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安寧)은 편안함을 묻는 인사말이다. 편안할 안에 편안할 녕. 고달픔 많은 인생길, 평화와 평온이 두 글씨 사이에 있길 기원의 마음을 품은 인사말. 시인 도종환 시인의 인사말은 다르다. 맑을 청(淸)에 편안할 안(安), ‘청안하십니까’ 하고 인사를 건넨다. 솔 향 가득한 숲길을 걷는 듯한 편안함을 바라는 마음에서다.
숲에서 얻은 청안함을 담은 산문집,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가 출간되었다. 홍대 근처에 있는 출판사 회의실에서 만난 시인은 건강하고 편안해 보였다. 그를 아는 모든 이를 걱정하게 했던 병은 많이 나았고, 바깥 거동을 하는 데도 불편이 없다고. 산에서 내려온 시인의 모습에서 동안거를 마친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책, 시, 교사의 길, 시인의 삶
그의 인생은 책을 떼놓고 말할 수 없다. 수불석권. 지금도 그는 수중에 책이 없으면 불안하다. 차 안에서든, 잠시 쉬는 시간이든 책을 읽는다. 중학교 때 개가식으로 운영되는 학교 도서관에서 시인은 거대한 지(智)의 대륙을 탐험했다.
대학에서 고은과 최인훈을 만났다.
“고은 시인의 ‘눈깔사탕을 사주고 싶은데 나에겐 딸이 없다. 가을의 구멍가게’라는 3줄짜리 짧은 시가 있어요. 무척 감동했어요. 고은 선생님은 참 멋진 예술가시죠. 어느 책에 자기소개를 딱 세 줄 써 놨어요. 첫 줄에 이름 고은, 둘째 줄에 저서 20여 권, 셋째 줄에 소주 일천 병 돌파.(웃음) 멋지지 않아요? 최인훈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어떻게 많이 알고, 관념적으로, 철학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갈 수 있을까, 상상에서 상상으로 이어지는 풍부한 세계를 가질 수 있을까.’ 감탄했죠.”
고은과 최인훈이라는 이름만 들어가면 빼놓지 않고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그도 문학의 길을 갔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절망의 시대였다. 누구나 가슴속에 절망과 말할 수 없는 소망을 안고 살았다. 그는 시를 통해 그러한 절망과 소망을 토해냈다.
그는 시인이면서 선생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시를 쓰는 일만큼이나 그의 천직이었다. 그러나 전교조 일로 해직되었고, 다시 아이들을 만나기까지 10년이 걸렸다. 다시 교단에 선 그는 의욕에 넘쳤지만 아이들과 새롭게 눈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눈만 봐도 마음이 통하고 좋았어요. 그런데 10년이 지나 다시 교단에 섰는데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더군요. 아이들을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이었어요. 수업 중에 나도 모르게 거친 말을 하게 되었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선생님의 모습, 윽박지르고, 야단치고, 아이들하고 싸우고……. 수업이 끝나면 그렇게 비참할 수 없었어요. 처절하게 깨졌다, 실패했다는 생각에 들어 교사를 정말 그만두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결심을 했죠. 아이들과의 전쟁을 끝내고, 연애를 하자.”
그렇게 도종환 시인은 새롭게 시작했다. 조금씩 아이들도 마음을 열었고, 교사로 5년 동안 많은 성과를 얻었다. 그러다, 자율신경실조증이라는 희귀병이 그를 찾아왔다. 아이들과 다시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쉬웠지만 병을 고치기 위해 교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속리산에 황토로 집을 짓고, 나무, 꽃, 풀, 새, 다람쥐와 함께 몇 계절을 살았다. 청안한 삶이었다. 지금 입고 먹는 것 외에는 아무 욕심도 내지 않고, 독서와 글쓰기로 마음을 평안히 했고, 숲을 바라보며 몸을 평안히 했다.
숲으로 간 시인, 청안함을 얻다
“제가 사는 곳은 충북 보은군에 있는 황토집인데 외딴 산속에 있어요. 적막함 속에 외롭게 있다보니 글을 쓰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이 되더군요.”
숲에서 홀로 지내면서 느끼는 것들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었다. 삶에서 놓치는 게 무엇이고,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숲에서 지낸 시간은 내 생애에 있어 쉼표에 해당하는 시기였습니다.” 쉬면서 시인은 자기 마음의 고요한 중심으로, 자기 마음의 거처로 돌아오는 시간을 가졌다.
도시의 삶이 더하기라면 숲의 삶은 빼기다. 끝없이 욕심과 욕망을 더해가다 눈앞이 흐려지는 도시의 삶. 숲은 욕심의 군살을 빼고, 허영의 군내를 날려 보낸다. 도시의 삶이 끝없는 백 미터 전력질주라면 숲의 삶은 자유로운 산책이다. 숲에선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다. 제 속도대로 꽃을 피우고, 새끼를 낳고 키우며, 열매를 떨어뜨리고 겨울잠을 잔다.
숲에서의 삶은 소박하다.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고, 찾아오는 이가 없으니 시인의 벗은 책이었다. 책 읽기가 싫증나면 산책을 나가고, 산책이 지겨워지면 몽당연필로 시를 쓴다. 시 쓰기도 지겨워지면 산속의 생물들의 안부를 묻는다. 산속 생활에 익숙해져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짙어진다.
“그리워하면 마음이 착해져요. 누군가를 진짜로 사랑하면 마음이 착해져요. ‘그 사람을 생각할 때 마음이 선해진다’고 하면 당신은 그 사람을 진짜 사랑하는 거예요. 그 사람 때문에 외로워도, 선한 바탕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그리움은 사람을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요즘, 사람이 두려운 존재, 무서운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스트레스를 받죠. 하지만 사람이기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필요하고, 그런 마음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리움은 타인을 선한 눈으로 바라보게 해요. 그렇게 되면 마음이 청안해지죠. 사람이 좋아져요.”
