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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특집] 사막 속의 오아시스, 와카치나

김현지 작가가 만난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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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남미 여행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가장 우리다워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2024.08.27)

ⓒ결 


여행은 새로운 공간으로 떠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일입니다.
여행 작가들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왔을까요?
'여행'과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주제로 듣는 이야기.


남미라는 나라에 관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모른 채 우유니만을 보려고 떠나왔던 내게 페루는 선물 같은 나라였다. 이카에서 오아시스 마을이라는 와카치나를 보기 위해 또 한 번 이동했다. 마을에 도착한 뒤 숙소와 버기투어를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돌아다녔다. 11월에서 3월은 남미에서는 여름 시즌으로, 남미의 성수기답게 한국 사람들이 많았고 사막을 즐기기 위한 버기투어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와카치나에서 난생처음으로 사막을 보았을 때, 모두들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막에 압도되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오아시스를 숨기고 있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와카치나는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으로 이 오아시스에 살게 된 인어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한 어여쁜 여인이 목욕을 하다가 훔쳐보는 사냥꾼에 놀라 도망을 갔는데, 나풀거리는 옷은 모래 언덕이 되고, 그녀가 남긴 목욕물이 바로 와카치나의 오아시스가 되었고, 그 여인은 훗날 오아시스로 돌아와 인어가 되었다는 전설이다.

전설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모래언덕은 ‘나풀거리는 그녀의 옷’이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고와서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였고, 오아시스는 과연 당장이라도 인어가 나타날 것처럼 신비로움을 감추고 있었다. 

내가 꿈꾸던 오아시스였다. 

아마 우리가 생각하는 오아시스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면 그건 와카치나의 오아시스가 분명하다.

문득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는 말이 떠올랐다. 극도로 척박하거나,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무언가 한줄기 희망의 대상이나, 소중한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 사람 혹은 그 상황에 대하여 일컫는 찬사이다. 나는 와카치나의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그러한 말이 왜 관용어가 되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누군가는 쉽게  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표현이지만 와카치나를 본 이후 나는 그 말을 더 이상 쉽게 꺼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나는 그러한 말을 해야 할 때 와카치나를 떠올리며 온 마음을 다해 말한다. 너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라고. 그게 내가 누군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와카치나, 바로 그곳에서 오아시스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남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최적화된 구릿빛 피부와 오랫동안 다듬지 않아 아무렇게나 난 수염. 길어진 머리의 그는 온몸으로 장기여행 중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조종사 준비를 하고 있다던 동행 오빠는 항공사에 취직하기 전에 장기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빠가 함께 데리고 온 또 다른 동행 두 명. 성격도 참 좋아 보이는 여자애들 두 명이 ‘여행 중에 배낭을 통째로 털려서 눈썹을 못 그리고 있어요!’ 하고 베시시 웃는다. 25살답지 않은 씩씩함과, 친구끼리 와서 장난스레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내 25살은 어땠지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게 만들었다. 처음 만난 사람들인데도 그들과 신나게 사막의 모래바람을 뒤집어쓰고선 꽥꽥 소리를 지르며 샌딩보드를 실컷 탔다. 행복한 시간들은 아직도 내 카메라 속에 소중하게 담겨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샌딩보드를 타며 웃고 떠들고 있던 순간 ‘저기 좀 봐!’라는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푸르렀던 사막의 하늘은 사막 위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점점 잦아들며 핑크빛 노을을 선사했고, 그 순간 그곳에는 핑크색과, 황토색 모래 두 가지 색만이 존재했다. 

그렇게 시끄럽던 그들이었는데도, 사막 한가운데에 앉아서 노을이 지는 걸 바라볼 때만은 숙연했다. 우리는 사구에 나란히 앉아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사막의 일몰을 담고 또 담았다.


버기투어가 끝난 후 숙박을 예약하지 않아 숙소가 없었던 나는 사막의 모래를 씻어낼 틈도 없이 바삐 그곳을 떠나야만 했다.  나의 동행들은 자기들의 숙소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흔쾌히 공간을 내어주고 수건도 빌려주었고, 나는 고마움만 몽땅 받고 갔다. 그렇게 오아시스 같던 사람들과 투어가 끝난 뒤 바비큐로 한 끼 식사밖에 할 수 없는 짧은 시간이 아쉬웠다. 그 순간 그 자리에 눌러앉아서 그들과 좋은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마음에 쉽사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행이, 그리고 인생이 그러하듯 우리 모두는 인생길에서, 혹은 여행길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도 하지만, 각자만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하는 날들도 온다. 어쩌면 여행은, 남미는 인생에서 숱하게 다가 올 만남과 이별을 연습하기에 최적의 장소가 아닐까.


그 후로 몇 년이 흐른 뒤 나는 일터에서 동행 오빠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었다. 남미에서 듬성듬성 났던 수염과 긴 파마머리는 말끔히 잘라버린 채, 오빠는 와카치나에서 말한 꿈대로 어느새 의젓한 사회인, 조종사 캡틴이 되어 나타났다. 우리는 여행을 하며 꿈을 나누었고, 삶으로 돌아간 이후 말하고 목표한 대로 살아가고 있다.

잘 갖추어진 유니폼을 입고 커피 한 잔을 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우리가 남미에서 미친듯이 소리를 지르며 버기투어를 하며 여행하던 사람들이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참 좋다.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우리는 직장에서 화장도 곱게 하고 항상 친절하고 의젓하게 웃고 있지만, 여행지에서 우리는 좀 새카맣게 타고 햇볕에 그을려 있다.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는 기분 나쁜 일이 생겨도 기분 나쁜 티 하나 안 내고 웃는 방법을, 감정을 숨기는 법을 아주 잘 알고 있지만, 여행지에서의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맘껏 드러낸다. 친절한 승무원으로 일하는 나지만, 여행지에선 시끄럽게 웃어대고 신나면 아무 데서나 춤도 추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사회인으로서 살아가는 모습도 나의 모습 중의 하나이고, 여행지에서 왁자지껄한 모습도 여전히 내 모습이다. 

우리가 나다워지는 시간을, 나다워지는 장소를, 나다워지는 사람들을 만나는 건 참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세월에, 환경에, 책임감에, 주어진 것들에 눌려버려서 나 자신이 없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서글퍼진달까. 아마 누군가에게는 그저 휴식, 누군가에게는 자아를 찾는 시간 등 각자의 여행하는 이유는 다 다를 테지만, 직장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때 그 남미의 여행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가장 우리다워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어쩌면 무언가 깨달음을 발견하고 삶의 무언가를 얻으러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들을 비워내려 떠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현실로 돌아왔고, 남미에서의 추억과 기억을 간직한 채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뜨거웠던 노을만큼이나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고 현실을 살아갈 것이고, 일상에서 크고 작은 오아시스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 필자 | 김현지

대학생때 여행 다니는 게 그저 좋아서 해외에서 하는 대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시아나 드림윙즈에 참가했고, 이 일을 계기로 아시아나항공에 입사해 현재 10년 차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다. 비행을 마치면 여행을 갔고 여행을 마치면 비행을 갔다. 수많은 여행과 비행의 이야기를 틈틈이 기록하다 보니 여행 크리에이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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