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김보라
문화평론가 손희정이 격주 수요일마다,
지금 이 시대의 여성 영화감독의 이야기를 '손희정의 더 페이보릿'에서 펼칩니다.
“우리는 고통과 슬픔에서 달아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아름다움과 기쁨으로부터 달아난다. 아름다운 것보단 스트레스와 고통이 더 익숙한 옷이기 때문이다.”
(김보라, “아름다움으로부터 떠남”, 《엘르》, 2020.4.)
한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김보라 감독(이하 김보라)은 이렇게 썼다. 이 글이 <벌새>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불행보다는 행복이 더 두려울 때가 있다는 그는 스스로에게 관대해지고 싶고 일상의 반짝이는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열다섯 살, 여중생, 1994년 성수대교 붕괴, 사랑하는 이의 죽음. <벌새>를 설명하는 몇 몇 개의 키워드는 이 작품이 통증(성장통)에 대한 기록일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만, 그보다는 ‘끝내 사랑함’에 대한 영화다. 궁금했다. 익숙한 고통 속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기어이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게 김보라를 만났다.
“삶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벌새>를 여러 번 보았다. 그때마다 좋아하는 장면이 달라졌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마지막으로 다시 보았을 때에는 한 시퀀스가 끝나고 다른 시퀀스로 넘어가는,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의 순간에 매혹되고 말았다. 영화의 중반부 즈음이다.
침샘에 생긴 혹을 절제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하던 날. 은희(박지후 분)는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김새벽 분)를 만나러 간다. 선생님이 너무 좋다는 고백과 함께 영지에게 와락 안기는 은희. 그리고 컷이 바뀐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은 수술 직후 마취에서 깨어나는 은희의 얼굴 클로즈업이다. 세상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앞으로 은희에게 닥쳐올 상실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그의 혹은 ‘쓰레기통’으로 사라진 후다.
이 장면들의 연결은 놀라운 리듬감을 선사한다. 김보라는 장면들을 자르고 이어 붙이는 편집 과정에 대해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계산된, 오랜 훈련을 통해 습득한 영화적 테크닉의 결과”라고 말한다. “나의 호흡과 같은 리듬으로, 장면들을 이어 붙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장면에서만큼은 호흡이 ‘흡’하고 멈춰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장면은 다음 장면으로의, 어쩌면 실패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도약을 시도한다.
안기는 장면도, 눈을 뜨는 장면도 아닌,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의 순간에 이토록 사로잡힌 것은, 그것이 벅차오르는 사랑과 아득한 상실 사이에 존재하는 좀처럼 포착하기 어려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찰나이면서도 심연과도 같이 쩍 벌어진 틈새. 영화를 여러 번 보고 난 뒤에야 이 틈새가 결국 130분에 달하는 영화의 러닝타임이 잡아내고 있는 정서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김보라는 이 간격을 연속적인 시간 속으로 서사화하면서 뜨거운 드라마를 완성한다.
영화의 끝, 은희는 그 틈새를 충분히 살아냈기 때문에 “삶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는 영지의 말과 다시 만나게 된다. 지긋지긋한 일상, 소통의 실패, 상실, 그리고 고통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한다는 그 두려운 사실을 영화는 회피하지 않는다. 엔딩이 놀라웠던 이유다.
온전한 미움 끝에 찾아온 사랑
이 드라마 안에는 ‘사랑과 상실’만큼이나 온갖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꿈틀거린다. 따뜻함과 폭력이, 열정과 피곤이, 두려움과 도발이 뒤엉켜있는 시공간. 그것이 열다섯 살 소녀의 시공간이다. 그에 대한 묘사는 또 어찌나 생생한지, 후각이 자극되는 착각이 든다. 은희의 첫 키스에서는 비릿한 숨 냄새가, 은희가 영지에게 안기는 순간 창밖으로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로는 여름의 찐득한 풀 내음이, 지숙이와 방방이를 타는 장면에서는 달콤 쌉싸름한 달고나 향이 풍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 그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건 결국 나의 기억다발의 일부일 뿐이다.
1994년 강남 대치동에 사는 중학생 은희의 이야기는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강렬하게 접속되었다. 그 시절을 풍미했던 대중가요나 친구들끼리 돌려 읽던 만화책 같은, <벌새>의 꼼꼼한 디테일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세월로 포장해서 의식의 저 아래에 묻어 놓은 것들을 파내기 위해 자신과의 집요한 싸움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던 김보라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구체성이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가 작업할 때 염두에 두었던 말이다.
