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꿈을 이룬 게 성공이라면 전 성공한 셈입니다. 대단한 사회적 명예를 얻거나 부를 축적한 것이 아니라 집 거실을 서재로 만들어서입니다. 어릴 때 꿈이 저만의 서재를 갖는 거였으니까요. 변변한 가구가 없어 유일한 장식품이 책이어서도 그렇지만, 벽 한 면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책을 보면 뿌듯하고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독가인 부모님과 오빠들, 그리고 책 외엔 변변한 취미생활이 불가능했던 60~70년대의 시대 상황에서 게으른 저의 취미이자 일상은 엎드려 온갖 책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문학전집이 유행일 때라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어가다 성인이 된 후엔 직접 책을 사는 기쁨을 누립니다. 한쪽 벽을 책꽂이로 만든 후 인물전기, 역사, 여성학, 경영학과 마케팅, 노년, 여행 등 관심 가는 분야로 나누고, 새 책을 구입하면 마치 헌옷을 버리듯 다른 책을 버리고 채워 넣습니다. 다시 꺼내볼 가능성이 없는 책인데도 버릴 때는 참 가슴이 아픕니다.
아주 행복한 날에도, 마음이 산란한 날에도 서재에 앉아 책을 하나 둘 꺼내 들춰보며 저자와 마음의 대화를 나누고, 밑줄을 그어가며 읽는 버릇이 있어 밑줄 그어진 부분만 다시 훑어보기도 하고, 책을 읽던 당시의 제 모습과 상황을 떠올리기도 합니다. 신기하게도 책을 만지면 마음이 평화로워집니다.
서재는 제 놀이터이자 생각의 저장고입니다. 즐겁고 신나게 머리와 마음이 뛰어놀아 에너지를 비축하는 공간이기도 하고, 책을 통해 얻은 지식, 정보, 감동들이 와인저장고처럼 저장되어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꺼내볼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머리는 벌써 흰머리가 가득한데 눈은 노안이 되지 않아 아직도 책을 부지런히 만납니다. 이 즐거움을 아주 오래도록 느끼고 싶어집니다. 특히 딸이 어린 시절엔 빨강머리 앤, 요즘은 무라카미 하루키나 알랭 드 보통의 책을 같이 읽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너무 행복합니다. 이 다음에 손주에게도 책 읽어주는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명사의 추천
남자: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저/인성기 역 | 들녘
독일의 문명비평가 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수가 쓴 남자들의 진정한 자아를 그려낸 책. 그레이 박사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가 남녀의 정서나 사고의 차이를 자상하게 설명해줬다면 이 책은 남성의 본성을 아주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남성의 치부까지 솔직하게 고백한 책이다. 남자란 속은 어린 아이지만 왕자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존재라거나,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을 마치 다른 밭에 씨를 뿌리는 것처럼 여기고 죄의식이 없다는 것 등의 글을 읽으며 가장 특이한 종족인 남성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었다. 슈바니츠 교수 덕분에 나는 허풍쟁이 남자 앞에서도 겉으론 비웃거나 비아냥대지 않고, 그들이 왕자인 척할 때 기꺼이 시녀인 척해주면서 이 거친 사회, 여전히 남존여비 사상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총 맞지 않고 버티고 산다.
행복의 충격
김화영 저 | 문학동네
대학 1학년 때 발견한 이 책은 내게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이 책을 읽고 어찌나 프로방스 지방으로 훌쩍 떠나고 싶어졌는지….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의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체, 당시엔 드문 여행 에세이란 것도 좋았지만 이 책은 끝없는 지적 확장을 경험하게 해준 책이다. 일단 나는 이 책에 소개된 다른 문학작품들, 알베르 카뮈나 장 그르니에의 책을 찾아 읽었고 프로방스 지방을 공부했고 이윽고 김교수의 모든 책을 스토커처럼 열렬하게 탐독했다. 1983년, 처음 유럽 여행을 갔을 때 아무 연고도 없는 엑상프로방스를 찾은 것도 모두 김교수의 『행복의 충격』 덕분이었다. 40년 전에 나온 책인데도 여전히 싱싱하고 촌스럽지 않은 이유는 이 책에서 청춘과 행복이 날 것으로 살아 숨쉬기 때문이다. 이 책을 꺼내 읽을 때마다 주름진 얼굴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다시 청춘이 되는 것 같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시오노 나나미 저/오정환 역 | 한길사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의 애인은 케사르이고 친구는 마키아벨리라고 공언한다. 그의 책 『로마인 이야기』 를 봐도, 케사르를 다룬 부분에서 다른 여성과의 관계는 지나치게 간단하고 냉소적으로 다뤄 진짜 수천년 전의 케사르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마키아벨리를 친구의 우정으로 쓴 책이다. 마키아벨리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의 유년기와 청년기부터 1498년 28세의 나이로 제2서기국 서기장으로 임명되어 피렌체의 외교관으로서 유럽 각지를 주유하던 일들 그리고 반메디치파로 몰려 관직에서 쫓겨난 뒤 『군주론』 을 비롯한 저술들을 쓰면서 이탈리아와 유럽의 정세에 대해 숙고하던 일들이 그려진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키아벨리의 고향인 피렌체에 머물며 그가 걸어다녔던 거리와 골목을 직접 다녀보고, 그가 서있던 베키오다리에서 그를 추억하며 마키아벨리가 마치 우리 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권모술수의 이론가로만 잘못 알려진 마키아벨리가 뜻밖에 순수하고 귀여운 인물로 새롭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제도권 교육을 받는 대신에 직접 온갖 자료를 찾고 혼자 공부해서 글을 쓰는 시오노 나나미는 이 책에도 마키아벨리가 남긴 편지, 당시의 문서 등 자료들을 활용해 더욱 객관적이고 생생한 분위기를 전한다. 한 인물에 대한 책은 문장력보다 그 인물에 대한 애정이 더욱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몽테 크리스토 백작
