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 야수처럼 연애를 해라! -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산속에서 자란 잣이 밭에서 자란 배추와 김치 속에서 만난 인연이다”
어느 도시가 가장 아름다우냐고 묻는다면, 전 ‘사랑에 빠진 도시’ 같아요. 도시에서의 만남과 전율, 그 반짝이는 순간이 아름답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글 속의 만남 중에 무엇 하나를 집을 순 없어요. 3~4천 장의 원고지 중에서 에디터들이 호흡이 튀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실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제게 있어 인생과 시가 태동하는 가장 속살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9월 13일 저녁 7시 예술의 전당 카페 푸치니바에서 예스24와 예술의 전당이 함께하는 작가와의 만남 ‘책 읽는 풍경’이 열렸다. 이번에는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라는 제목으로 14년 만에 산문집을 펴낸 문정희 시인이 나섰다. 옷을 가볍게 적시는 가을비만큼이나 촉촉한 눈망울의 관객 수십 명이 주황색 테이블보가 깔린 둥근 테이블을 앞에 두고 모여 앉았다. 문정희 시인이 파마머리에 부츠를 신은 자유로운 복장으로 무대로 나오자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이 시작됐다. 사회는 2008년도 창비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자 이번 산문집의 에디터를 맡은 백상웅씨가 보았다. 사회자의 질문과 문정희 시인의 답변으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산속에서 자란 잣이 밭에서 자란 배추와 김치 속에서 만난 인연이다”
문정희 시인은 옛날에 미당 서정주 선생이 제자인 자신에게 해 준 말을 소개함과 동시에, “이 가을 빗속에서 아주 아름다운 인연을 맺은 것 같아 가슴이 뭉클하다”는 정겨운 인사를 독자에게 건넸다. 그녀의 목소리는 중저음이었지고, 자신의 이야기로 관객에게 불어넣은 활기는 그 어떤 강연자보다 경쾌했다.
백상웅(이하 백) : 저는 이 책을 만들고 편집하면서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4년 만에 산문집을 내셨는데 기분이 어떠신가요?
문정희(이하 문) : 제가 처음 문학수업을 받았을 땐 소설과 희곡을 썼는데요. 운명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미당 선생님께서 심사를 보신 대회에서 장원을 하는 바람에 장래에 대한 고민 없이 시인이 됐어요. 이름을 공개 석상에서 말씀은 못 드리지만, 저와 같이 백일장에 나와서 장원을 못한 작가들이 유명해져서 돈을 많이 벌 때는, “나도 소설을 썼으면 문제없었을 텐데”라는 생각도 했어요. 하지만 가장 세련된 형태의 언어 문학인 시가 나에게 운명적으로 왔고, 그렇게 내가 시인이란 이름을 가진 이상 옆길을 기웃거리지 말아야겠더라고요.
그래서 14년 동안 산문집을 절제했어요. 40대 말에서 50대 초반에 산문집을 내서 벌어들일 그만한 돈이 내 인생을 바꿀 것 같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제가 세상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는 한 거침없이 해도 큰 실수가 없는 나이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백 : 이번 산문집이 더 큰 의미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여러 만남이 등장하는데요. 스승과의 만남, 해외에서 만난 사람들, 가족 이야기 등이 진솔하게 나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만남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문 : 어느 도시가 가장 아름다우냐고 묻는다면, 전 '사랑에 빠진 도시' 같아요. 도시에서의 만남과 전율, 그 반짝이는 순간이 아름답잖아요. 마찬가지로 이 글 속의 만남 중에 무엇 하나를 집을 순 없어요. 3~4천 장의 원고지 중에서 에디터들이 호흡이 튀지 않는 부분을 골라서 실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제게 있어 인생과 시가 태동하는 가장 속살 같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어요. 저도 폭염 속에서 읽어내면서 기가 막히게 편집을 잘했구나 생각했어요.
진짜 스트레스는 노래방에서 풀리는 것 아냐
백 : 선생님, 질문을 피해 가셨는데요. 어느 하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게 없다는 말씀이신 것 같아요. 문학은 가끔 뒤통수를 때리거나 삶을 번쩍 뜨이게 하는데, 선생님께 문학이란 어떤 의미인지,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라는 제목의 비밀을 알려주세요.
문 : 책의 첫 부분을 보면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부수는 도끼여야 한다네'라는 구절이 있죠? 제가 이 '도끼'라는 말을 정말 좋아해요. 편집자 혹은 다른 분들이 '사랑의 도끼'라든지 '열정의 세상을 뛰어라'라는 식의 제목을 추천하기도 했어요. 난감했죠. 시는 사멸의 기로에 놓여있는 장르예요. 심장에 손을 대보면 따뜻해지고 뛰잖아요. 이것이 시고 문학의 숨결인데 자동차 클락슨, 강남스타일 등 시끄럽고 화려한 소리에 홀려서 이 소리를 못 듣는다 하더라도 심장에 있는 것은 문학의 소리라고 생각했어요.