김보라는 자신과의 대면에만 충실했던 것이 아니다. 그가 맺고 있는 관계에도 충실했다.
‘나’를 직면했다. 가족들과의 해묵은 모든 갈등까지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화해했다. 가족들은 내게 이제 그만하자고 너무 후벼 파지 말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묻고 또 묻고, 싸우고 또 싸웠다. (...) 우리는 평화로웠던 관계를 다시 부수고 세워 가며 대화를 나눴다. 가짜 평화와 거짓을 파헤치고, 숨어 있는 어두움을 부수고 또 부쉈다. (김보라, 『벌새』, 10쪽.)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 있는 <벌새>를 쓰고 찍었던 과정에 대한 묘사다. 이어서 그는 덧붙인다. “놀랍게도 온전한 미움 끝에 찾아온 것은 사랑이었다. (...) 나는 그들이 혈연가족이라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사랑할 만해서, 사랑하게 되었다.”
김보라의 고백은 사랑이란 차이를 봉합하는 말랑 말랑하고 안전한 단어가 아니라, 정확하게 분노하고, 불화를 회피하지 않으며, 끝까지 대면한 후에야 가능해지는 변화의 가능성이자 공존의 기술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무엇보다 정치적인 행위다.
너와 나, 우리 모두의 은희로
<벌새>는 지금까지 사소하게 여겨져왔던, 그렇게 카메라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던 ‘소녀의 시간’에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부여해서 공적 서사로 만들어냈다. 그래서 “가장 보편적인 은희”라는 영화의 소개문구와 ‘자전적’이라는 말이 만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소녀는 자라서 작가가 되고, 작가는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발판으로 엮어낸 구체성 위에서 보편성을 쟁취해낸다. 보편을 증명하기 위해 ‘나, 김보라’라는 특수성을 버리지 않는 것이 ‘끝내 삶을 사랑하는’ 용기와 맞닿아 있다.
특히 여성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던 자기로의 몰두, 나를 끝까지 설명해 내는 열정,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부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점핑. <벌새>를 가능하게 했던 이 모든 에너지의 원천이 나르시시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대해 물었다. “가장 보편적인 은희”라는 말이 오히려 고유한 단독자로서 김보라의 나르시시즘을 상상하게 하는 역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는 동의하지 않으면서 반문했다. “나르시시즘이란 명명은 오히려 여성감독의 자아탐구와 발견의 과정을 관습적으로 폄하하는 것은 아닌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섰고, 스스로를 되돌아보았고,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았다.
“나는 나에 대해서 오래 연구했다. 그 과정들을 통해 깨달았다. 스스로를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내 고통에 공감하고 그에 마음을 기울였지만, 그것만이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다.”
이런 태도가 은희뿐만 아니라 수희와 지숙, 영지, 유리,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와 오빠조차도 생생한 캐릭터로 살아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여기서 ‘캐릭터로 살아 있다’는 말은 중요하다. 영화는 ‘자전적인 이야기’일 뿐, 자서전이 아니다. 김보라는 캐릭터를 만들고 생동감을 불어넣으며 고민했다. 영화가 은희의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을 길을 찾기 위해서.
덕분에 카메라가 은희의 내면을 포착하고 있을 때에도 관객들은 생각하게 된다. 아마도 은희보다 더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지고 있을 다른 이들에 대해서. 영화는 주변 인물들이 관객들을 매혹시키고, 스크린 밖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가장 보편적인 은희”는 수희일 수도, 지숙일 수도, 영지일 수도, 그리고 당신일 수도 있다. 그렇게 영화는 스크린을 넘어 확장된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도 우리는 영화에서 ‘그가 하고자 했던 것’과 ‘내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것’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에 대해 계속 이메일을 나누었다. 갈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에 익숙한 나로서는 생경한 과정이었지만, 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벌새>, 그리고 작가 김보라에게서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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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희정(『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저자)
경희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미디어 연구X영상문화기획 단체 프로젝트38 멤버.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했다. 『손상된 행성에서 더 나은 파국을 상상하기』, 『페미니즘 리부트』 『성평등』 『다시, 쓰는, 세계』,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등을 썼고, 공저에 『21세기 한국영화』 『대한민국 넷페미사史』 『을들의 당나귀 귀』 『원본 없는 판타지』 등, 역서에 『여성 괴물, 억압과 위반 사이』 『다크룸』 등이 있다.
조이언니
2020.06.23
언젠가 제가 영화감독이 되어 선생님이 제 영화에 대한 글을 써주시는 날을 꿈꾸고 있어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뭉클해져요.
연재 응원합니다.
호두산책
2020.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