의 역할이 소농과의 관계와 모순일 때 마름을 소농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심) 부산의 많은 택시 운전기사들, 희망버스에 대해 부정적이다. 제주도 택시기사 아저씨들의 99%가 군사기지를 찬성한다는데, 제주도에 가서 택시기사를 만났더니, 이 분은 반대하더라. 처음엔 찬성했었다더라. 왜 반대하게 됐냐고 물었더니, 그 이유로 자전거를 들더라. 자전거를 취미로 삼아 돌아다녔더니 제주도를 새로 발견하게 됐다고 하더라.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느냐가 중요하다. 제주도를 새롭게 발견하면서 반대하게 됐다고 한다.
용역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용역 한 명을 초대해서 하룻밤 지새우자고 해보자.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 랑시에르가 말하는데, 다른 자리에, 다른 사람과 말하고 다른 것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서 배운다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하룻밤 지새우면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간다면 용역일을 계속 하면서도 조금은 바뀔 것 같다.
노동을 구별해서 생각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이 있고, 더 잘 살기 위한 노동이 있고, 함께 더 잘 살기 위한 노동이 있다. 거기엔 행복, 자유, 평등도 있고, 일상적인 삶, 일, 민주주의가 이 노동 속에 집약돼 있다. 그런데도 그저 살기 위한 노동자로 몰아간다. 어떻게 변신하고 배제된 자를 주체로 끌어내느냐가 진보정치의 과제다. 단순히 용역도 배제된 자라는 기계적인 논리로, 배제된 자들을 정치주체로 얘기하는 건 노동자를 그저 살기 위해 연명하는 존재라는 선입견으로 대한 것이다. 그 사람들은 주체가 안 될 거라는 선입견이다.
책에서도 ‘희망버스’는 실패한 운동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심) 물론 사측(한진중공업)이 약속을 안 지키는 어려움이 있다. 희망버스 성과를 단순히 복직에만 둬선 안 된다. 복직은 당연히 중요하지만, 다양한 주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산자는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자, 죽은 자는 해고된 자들이라는 말이 무섭지 않나? 산자와 죽은 자. 무섭지만 말이 된다. 특히 쌍용차는 22명(주. 강연 이후 10월8일, 23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이 죽었으니까. 사람이 한 번 더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쌍용차 노동자들이 보여준다.
희망버스에서 놀라운 점은 산자와 죽은 자가 연대했다. 죽은 자들의 싸움에, 산자들이 연대했다. 다양한 주체들이 죽은 자와 연대했다. 이 연대가 핵심이다. 김진숙 위원이 내려오자, 산자와 죽은 자의 연대가 흔들렸다. 그러자마자 사측이 들어와서 산자들을 구슬려 만든 것이 복수노조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실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틈이 벌어지자마자 사측(자본)이 개입해서 그 귀한 연대를 깨트렸다. 사측의 의식적인 노력과 전략이 개입했다.
홍 대표는 쌍용차에서 죽은 자와 연대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야 한다는 글을 썼다. 한편으로 글에 대해 이런 비판이 있다. 배제된 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쓴다는.
(홍) 한국에서 현실이라는 말은 지극히 억압적이다. ‘넌 현실을 몰라’, 이 말로 모든 것은 종결된다. 음, 글이 정말 어렵나? (웃음) 노력을 하고 있다. 사실, 배제라는 말도 쉽지 않다. 그러나 정확한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쉽게 쓰려고 애쓰는데 어려움도 있다. 한편으로 아쉬움이 있다. 일단은 배제된 사람이든 아니든, 책을 너무 안 읽는다. 특히 중고등학교 때 책을 너무 안 읽어서 독해력이 높지 않다. 정확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우리화하기가 어려우니까 그런 한계가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합리화하지 않나 하면서 깊이 반성하고 노력하겠다.
사회연대후보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어떤 계획이 있나?
(홍) 지금은 배제의 문제, 청년실업, 가계부채 문제, 자영업자 문제 등 위태로운 상황이다. 내년이나 내후년 경제파국이 올 것이다. 그리스가 청년실업 등으로 사회가 파괴된 상황이고, 미국발 금융위기가 재정위기로 옮겨가면서 스페인 등에도 부실채권 문제가 부각되고 있다. 중국의 수출전선도 냉각기로 들어갔다. 한국처럼 대외의존도 높은 나라는 앞으로 경제적 파국이 올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에 따른 고통이 노동과 민중에게 전가될 텐데, 그런 문제에 대해 발언해야 한다. 지금 진보정치세력이 흐트러졌는데, 대선 과정을 통해 결집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가치와 정당성을 세우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다. 대선후보로 비정규직 노동자가 나설 수도 있다. 학벌도 없고, 여성일 수도 있고. 지금까지 잘난 사람들이 (대선 후보로) 나왔는데, 뭐가 잘 됐나, 그렇게 치고 나갈 수 있지 않나 싶다.
두 분이 생각하는 정의의 기준과 세 명의 주요 대선 후보에 대한 견해와 예상을 듣고 싶다.
(심) 정의란 무엇인가.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평등이다. 누구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당당하고, 그 당당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사회, 그것이 내겐 정의로운 사회다. 그런 사회로 가는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 자유, 행복 등이 자연스레 따라오지 않을까! 사회를 바라보고 인간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동등하다’이다. 성별, 직업, 다른 무엇의 차이든, 이 사람과 나는 동등하다. 그 동등함을 철칙으로 삼고 얘기하고 관계를 맺자. 그게 나한테는 가장 중요하다.
나는 이번 대선에 기대 안 한다. 이 책에서 홍세화, 엄기호 글이 좋았다. 가장 비관적이고, 파국, 절멸, 수용소 등과 같은 단어를 쓴다. 내겐 한국사회가 수용소 같다. 대선후보는 수용소 소장을 바꾸는 것이다. 수용소의 논리를 봐라. 수용소의 수인의 삶은 수용소를 지키는 사람에만 의존한다. 경찰, 간수, 소장이 착하면 조금 운이 좋은 거고, 악독하면 운이 나쁜 거다. 대선은 그러니까, 착한 소장이 오길 기다리는 수인의 마음이다. 적어도 박근혜는 되지 않으면 좋겠다. 그래서 누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선뜻 내키질 않는다. 정작 나한테 중요한 것은 대선이라는 과정에서 어떤 가치들이 살아남을 것인가, 다시 부활할 것인가, 이다. 정치적 주체들, 민주주의 가치들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잔존할 것인가. 그런 고민이라서 이번 대선은 교도소 소장이 바뀔 것을 기대하는 수인의 마음으로 대하고 있다.
(홍) 정의에 대한 정의, 어려운데, 인간다움을 지키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권력이나 금력에는 힘 력(力)자가 있는데 정의에는 힘 력(力)이 없다. 단선적이지 않지만, 역사의 방향 자체가 힘없는 정의가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공평함과 인간다움, 이런 것이 확장돼 가려면 정의가 힘을 얻어가야 하지 않을까.
대선을 바라보는 관점은 박근혜는 (대통령이) 안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 분이 보여준 역사의식이 엄청난 파급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한 학자가 그랬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부끄러움을 알기 위해서다. 맹자도 인간의 조건 중에 수오지심, 부끄러움을 들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안 되면 좋겠다. 『안철수의 생각』, 읽어봤는데, 좋은 내용이 많더라. 요는 그 생각을 관철시킬 수 있는 동력이 형성되었는지 의문이 있다. 문재인, 잘 모른다. 어떻다 얘긴 못해도 박근혜 후보보다는 낫겠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진보진영에서도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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