인간은 언어로써 존재합니다. '밥 먹어라'와 같은 일상적인 언어 말고, 사유와 관념을 쓴 언어로 삶을 깨웠을 때야말로 진정한 투시력, 위로, 깨우침이 있다고 봐요. 노래방에서 세 시간 풀고 온 스트레스는 진짜 스트레스가 아닐 겁니다. 인생이 그렇게 가볍지 않다고 보거든요. 그래서 위로와 사랑과 상처를 문학의 도끼로 깨야 한다고 보았어요. 한국 사람들이 책을 많이 안 읽는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사람들이 자기 삶에 대해 자신의 상처와 갈망을 절절하게 보는 것이 느껴집니다.
백 : 가장 오랜 시간 걸려 선택된 제목인데, 정말 좋은 것 같아요.
문 : (책 편집 때 사회자와의 대화에서) 내가 여자냐? 여자들은 예쁜 제목을 원하지만, 단 한눈도 팔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면 이런 제목을 붙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했어요. 8월에 나온 시집 제목도 『카르마의 바다』인데, '카르마(업보)'를 붙인 이유도 마찬가지예요. 라이너의 『말테의 수기』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한국 시인들은 왜 예쁜 제목만 붙여서 독자의 얄팍한 위로와 갈증에만 호소해야 하나요. 최근 김기덕 감독의 영화 「피에타」가 황금사자상을 받았는데, '피에타'는 피 흘리는 예수의 죽음을 안고 있는 마리아를 표현한 거잖아요. 그런데 왜 한국 문학은 달콤한 이야기로만 독자에게 건너가야 하는 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하늘이 흔들린 정도로 포효하며 열정을 다해 연애를 하거라
백 : 여성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고, 시에도 여성적인 어떤 마력이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생님 시는 여성이 읽으면 공감하고, 남성이 읽을 때는 도발적입니다.
문 : 이 책에 '딸아, 연애를 해라'라는 글은 제가 딸뻘 후배들에게 하는 이야기예요. 전 여성으로 태어나서 산다는 것만큼 아름답고 빛나는 게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직도 모든 것의 게이트 키핑은 남자이고, 여성은 구색 맞추기 식이 많아요. 지하철 개통식을 하면 까만 까마귀들이 커팅을 하고, 여성들은 한복을 입고 구색 맞추기를 하잖아요. 어쩌면 진정 잘라야 할 테이프는 우리의 의식을 꿰뚫고 있는 생각일 거예요.
전 여성으로 불리든 아니든 마음 편하게 하나의 제대로 된 문학을 하는 시인이면 최고로 당당할 수 있다고 봐요. 마찬가지로 여성들도 고민해야 할 것은 평소에 농구대를 옮길 때 '오빠'를 외치면서 응석을 떨지는 않는지, 직장에서 늦으면 예쁜 얼굴로 쉽게 가는 비굴함은 없는지를 생각해 봤으면 해요. 한번 자기를 깊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백 : '남자를 위하여'(86p)에 실린 '다시 남자를 위하여' 시에 '진짜 멋지고 당당한 잡놈은 멸종 위기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인상적입니다.
문 : 그동안 한국의 여성시라는 것이 주로 가슴만 있는 시였어요. 남자를 그리워하고, 가냘프고. 사실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등도 모두 여성적인 어법이잖아요. 그런데 70년대 한국은 농경에서 산업으로 가는 때였어요. 농경 사회에서 여성은 가정 안의 존재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시간당 얼마를 벌든 간에 하나의 바로메타가 되는 거죠.
그래서 70년대 여성시는 시어도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사물을 포착하는 데 거침이 없게 대범하게 쓸 수 있는 적시의 언어를 쓰는 투시력, 또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이 갖추어져야 하죠. '다시 남자를 위하여'라는 시는 유명한 철학가의 사이트에도 실려 있는데요. 우리 여성들은 정말 세기를 태울 만한 검은 눈썹을 씰룩거리는 사나이를 만나고 싶습니다.