알렉상드르 뒤마 원저/송종호 편/이명선 그림 | 지경사
초등학생 때 아동명작문고에서 『암굴왕』 이란 제목으로 이 책을 읽은 후 오증자 교수가 번역한 5권의 책까지 수십 번을 읽었다. 주인공 에드몽 단테스는 물론 당그라르, 페르낭 등 어지간한 인물을 다 욀 정도다. 나폴레옹이 엘바에서 돌아오기 직전인 1815년, 건실한 선원 에드몽 당테스는 그의 연인 멜세데스를 탐낸 이들의 계략으로 나폴레옹과 연계되어 있다는 누명을 쓰고 마르세유 앞바다 사토 디프의 감옥에 갇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가 감옥에서 파리아 법사를 만나 학문을 익히고 그가 남긴 보물을 찾는 과정, 몽테 크리스토 백작으로 신분을 바꾸고 복수를 하는 과정도 흥미진진하지만 이 책에는 왕정복고 시대 프랑스의 부패한 금융계, 정계, 법조계의 실상과 여기에 스며든 주변 인간상이 너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당시의 복장, 음식, 보석부터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또 파리와 뒷골목이 풍속사처럼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어릴 때는 몽테 크리스토 백작이 통쾌하게 복수를 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했지만, 나이 들어서는 각 주인공들의 심리묘사 당시의 세세한 유행들을 알 수 있어 계속 읽게 된다.
아웃라이어
말콤 글래드웰 저/노정태 역/최인철 감수 | 김영사
기자 출신으로 이제는 경역사상가로까지 존경받는 말콤 글래드웰은 ‘뒤통수 치기’의 작가로도 불린다. 사회적 통념을 뒤집는 책을 계속 쓰기 때문이다. 『티핑포인트』 에서는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는 게 아니라 특정 순간에 발화점처럼 터진다’라고 주장했고 『블링크』 에서는 심사숙고하는 것보다 찰나의 직관이 오히려 정확하다며 각종 사례를 제시했다. 『그 개는 무엇을 보았는가』 역시 사람이 아닌 개의 시선에서 개를 다루는 법을 전했다. 『아웃라이어』 역시 “천재는 타고나는 게 아니라 환경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재능뿐만 아니라 1만 시간의 연습 필요하다며 ‘1만 시간의 법칙’을 강조해 화제가 됐다. 『아웃라이어』 는 성공의 비결을 살피는 자기계발서인 동시에 이를 가능케 한 사회ㆍ문화적 요인을 살피는 경영서다. 『아웃라이어』 는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성공의 비결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통상 어느 사람의 성공은 타고난 지능, 재능, 개인의 열정 등에 힘입은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글래드웰은 사회가 주는 ‘특별한 기회’와 ‘역사ㆍ문화적 유산’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다섯 살 때부터 작곡을 한 신동 모차르트도 알고 보면 숱한 작곡 실습 끝에 20대 무렵에야 제대로 된 작품을 만들었으며 빌 게이츠 역시 적극적인 학부형이던 엄마와 학부모들이 학교에 설치한 컴퓨터를 일찍 접해 몰두한 덕분에 IT업계의 황제가 됐다고 한다. 타고난 천재나 재벌2세가 아니어도 어딘가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주장은 나 같은 보통사람들에게 위안을 준다. 앞으로 발레든, 프랑스어든 1만 시간만 투자하면 전문가가 된다는 기대를 갖게 된다. 물론 그 결심이 1만 시간은커녕 10시간도 못 가는 게 탈이긴 하지만….
노년
시몬 드 보부아르 저/홍상희, 박혜영 공역 | 책세상
정년이 60세로 늘어나고 호모헌드레드, 100세를 살아야하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50대만 넘어도 노인 취급을 당한다. 우리에겐 사르트르와의 계약연애로 유명하지만 여성해방운동가이자 탁월한 작가이기도 한 보부아르는 60세가 들면서 자신이 느끼는 나이, 이 사회가 주는 시선에 절망해서 이 책을 썼다. 보부아르는 ‘노년’이란 사회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에 주목했다. 노년을 단지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데, ‘노쇠’하면 떠오르는 퇴보와 쇠퇴의 개념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라는 배경 안에서 만들어진 총체적 개념이기 때문에 노인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심도 깊게 접근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에세이가 아니라 사회비판 학술서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인간사회에서 노인이 차지해 온 위치를 여러 기록을 통해 방대하게 훑고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 문인들이 노년과 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정의했는지, 또 문학 속에서 노인은 어떤 모습이었는지까지 그렸다. 천하의 보부아르도 나이 들어가고 할머니가 되어간다는 것을 저주로 여기고 노인을 무시하는 사회에 화를 내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구보다 활기찬 노년을 보낸 것도 신기하다. 몹시 두껍고 비슷한 사례가 많아 지루한 면도 있지만 노년의 예방주사를 맞는 기분으로 읽었다.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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