동심으로 돌아가 동시를 쓰다
“심심하니까 닭도 키우고, 병아리들이랑 놀았어요. 마루에 밤을 늘 놓아두니까 다람쥐가 밤을 먹으러 놀러 와요. 친구가 됐죠. 며칠 안 보이면 왜 안 오는지 궁금해요. 다친 산토끼를 데려다가 키웠는데, 아주 장난꾸러기예요. 책을 쏠아놓고, 장판을 찢어놓고, 이 방 저 방 뛰어다니고.(웃음)”
시를 쓰려고 연필을 들면 동시가 씌어졌다. 스스로도 신기했다. 숲에서 사는 동안 마음이 어린이로 돌아갔다. 동심에 한없이 가까워지자 주변 사물도 어린이의 눈으로, 어린이의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어른들은 큰 것, 높은 것을 바라보잖아요. 그런데 아이들은 작은 것, 낮은 것을 참 예쁘게 보죠. 해바라기는 키가 크니까 금방 눈에 띄지만 바닥에 붙어 있는 채송화는 눈에 잘 띄지 않아요. 그런데 쭈그리고 앉아서 보면 참 꽃이 예쁘죠. 물웅덩이를 첨벙거려도 신이 나죠. 비 오는 날엔 물장난을 해도 티가 안 나니까 얼마나 좋아요. 이미 옷이 젖었으니까 옷 더럽혔다고 야단맞지도 않으니 더 좋고. 이런 것들을 동시로 썼어요.” 숲에서 쓴 동시들은 올해 5월쯤 책으로 묶여 나올 예정.
시를 읽고, 시를 쓰고, 시를 가르치며 살아온 도종환 시인에게 시는 ‘내 인생의 가장 고마운 이정표’다. 살면서 방황할 때마다 그는 시가 일러주는 길을 따라왔다.
“그 길은 힘들고 어려운 길이나, 가치 있는 길입니다. 내가 시를 쓰지 않았다면 물질적으로, 사회적으로는 풍족한 삶을 살았겠죠. 그러나 시를 쓰기에 가치 있게 사는 것, 사람답게 사는 것을 고민하며 살려고 노력했고,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시인들의 시가 그에게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그가 쓴 시들도 누군가의 위안이 되어준다면 그는 더 바랄 게 없다.
삭막한 사막의 삶에서 청안한 숲의 삶으로
누구나 다 시인처럼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숲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을 떠나지 않고도 청안한 삶을 살 방법이 있다.
“보통 한 가지 일에 전념해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다고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한눈도 팔고, 샛길로도 빠지고, 본업 외에 다른 일도 해보고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이 삶의 품격을 높이고 생의 깊이를 깊게 하는 일이자,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기도 하니까요. 돈을 벌고 출세할 욕심보다는 삶을 풍요롭게 하는 욕심을 부리고,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한다면 청안한 삶에 가까이 가고 있는 겁니다.”
| “우리는 숲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청안한 삶을 배워야 합니다. 강하지 않아도 모두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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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은 ‘시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라고 했다. 시를 비롯한 예술은 삶의 필수품이 아니다. 그것은 실용적이지 않다. 인생에서 본업 외에 다른 일에 시간을 들이는 것, 샛길로 가는 것, 한 눈을 파는 것도 실용적이지 않다. 실용적이지 않은 건 정말 쓸모가 없는 것일까?
“오늘날의 실용은 자본의 논리로 본 실용, 인간이 배재된 실용입니다. 자본이든 실용이든 모두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죠. 자본과 실용이 인간을 배제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실용의 함정에 빠져 비실용적인 가치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비실용적인 가치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예로 숭례문 화재를 들었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숭례문을 없애 버리고 도로를 확장하거나, 그 자리에 건물을 짓는 게 더 이익입니다. 그런데 숭례문이 불타버렸을 때 사람들은 왜 그렇게 슬퍼했을까요?”
전쟁 때도 무사했던 숭례문이 불탄 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전시보다 더한 세상이라는 걸 시사한다.
“범인을 옹호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만, 숭례문의 화재는 자본의 논리 속에서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두 잘살게 되면 행복할 거라고 우리는 믿었지만 현실은 어떤가요? 우리는 국민소득 2만 불, 세계에서 열한 번째로 잘사는 나라지만 우리의 행복지수는 102위. 형편없이 낮죠. 이 격차를 어떻게 메워야 할까요?”
현 정부는 국민소득을 2만 불에서 4만 불로, 11위에서 7위로 끌어올리려 한다. 그러나 시인은 정치가 정말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많이 가져도 불행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비실용의 가치에 눈을 놀릴 때, 종교, 문화, 예술을 통해 각박한 삶을 청안한 삶으로 바꾸어 나갈 때 그 격차는 줄여나갈 수 있을 겁니다.”
시인은 우리가 봐야 할 곳은 선진국이 아니라고 말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경제만을 위해 뛰고 있는 발을 멈추고 뒤와 옆을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들,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다 나만큼 소중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문학을 비롯한 예술과 종교는 어느 시대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삶의 궁극, 삶의 근원에 대해 답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인 삶은 사막 같은 삶입니다. 목마르고, 길 잃을까 두렵고, 여유가 없지요. 돈을 많이 벌어 잘사는 길로만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삶이죠. 그 반대편에 숲이 있습니다. 숲은 상호부조의 세계입니다. 숲은 목마르지 않고, 지치지 않습니다. 숲에 사는 모든 존재는 더불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숲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청안한 삶을 배워야 합니다. 강하지 않아도 모두 함께 살아남을 수 있는 법을요.”
사막에 사는 우리에게 시인은 묻는다.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