백 : 사랑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요.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문 : 제가 가장 열패감이 있고 창피한 부분이 사랑이에요. 저울질하고 자존심 재다가 다 흘려보냈어요. 한번 풍덩 빠져봤어야 하는데 그걸 못해 봤어요. 지금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것은 '퐁당'이라고 말해요. 인간이 살면서 가장 아름답고 뜨거운 것은 종교나 부모와의 사랑이 아닌 남녀 간의 연애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뜨겁고 피 끓고, 그런데 그 사랑이 쉽게 안 되죠. 사랑과 종교는 둘 다 소질이 필요한 것 같아요. 광신도적인 기질이 있어야 합니다. (좌중 웃음)
저는 사랑이 늘 갖고 싶었지만, 변덕이 심해서 약속을 정하고 옷 입으면서 마음이 바뀌는 정도였어요. 제대로 세기를 주름 잡는 멋있는 사랑을 못해본 것이 제일 아쉽습니다. 사랑하다가 상처를 입어보는 것이 사랑에 안 빠져본 것보다 훨씬 근사해요. 하지만 사랑이 태풍처럼 지나가면 '여자에게는 상처가 되고 남자에게는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여자는 아이를 낳는 등 육체적인 한계나 수용하는 방식이 달라 내 딸이나 후배들에게 무조건 사랑에 빠지라고 이야기하기엔 어려운 부분도 분명히 있죠. 인간 아무개와 시인 아무개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백 : 저는 잡놈도 안 되고 소질도 없네요. (좌중 웃음) 선생님께선 전화나 미팅을 하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 주시고 울림을 주셨어요. 나중에 제 시집이 나오면 첫 번째로 드리고 싶습니다. 저에게 이렇게 선생님이 계시듯 선생님께도 선생님이 계셨을 텐데요.
문 : 미당 선생님은 17살 때 처음 뵙고 36년, 거의 생애를 같이 했어요. 미당 선생님 외에도 참 좋은 선생님들이 많았어요. 요새는 스승이라는 개념보다 교사와 학생뿐이고, 학교에서 선생님 멱살을 잡느니 하는 기사도 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인간을 망치고 황폐하게 하는 건 전쟁보다도 인간 스스로라는 생각을 해요. 한 생애를 통과하면서 좋은 스승과 선배라는 본보기를 갖는다는 것은 하늘에 떠있는 별 하나를 소유하는 건데, 그런 기회를 놓치고 사는 시대가 무슨 시대인가 싶을 때도 있어요. 미당 선생님 이야기를 하면, 미당 선생님은 저 말고도 많은 제자가 있었죠.
그래도 제가 큰 사랑을 받은 건 사실인데, 아무려면 선생님만 저를 사랑하셨겠습니까? 저도 예쁘게 보일만 한 것이 있었겠죠. 사실 선생님은 참 좋은 분이지만, 수업하실 때면 '(아주 천천히)보~들레르' 하시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명동에서 놀고도 싶고 그렇잖아요. 하루는 매니큐어를 발랐는데, 끝나고 선생님께서 저를 찾으시면 “선생님 저 매니큐어 발랐어요~”하고 이야기했어요. 그때 선생님께선 “반달은 가리지 말고 커튼만 드리우지”라고 하셨죠. 선생님 두 시간 강의보다 그 한 마디에 충격을 받았죠. 다르구나. 아마도 선생님 문학 속에는 내 누님 혹은 여인의 '손톱 속의 반달'이 많을 거예요.
미당 서정주의 마지막 술잔은 숟가락
문 : 이건 오늘 여기서 처음으로 하는 이야기인데요. 선생님의 마지막 술잔은 숟가락이었습니다. 119 아저씨들이 와서 선생님을 데려가려고 몸을 고정하는데, 제가 “국화 옆에서의 시인이에요. 꽁꽁 묶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그 순간 '국화 옆에서'인지 '국수 옆에서'인지 세상에 그렇게 힘이 없는 말이 있을까 싶더라고요. 그때 선생님이 “술, 술을 다오" 하셨어요. 저는 부엌에 뛰어가서 무알콜 술을 숟가락에 담아 누워있는 선생님 입에 흘려 드렸어요.
이승에서의 마지막 술잔이 숟가락이었죠. 비가 오면 이 장면이 참 슬프면서도 아름답게 떠오릅니다. 시인의 마지막 장면이라 시로 써보려 했는데 잘 묘사가 안 되더라고요. 미당 선생님께서는 “고독을 느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게 혼자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진정한 문학을 알아보는 눈이 많지 않다는 뜻이었어요. 고독 속에서 자기 가는 길을 지키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시를 지키면서 왔다는 건 스승의 올바른 격려 덕분이 아니었나 싶어요.
백상웅 사회자의 질문이 끝나고, 관객들이 질문을 생각하는 동안 문정희 시인이 산문을 낭독했다. ‘딸아 연애를 해라’(41p)를 큰 소리로 감정을 담아 낭송했다. 문정희 시인의 절절한 목소리가 푸치니바를 가득 채웠다. 관객은 숨을 죽이며 몰입했다. 낭송이 끝나자 커다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정희 시인도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감격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마치 소녀 같았다. 그녀가 처음 시를 만났을 때 저런 표정이 아니었을까. 이어 독자와의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고, 문정희 시인은 때로는 나지막하게 때로는 열정적으로 답변했다. 이 날 행사는 시인이 가진 인생의 지혜를 한 편의 시로 만드는 과정처럼 응축된 시간이었다. 독자가 지니고 온 산문집에 그녀가 사인해 주는 것으로 '책읽는 풍경'은 끝났다. 딸에게 야수처럼 연애하라고 말하는 강한 여성 시인 문정희, 그녀야말로 '풍덩 풍덩' 폭풍 같은 연애에 빠지길 기대해본다. 언제나처럼!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최고의 장인이 될 아름다운 시인 문정희
독자1 : 선생님 작품 속에는 끊임없이 싸워야 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싸움의 대상은 누구인지, 가장 약자는 누구인지?
문 : 산문집을 14년 만에 냈다면서 본질을 지키고 싶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시로 표현이 안 되는 이야기가 거의 없더라고요. 그래서 산문을 안 쓴 것도 있습니다. 지금 나의 적수는 고백하자면, '늙음'입니다. 아까 제가 ‘딸아, 연애를 해라’를 낭송할 때 다이어트를 멈추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그래도 일단 어떤 형태로든 예쁘게 할 수 있는 한 예뻐져야 합니다. (좌중 웃음) 제 적은 아무리 우겨도 예뻐지지 않는 나예요. 아무리 예쁘게 스카프를 둘러도 예쁘지가 않은 거예요. 전 마흔에도 서른에도 젊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쉰 살을 '만져보기는 하지만 아무도 선뜻 먹지 않는 뷔페 상에 놓인 콩떡'이라고 비유했던 적도 있어요. 늙음을 어떻게 지혜롭게 할까 고민하는데, '여성 화가 천경자' '소설가 박경리'는 노인이나 할머니가 안 떠오르고 소설가?화가가 떠오르더라고요. 결국, 내 길에서 최고의 장인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독자2 : 열렬한 선생님의 시를 읽고 힘을 얻었다. 선생님의 원천 에너지는 무엇인가요?
문 : 만약 제가 열정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호기심과 모험심을 줄이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에요. 저는 사실 겁쟁이예요. 마흔세 살의 어머니가 낳은 막내딸인데다 눈물도 많고, 어린 나이에 유학을 갔기 때문에 고독에 겁을 냈어요. 해외작가촌에서는 작가들이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서 작품을 쓴다면서 말을 안 하고 있어요. 그럼 저도 그렇게 혼자 방에서 그 외로움을 참고 있는 거죠. 그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어요.
해외 작가촌에 간 첫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날 서울집이 이사했는데, 남편이 전화가 와서 인감도장 어디에 뒀느냐고 묻는데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날은 작가촌에서 저녁을 처음 먹으면서 인사하는 자리에 가야 했는데, '저녁 식사'에 간다고 했어도 될 것을 '디너'에 가야 한다고 말한 거예요. 그 말 때문에 남편의 심사를 엄청나게 건드린 거죠. 그렇게 남편은 “이 여편네가 디너에 간다고!”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어요. 근데 전화를 끊고 디너에 갔는데 한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예요. 생전 처음 보는 외국 여자 작가에게 염치 불고하고 '결혼했느냐'고 물어보며, 나는 이제 앞으로 3개월 동안 바늘방석이라고 심정을 말했죠.
그때 난데없이 코피까지 일주일 동안 쏟아진 거예요. 그렇게 몰입하면서 삶 전반에서 내성을 기른 힘이 시에 비치고 그런 것 같아요. 끝없는, 끝없는, 끝없는 전진이었죠. 그 끝에는 하늘과 이슬 몇 방울과 허공뿐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떤 명예보다 아름답게 보였어요. 아마 제가 열정적으로 보인다면 이렇게 호기심과 열정을 줄이지 않으려고 노력한 탓일 겁니다.
요즘 우쿨렐레 연주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악기를 다루는 것도 세상을 사는 것도 '재미'가 필수! 하지만 진짜 재미가 뭔지 알려면 지루하고 고단한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 거라고,거침없이 믿고 끈덕지게 달리는 유쾌하고 튼튼한 여장부다.
뇌에 쥐나도록 아는 단어를 모두 끌어와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 용기를 북돋는 것이 지상 최대의 기쁨이자 삶의 낙이다. 언제까지나 개념과 지혜를 갖춘 푼수로 살고 싶다. 채사모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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